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해의 법칙
1.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닙니다.
성숙한 인간관계를 갖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의 차이점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것을 틀렸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생각은 첫째, 무지에서 생깁니다. 저도 한때 저와 다른 것을 틀렸다고 생각했고, 지금도 가끔은 그런 생각을 합니다. 저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정죄한 적도 있습니다. 무조건 비판한 적도 있습니다. 저의 문제는 사랑의 문제가 아니라 무지의 문제였습니다.
또한 그런 생각은 무지의 문제였을 뿐만 아니라 둘째 미숙의 문제였습니다. 다른 것을 틀렸다고 생각하는 것은 미숙한 생각입니다. 다른 것을 틀렸다고 말할 때 우리는 다양성을 무시하는 것이 됩니다. 이런 미숙한 생각 때문에 관계가 깨어지고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결혼 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가정의 문제 가운데 상당히 많은 부분이 서로 맞지 않는 것이라고 합니다. 서로가 너무 다르다는 것입니다. 성격이 맞지 않고, 취향이 맞지 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질문하고 생각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두 사람이 연애를 하거나 결혼하기로 작정했을 때는 다른 점보다는 비슷한 점이 더 많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또한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점 때문에 불편을 느끼기보다 그것 때문에 더욱 매력을 느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다르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를 신중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결혼은 신비한 것이므로 어떤 문제를 한마디로 판단하거나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 기억해야 할 사실은 남자와 여자는 서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같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것이 당연하며 그 다른 것 때문에 서로 만나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닙니다. 다른 것은 다른 것일 뿐입니다. 다른 것은 다양함을 맛보게 하는 축복된 선물입니다. 다른 것은 서로의 다른 점을 보충해 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의 다른 점을 인정하고 이해할 때 우리의 관계는 놀랍게 새로워집니다.
사람의 차이는 남자와 여자의 차이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어느 정도 차이가 있습니다. 기질이 다르고, 성향이 다르고, 외모가 다르고, 성장해 온 배경이 다릅니다. 우리는 모두 어느 정도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인간은 다른 점뿐만 아니라 비슷한 점도 많이 있습니다.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와 필요 중에는 비슷한 점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점과 비슷한 점 모두를 잘 이해하고 충분히 받아들이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인간관계에 있어 많은 문제는 서로의 다른 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비판하고 정죄하는 데 있습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기보다 많은 변화를 요구하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변화시키기 위해 만난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기 위해 만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사람들의 다른 점을 비판하고 정죄하고 변화시키는 일에 몸부림을 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경우에 서로를 고치려고 합니다. 상대방을 이해하고 용납하기보다는 상대방을 변화시키려 합니다. 그런 과정에서 감정을 상하게 하고, 때로는 돌이킬 수 없는 극단적인 상황으로까지 몰아가게 합니다. 우리는 서로 돕기 위해 만났습니다. 우리를 서로를 고치기 위해서라기보다 서로의 부족한 점을 보충하기 위해 만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상대방을 변화시키려고 노력하기 전에 먼저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먼저 이해하고 사랑하게 되면 변화는 그 열매로 일어날 것입니다.
창세기 2장에서 최초의 남자와 여자가 만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성숙한 인간관계의 법칙 가운데 이해의 법칙을 배우게 됩니다.
2. 인간의 실존을 이해할 때 관계의 기술이 탁월해집니다.
인간을 이해하는 것이 행복의 비결입니다. 자족의 비결입니다. 잘못된 기대만큼 위험한 것은 없습니다. 인간에 대한 잘못된 기대, 즉 비현실적인 기대 때문에 우리는 분노하게 됩니다. 실망하게 됩니다. 좌절하게 됩니다. 우리는 인간의 실존을 있는 그대로 이해해야 합니다. 인간은 하느님이 아닙니다. 비록 하느님의 형상을 닮은 가장 아름답고 영화로운 존재이지만 인간은 인간입니다. 인간은 한계를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하느님이 아닙니다. 비록 하느님의 형상을 닮은 가장 아름답고 영화로운 피조물이지만 인간은 인간입니다. 인간은 한계를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또한 인간은 영적인 존재입니다. 인간이 하느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고 하느님이 인간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인간은 정서적인 존재입니다. 하느님이 인간을 만드실 때 그 안에 마음을 담아 두셨습니다. 감정을 담아 두셨습니다. 그런 까닭에 인간에게는 감정이 있습니다. 인간은 또한 육체적인 존재입니다. 흙으로 지음을 받은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육체는 육체의 필요를 채워주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을 이해할 때 총체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창세기 2장에서 이해할 수 있는 인간의 실체는 무엇입니까?
1) 인간은 고독합니다.
하느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후 그 만드신 것을 보고 참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담을 만드신 후에 처음으로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담이 홀로 있는 것이 좋지 못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만들어 주겠다’(2,18)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아담이 홀로 있는 것이 좋지 못함을 아셨습니다. 그 까닭에 아담이 외로워했기 때문입니다. 아담의 후예는 외롭습니다. 인간의 가장 큰 고통 중의 하나가 고독입니다. 우리는 서로의 외로움을 어루만져 주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외로움은 인간의 실존입니다. 누구든지 만나 보십시오. 외롭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2) 인간은 불완전합니다.
인간은 하느님처럼 스스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은 아담에게 협력자가 필요했음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아담의 갈비뼈로 하와를 만드십니다.
“이렇게 사람은 모든 집짐승과 하늘의 새와 모든 들짐승들에게 이름을 붙여 주었다. 그러나 그는 사람인 자기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찾지 못하였다. 그래서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 위로 깊은 잠이 쏟아지게 하시어 그를 잠들게 하신 다음, 그의 갈빗대 하나를 빼내시고 그 자리를 살로 메우셨다. 주 하느님께서 사람에게서 빼내신 갈빗대로 여자를 지으시고, 그를 사람에게 데려오시자, 사람이 이렇게 부르짖었다.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 불리리라’”(창세 2,20-23).
하느님이 아담에게 하와를 만들어 주신 가장 큰 이유는 그에게 돕는 배필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어딘가 부족한 것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합니다. 우리가 만난 것은 불완전함을 비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불완전함을 보충하기 위해 만난 것입니다. 우리가 존재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주기 위함입니다.
3) 인간은 친밀한 연합을 통해 열매를 맺습니다.
하느님이 아담과 하와를 만드신 이유는 두 사람이 결합하여 자녀를 낳고 번성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된다”(2,24).
혼인은 두 사람이 결합해서 한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때 태어나는 것이 자녀입니다. 혼인의 목적 중 하나는 자녀를 낳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내리며 말씀하셨다.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고 지배하여라. 그리고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을 기어 다니는 온갖 생물을 다스려라’”(1,28).
자식을 낳고 번성하게 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여인이 잉태하고 해산하는 고통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열매를 맺는 것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씨앗을 심어야 하고, 씨앗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 합니다. 그때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원리입니다. 이것이 행복의 비결입니다. 힘들어도 열매 맺는 삶을 살 때 우리는 행복을 경험하게 됩니다. 여인들을 관찰해 보십시오. 아이를 잉태하는 그 날부터 고통이 시작되지만 그 고통을 큰 행복으로 여깁니다. 자녀가 태어날 때 그 고통과는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친밀한 결합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친밀한 결합이란 자신을 벌거벗을 때 가능합니다.
“사람과 그 아내는 둘 다 알몸이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2,25).
친밀한 결합은 무장을 해제함으로 가능합니다. 우리가 무장을 해제하는 곳은 식탁과 침실입니다. 우리는 식사할 때 모든 무장을 해제합니다. 무기를 내려놓습니다. 또한 침실에서 옷을 벗음으로 무장을 해제합니다. 그러므로 친밀함에 이르는 길은 서로의 무장을 해제함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인간은 가장 연약해질 때, 모든 무장을 해제할 때 사랑에 이르게 되고, 친밀한 결합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은 모든 인간관계에서 마찬가지입니다.
친밀한 사랑을 위해서는 서로를 노출시키는 모험을 해야 합니다. 육체적인 노출은 부부간의 관계를 위함입니다. 부부 사이가 아닌 친밀한 인간관계의 노출이란 자신의 내면을 노출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을 나누는 것입니다. 특별히 자신의 연약한 것, 단점 그리고 약점을 드러낼 때 친밀한 공감대를 형성하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더욱 깊은 사랑, 친밀한 교제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4) 인간의 만남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인간은 하느님이 의도하신 목적을 이룰 때 행복하게 됩니다. 하느님은 하느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아담과 하와를 만드시고,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고 지배하고,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을 기어 다니는 온갖 생물을 다스리라고 명하셨습니다. 아담에게는 하느님이 만드신 모든 만물의 이름을 지으라고 명하셨습니다. 아담이 하느님이 자신의 갈빗대를 만든 사람을 여자라 부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자라는 이름을 지어준 것은 하느님이 아니라 아담이었습니다.
하느님이 아담과 하와를 지으시고 만남을 주선하신 것은 하느님이 뜻하신 목적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귀중한 인생의 원리와 이치를 터득하게 됩니다. 인생은 만남이라는 거죠. 인생은 만남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인생은 좋은 만남, 축복되고, 목적 있는 만남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인생의 만남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우연한 만남은 없습니다. 우리의 만남은 하느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만남입니다.
인간은 목적 지향적인 삶을 살 때 건강합니다. 저는 이 사실을 날마다의 삶 속에서 경험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날마다 목표를 정하고 살아갈 때 가장 역동적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가장 건강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목표가 없을 때 인생은 방향을 잃은 배와 같습니다. 목표가 없을 때 인간은 불안해지고 초조해집니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방향입니다. 우리는 정기적으로 방향을 점검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난 목적을 점검해야 합니다.
우리 영혼이 피곤을 느낄 때 그것은 일이 너무 많기 때문이 아닙니다. 방향을 잃은 것 같을 때 우리 영혼이 피곤해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토록 많은 일을 하시면서도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신 것은 언제나 목적 지향적인 삶을 사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날마다 하느님 아버지와 교제하는 중에 이 땅에서의 목적을 점검하고 그 목적을 이루는 삶을 사셨습니다.
인간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길은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또한 자신을 깊이 연구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연구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연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관계의 출발은 자신 안에서 시작됩니다. 우리의 관계는 자신을 이해하는 것만큼 발전하고, 자신의 깨달음만큼 성장하게 됩니다. 또한 깨달은 것을 실천하는 것만큼 우리의 관계는 성숙해집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실은 자신을 연구한다고 해서 자신을 다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다른 사람과의 대화와 사귐을 통해서 자신을 더욱 깊이 이해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과의 교제를 통해 다른 사람 안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성경을 통해 인간을 이해하고, 자아 성찰을 통해 자신과 인간을 이해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만남과 대화를 통해 인간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가 서로를 이해해야 할까요? 그 이유는 참된 사랑을 위해서입니다.
3. 서로 사랑하기 위해 다른 점을 이해해야 합니다.
인간관계를 통해 얻는 행복은 서로 너무 잘 맞는 사람들이 만났기 때문에 경험되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만나서 서로 잘 적응하는 과정에서 경험되는 것입니다. 행복은 완벽한 만남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는 자녀들에게 서로가 잘 맞는 사람을 찾도록 안내해 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완벽한 만남보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만나서 잘 적응하는 것입니다.
서로가 잘 적응하기 위해서는 지식이 필요합니다. 적응하는 기술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서로 잘 이해하는 것만큼 더욱 잘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남편들에게 이해심을 가지고 아내와 동거할 것을 권고합니다.
“마찬가지로 남편들도 자기보다 연약한 여성인 아내를 존중하면서, 이해심을 가지고 함께 살아가야 합니다. 아내도 생명의 은총을 함께 상속받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야 여러분의 기도가 가로막히지 않습니다”(1베드 3,7).
이 가르침은 추상적인 가르침이 아닙니다. 그의 가르침은 경험적이요, 구체적이며, 실제적입니다. 그가 강조한 것은 남편들이 지식을 따라 아내와 동거하라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말하는 이해심은 단순히 아내의 심리를 알라는 정도가 아닙니다. 아내의 육체적인 필요까지 알라고 합니다. 아내의 성적인 욕구를 채워주는 데 필요한 지식까지도 말하는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어떻게 차이가 있는지를 알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내의 정서적인 필요, 즉 존경받고 싶고, 귀중히 여김을 받고 싶은 필요를 알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아내를 소중히 여길 것을 강조합니다. 또한 아내의 육체적인 필요와 정서적인 필요를 채워주는 것은 영적인 삶을 영위하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가르쳐줍니다. 육체적, 정서적 필요를 채워주지 못할 때 기도가 막히는 영적인 문제가 제기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주 중요하게 알아야 할 원리들이 있습니다.
1)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해하기를 갈망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서로를 이해해야 갈망해야 합니다. 이해를 추구하는 마음, 이해를 간절히 원하는 마음은 서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때 우리는 열린 마음을 가지고 대화를 시작하게 됩니다. 연애 시절 그토록 대화를 잘 나누던 연인들이 혼인 후 어느 순간부터인가 대화가 단절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서로 “그 사람은 날 이해하지 못해요”라고 말하기 시작합니다. 이해하기를 포기한 것입니다. 그때 우리의 가정은 얼음같이 냉랭한 가정이 되고 맙니다. 서로 이해하기르 포기한 가정은 이혼한 가정 이상으로 비참한 것입니다.
2) 이해하기 위해 사랑하고, 사랑하기 위해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만큼 이해합니다. 우리가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지식이 부족해서라기보다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관심을 갖게 됩니다. 관찰하게 됩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을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누군가를 이해하게 될 때 더욱 사랑하게 됩니다. 지식과 사랑은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습니다. 우리는 보지 못하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어도 알지 못하는 사람을 사랑하기는 어렵습니다. 시작장애인이 자녀를 낳아 기를 때 자녀를 보지 못하지만 사랑합니다. 그러나 알지 못하면 사랑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를 경험적으로 알 때 우리는 더욱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됩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알기 원하는 것은 그를 더욱 사랑하기 위함입니다. 성숙한 사람들은 익숙한 것을 소중히 여기지만 미숙한 사람은 익숙한 것을 경멸하고 멸시합니다.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마음의 문을 닫는 이유는 상대방이 너무 잘 알고 있어서 자신을 무시하고 경멸할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숙한 사랑이 열쇠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지식을 그들을 더욱 이해하고 사랑하는 데 사용할 것을 거듭 결심해야 합니다.
3) 이해하기 위해서는 표현하고 경청해야 합니다.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열린 마음으로 대화를 나누어야 합니다. 가장 아름다운 관계는 비밀이 없는 관계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벌거벗은 것처럼 혼인한 부부는 벌거벗은 마음으로 모든 것을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인간은 대화를 통해 서로를 알게 됩니다. 대화를 나눌 때 아주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상대방이 경청하고 잇다는 사실을 감지할 때 더욱 진지한 고백을 하게 됩니다. 경청하기 위해서는 집중해야 하고, 질문해야 합니다. 호기심과 탐구심을 가지고 질문해야 합니다. 혼인 생활을 행복하게 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나이가 들어도 서로에 대한 호기심과 탐구심을 상실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혼인 생활에서 아내가 정말 원하는 것은 대화입니다. 그 무엇보다도 간절히 원하는 것이 대화입니다. 남편이 경청해주는 것입니다. 어떤 결론이나 충고를 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대화하면서 자신의 감정을 풀기를 원하는 것이 아내입니다. 그러나 남편은 대화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성적인 욕구를 충족시켜 주기를 원합니다. 그렇다고 남자들이 대화를 싫어한다고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자신의 기본적인 욕구가 채워지면 남자는 대화를 하기 시작합니다. 어떤 면에서 남자들은 여자들보다 고백하는 것을 더 두려워합니다. 그 까닭은 자신이 나눈 대화로 인해 상처를 받을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여자만큼이나 남자들도 민감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남자들은 상처받는 것을 두려워하고 충고 듣는 것을 싫어합니다. 특별히 아내에게 충고 받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런 까닭에 대화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남자들이 과묵한 것이 아닙니다. 남자들도 자신을 비판하지 않고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는 사람을 만나면 모든 것을 털어놓습니다. 가정에서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는 아내가 자신을 이해해준다는 확신이 없기 때문이고 이야기를 털어놓으면 자꾸 충고하려고 하는 아내의 조급함 때문에 대화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어떤 대화도 비판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주는 술집을 찾아가게 됩니다. 전혀 알지 못하는 여인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고 눈물짓는 것입니다. 때로는 노래방에 가서 눈물을 흘리며 노래를 부르는 것입니다. 물론 신앙으로 이 모든 것을 승화시키는 남자들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일에 몰두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건전한 돌파구가 없을 때 어떤 남자들은 가서는 안 될 외도나 도박 등의 길에 들어서기도 합니다.
우리가 자신 안에 있는 두려움, 불안, 아픔, 상처, 염려와 같은 모든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줄 수 있는 사람, 경청해줄 수 있는 대상을 만난다면 신경정신과 의사를 찾아갈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부부가 서로에게 그런 대상이 되어줄 수 있는 성숙함에 이른다면 가정에서 천국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4) 이해하기 위해서는 서로의 차이점을 배워야 합니다.
남자와 여자의 차이를 보여주는 최초의 책은 성경입니다. 창세기 2장에 보면 남자와 여자의 차이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는 재료가 다릅니다. 남자는 흙으로 만들어졌고, 여자는 남자의 갈빗대로 만들어졌습니다. 남자와 여자의 구조가 다릅니다. 남자와 여자는 사랑을 느끼는 언어도 다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혼인 생활을 하면서 때로 이해할 수 없는 갈등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은 변함이 없는데 감정의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또한 나이에 따라 많은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통해, 또는 남자와 여자를 깊이 연구한 분들을 통해 남자와 여자의 차이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기혼자는 기혼자대로, 미혼자는 미혼인 상태로 남자와 여자를 이해해야 합니다. 자녀들을 잘 양육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남자와 여자의 차이를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결혼할 때 서로에 대한 높은 기대 수준을 가지게 됩니다. 결혼한 사람들은 그들 안에 강렬하고 본질적인 욕구를 서로에게서 충족하겠다고 약속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내면에 있는 강렬한 욕구들을 서로가 채워줄 것을 기대합니다. 결과적으로 다른 이성에게 한 눈 팔지 않겠다고 동의한 것입니다. 물론 그 점은 기본적인 성적 욕구를 가리킵니다. 혼인한 부부는 남편과 아내 외에 다른 사람에게서 이런 욕구를 충족시키지 않겠다는 데 동의를 했기 때문에 이 특별한 욕구를 배우자가 충족시켜 줄 것을 기대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남성은 ‘오로지’ 아내를 통해서만 성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겠다는 데 합의를 함으로써, 아내에게 많은 기대를 가지게 됩니다. 따라서 아내가 그 욕구를 충족시켜 준다면 남편은 아내와의 관계에서 계속적인 기쁨을 발견하게 되고 사랑은 깊어갈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이런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정반대의 일이 발생할지도 모릅니다. 다른 예로, 아내는 오로지 남편을 통해서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솔한 대화의 욕구를 충족시키려 합니다. 따라서 아내가 다른 사람과 나눌 수 없는 진솔한 대화를 남편과 나누게 되면, 남편으로부터 최상의 기쁨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만약 남편이 이런 아내의 갈망을 채워주는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아내는 욕구불만의 상태에 있게 됩니다. 몇몇 아내는 욕구불만 상태에서도 혼인 생활을 유지하지만, 많은 경우 감정적인 욕구를 충족시켜줄 다른 사람을 찾으려는 유혹에 빠져들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내가 강렬하게 원하는 욕구와 남편이 강렬하게 원하는 욕구를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습니다. 그가 ‘옳다, 틀리다’고 말하기 전에 단지 우리 안에 그런 욕구가 있는지 없는지를 생각해보기 바랍니다.
● 아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감정적 욕구
a.애정표현 b.대화 c.솔직함과 개방성 d.경제적인 부양 e.가족에 대한 헌신
● 남편이 중요하게 여기는 감정적 욕구
a.성적인 만족 b.여가 활동의 동반자 c.매력적인 외모 d.가정에서의 안식 e.칭찬하기
- 윌라드 할리, 그 남자의 욕구 그 여자의 갈망, 비전과 리더십 20-33, 320-323p
많은 학자들이 남자와 여자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를 통해 서로의 이해를 도우려고 하는 것은 우리가 항상 기본에서 출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자와 남자의 기본적인 욕구를 이해해야 하는 이유는 하느님이 남자와 여자를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주위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부부들을 보면 이런 서로의 차이를 모르고 자신의 욕구만을 생각하는 경향이 많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그리스도인 가운데서도 이 문제를 잘 이해하지 못해 혼인 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개신교의 김삼환 목사님이라는 분은 여신도들에게 “남편이 외도를 하면 남편을 돌이키게 해달라고 하느님께 금식하고 기도하는데, 그렇게 하기보다는 잘 먹고 잘 가꾸라”는 설교를 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물론 가정에 문제가 생기면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혹시 가정의 문제가 자신에게서부터 시작되지 않았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외도하고 집에 들어온 남편이 아내가 머리도 가꾸지 않고 음식도 먹지 않고 파리해 있으면 오히려 더 보기 싫어 집을 나간다는 것입니다. 남편이 원하는 것은 아내에게 가장 기본적인 욕구를 채우고 싶은 것인데 집에 들어오면 남편에게는 관심이 없고 자꾸 교회만 나가라고 하니 보기가 싫다는 것입니다. 남편의 기본적인 욕구를 잘 채워주면 신앙생활도 하고 싶은데 그렇지 않은 아내가 꼴보기 싫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람은 겉모습을 보지만 나는 마음을 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마음을 잘 가꾸고, 사람들 앞에서는 외모를 잘 가꿀 줄도 알아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성이 깊고, 영적으로 성숙하게 되면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를 무시해도 되는 줄 압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을 통해 드러난 영성은 육체와 영혼이 잘 조화를 이룬 영성입니다. 참된 영적인 성숙이란 인간의 기본적인 필요를 총체적으로 이해하면서 그 필요를 채워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4. 행복한 관계를 위해 거듭 하느님께 지혜를 구하십시오.
우리는 남자와 여자의 차이를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배웠습니다. 관계의 법칙에 있어 이해의 법칙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남자와 여자의 차이를 이해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하지만 결국 우리는 거듭 하느님께 돌아가서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하느님이 인간을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인간 안에 기본적인 욕구를 담아두신 분이 하느님이십니다. 우리 안에 육체적인 욕구, 정서적인 욕구 그리고 영적인 욕구를 담아두신 분이 하느님이십니다. 또한 남자와 여자에게 각각 다른 욕구를 담아두신 분도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듭 하느님께 나아가서 서로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서로의 필요를 잘 채울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느님이 서로의 마음을 움직여주셔서 서로의 문제를 이해할 수 있도록 눈을 열어주시면 어려운 관계도 한순간에 녹일 수 있습니다. 아주 심각한 문제가 잇는 줄 알았던 부부가 그들의 문제가 아주 기본적인 욕구를 채워주지 못한 데서 기인된 관계의 문제임을 알 때, 하루 저녁 사이에도 문제는 해결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도와주신 한 번의 강론이나 세미나에, 한 권의 책을 통해, 한마디의 조언을 실천해 보는 중에 놀라운 변화를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확신은 우리의 관계는 회복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감정도 회복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남자와 여자만 다른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어느 정도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닙니다. 다른 것은 다를 뿐입니다. 서로가 다른 것을 이해하고, 서로의 욕구의 차이를 이해하고, 서로의 필요를 잘 채워줄 때 우리의 사랑의 감정은 회복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갈망하는 우리들의 마음입니다. 하느님이 맺어주신 관계를 잘 발전시키기 원하는 갈망을 통해 하느님은 더 강렬하게 역사하실 수 있습니다. 이해의 법칙을 배운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작은 것 하나라도 실천하십시오. 반복해서 기억하고, 반복해서 실천하다 보면 사랑이 넘쳐나는 축복의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첫댓글 엠이부부...
아름답네요^^
저희 동네 성당 가실때
늘 꼬옥 팔짱 끼고 가시고
편안해 보이시고 걸을때
대화를 자주 하시는 부부가
계시는데.
그런데..부인이 점점 눈이
안 보이시다가 지금은 전혀
안 보이신다 해요
부인 을 정성으로
돌보시는 모습..
부부께서 참 아름답습니다^^
아멘. 아멘. 아멘.~~
서로 다름을 틀린것으로 알았던 것은 무지에서 오는 것 이었습니다.
우리는 서로 다를 뿐이다.
나누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