출처(出處)에 관한 설을 보내 주신 덕에 저같이 고루한 자로서도 두 분 존형께서 주고받은 정밀한 의리에 대한 은미한 말씀을 들을 수 있었으니 매우 다행이었습니다. 다만 제가 어리석어 두 분의 설에 모두 의심스러운 점이 있습니다. 만약 제가 참망(僭妄)됨을 꺼리어서 감히 여쭙지 못한다면 존형들께서 보여 주신 뜻을 저버리는 것이니, 구구한 제가 어찌 도가 있는 분에게 나아가 바로잡는 도리를 다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에 감히 제 생각을 다 말씀드려서 잡아 주기를 바라니 존형들께서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무릇 오랑캐와 찬시(簒弑)한 자는 같지 않으니, 찬시하여 나라를 얻은 자는 정통(正統)에 들 수 있으나 -진(晉)ㆍ수ㆍ송나라의 경우입니다.- 오랑캐로서 나라를 얻은 자는 정통에 참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원(元)의 경우입니다.-정전(程傳)에서 “예(羿)ㆍ왕망(王莽)은 말할 수 있으나 여와(女媧)ㆍ측천무후(則天武后)는 말할 수 없다.”라고 한 의리로 미루어 본다면, 오랑캐가 나라를 얻은 것이 정상이 아닌 이변임을 알 수 있습니다. 공산필힐(公山佛肹), 위(衛)나라 첩(輒), 형초(荊楚)와 같은 부류는 만약 집안으로 비유하자면 다만 아비에게 대든 자식이나 주인을 배반한 종과 같을 뿐이니, 비록 심한 패역(悖逆)을 하였다 하더라도 그 주인과 아비는 여전히 건재하므로 선도하고 교화할 방법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선도하고 교화하면 군신과 부자의 사이가 예전과 같아질 것입니다. 오랑캐는 그렇지 않아서 여자가 남자가 되는 것이나 밤이 낮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중국 사람의 입장에서는 힘으로 그들을 없앨 수 있다면 없애겠지만, 없앨 수 없다면 오직 자기의 몸을 잘 수양할 뿐일 것입니다. 성인께서 행하신 권도(權道)를 감히 알 수는 없으나 정자(程子)와 주자(朱子) 이래의 척도로 헤아려 보면 오랑캐를 섬겨야 할 의리는 기필코 없으니, 화숙(和叔) 노형께서 말씀하신 “저들을 섬길 이치도 있다.”라고 한 것은 매우 의심스럽습니다. -양이(養以) 형이 “비록 성인의 도가 관대하나 어찌 하루라도 짐승들을 북면(北面)하여서 섬길 수 있겠는가.”라고 한 말씀과 “형초와 오랑캐는 차이가 있다.”라고 한 말씀은 바로 저의 생각과 부합합니다.-
성현들께서는 비록 백성들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 여겼지만 왕척직심(枉尺直尋)하지는 않으셨으며 포호빙하(暴虎馮河)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이러한 변고를 만난 세상에서 중국을 높이고 천하를 바로잡는 것은 벼슬길에 나아간 사람의 첫 번째 의리이며, 예의를 삼가 지키는 것은 물러나 있는 사람의 첫 번째 의리입니다. 이보다 한 단계 밑으로는 나아가면 공적을 헤아리는 사심(私心)이 있고 물러나면 처신을 잘못하는 허물이 있으니 이는 어느 쪽도 옳은 것이 없습니다. 관중(管仲)을 어질다고 말한 것은 다만 그가 사업을 이룬 것을 보고 그 공을 칭찬한 것이니, 어찌 관중의 공을 지극히 훌륭하다고 여긴 것이겠습니까. 그리고 ‘일의 성패와 유리함, 불리함을 미리 예측할 수는 없다.’라고 한 것은 다만 온힘을 다하고 죽음에 이른 다음이라야 그만두겠다는 뜻을 말한 것일 뿐이니, 어찌 이루지 못할 것이며 이롭지 못하다고 여겨 그런 것이겠습니까. 지금 ‘비록 중국을 높이고 오랑캐를 물리쳐 우리 동방을 이적(夷狄)에서 벗어나게 하지는 못했지만 그 공적만은 역시 훌륭하다.’고 한다면 왕척직심의 병통과 공적을 따지는 병통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며, 지금 ‘하루만이라도 원한과 부끄러움을 씻을 수 있다면 군자는 그 의리를 행할 뿐이다.’라고 한다면, 또한 공허한 말을 내뱉고 실질이 없는 병통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치욕당한 것을 설욕하고 의를 행하는 것을 온당치 않다고 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겨우 하루의 계획을 행하고 그저 의를 행한다는 명성을 얻기 위한 것이면, 진실한 마음으로 실질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도리를 잃은 것입니다.-
이러한 즉 양이 형의 설에도 의심이 없을 수 없습니다. 양이 형이 말씀하신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벼슬하는 것은 저들 나라에서 벼슬하는 것과 차이가 있다.”라고 한 것은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전에 《석담어록(石潭語錄)》을 보니 송 고종(宋高宗)이 군부를 잊고서 원수에게 신(臣)이라 칭하였기 때문에 “정통(正統)에 포함할 수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의도는 소열제(昭烈帝), 진 원제(晉元帝)와 같은 경우로 허락하지 않으려는 것이니 이 점을 깊이 성찰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와 비교하면 송나라가 나은 점이 있어서, 송나라는 그들과 대등한 나라였지만 우리는 완전히 속국입니다. 다만 강역(疆域)의 한계가 있어서 관원을 우리나라 자체적으로 임명할 수 있으니, 이것이 저들 나라에서 벼슬하는 것과 차이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벼슬하는 의리’는 아마도 화숙 형의 설을 바꿀 수 없을 듯합니다. 대현(大賢) 이상의 경우는 세상에 나아가 무언가 해야 하지만 그 이하의 경우는 물러나 몸을 지켜야 하는 것인데, 조정에 나아가 밝은 정치를 회복할 뜻이 있다면 녹을 받는 벼슬이라도 무방할 것입니다. 중국 사람의 경우라면 저들 오랑캐의 나라에서는 비록 대현 이상이라고 하더라도 나아가서는 안 되고 비록 녹을 받는 벼슬도 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제가 ‘차이가 있다’고 한 것이니 ‘차이가 있다’는 말은 양이 형과 같지만 내용은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화숙 형의 설은 “배우는 자들은 그래도 자신을 지키기만 하면 허물이 없다.”는 것이고, 양이 형의 설은 “대현 이상이 아니면 시도해 볼 수 없다.”는 것으로, 이는 바로 마 복파(馬伏波)가 말한 ‘곡무구호(鵠鶩狗虎)의 비유’와 같으니, 우리 당 선비들이 택할 바를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구구하게 장님 같은 견해에 대해 두 분 존형께서 취사하고 절충해 주십사 참람되게 논의한 것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바라건대 변론을 더해 주셔서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추신〕 화숙 형이 말씀하신 ‘성신작용(聖神作用)’의 설에는 너무 성급하고 지나친 병통이 있는 듯하고, 양이 형이 말씀하신 ‘하루만이라도……’라고 한 설에는 왕척직심의 병통과 공적을 따지는 병통이 있는 듯하며, ‘일의 성패……’라고 하신 설에는 공허한 말을 내뱉고 실질이 없는 병통이 있는 듯한데, 두 분 노형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양이 형의 ‘차이가 있다’는 말씀과 화숙 형의 ‘대현(大賢) 이상은 나아갈 수 있다’는 말씀은 바로 저의 생각과 부합하지만, 또한 약간 같지 않은 점도 있습니다. 애초에 자세히 설명하여 올바른 것을 구하고자 했으나, 자신할 수 없는 점도 있어서 먼저 이렇게 간략하게 답장을 드리니 다음에 혹시 직접 만나 뵙게 되면 가슴속에 쌓인 것을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붙임 이양이(李養以)에게 의논 드린 편지
‘의리를 행하고 도를 행한다〔行義行道〕’에 대하여 :
이 네 글자는 핵심에 해당하기에 감히 간략하게 논의하겠습니다. 비록 도가 행해지지 않을 것을 알더라도 기필코 도를 행하려는 것은 바로 군신 간의 의리가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지, 의리를 행하는 한 절목 외에 또다시 도를 행하는 한 절목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도를 행하기 위해 벼슬하는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그것이 의리를 잊고 이득을 좇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겠습니까. 만약 한 차례의 사은숙배(謝恩肅拜)를 의를 행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화숙 형이 말한 “교지를 받들고 벼슬을 사양하는 것은 인륜을 어지럽히고 세상을 피하는 선비와 다르고, 입궐해서 사은숙배하는 것은 의리를 행하여 벼슬하는 것에 미치지 못한다.”는 설이 바로 그에 해당합니다. 이 말은 제 의견과 합치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한 번 사은숙배하는 것이 집에 있으면서 사장(辭狀)을 올리는 것과 얼마나 다릅니까. 저 담을 넘어가고 문을 닫아거는 자가 어찌 사직하는 글을 쓰겠습니까.-
전체의 대의(大義)에 대하여 :
이는 화숙 형의 답에 이미 다 밝혀졌으니 별도로 설을 제시하려 하면 상 위에 상을 쌓는 격이 될 듯합니다. 화숙 형의 “벼슬하지 않는 이유는 바로 임금을 섬기는 의리에 신중을 다하려는 것”이라는 말과, “분수를 헤아려 바른 길을 따르고 작은 것을 잘 살펴 중도(中道)를 택한다.”는 말과, “존주(尊周)의 의리를 따를 수 없으니, 세월이 오래되어 마침내 변하였다.”는 등의 말들은 하나하나가 사실에 꼭 들어맞는데, 이에 대한 노형의 소견은 또 어떠하신지요? 셋이 모여 앉아 두 분 형께서 주고받는 토론을 들을 수 없는 것이 한스러울 따름입니다.
ⓒ 한국고전번역원 | 장재한 (역) |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