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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자료실 스크랩 청산도 박두진 【우리 시의 향기 2】
이순희 추천 0 조회 110 17.10.04 23:54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

 

 

 

 

【우리 시의 향기 2】

 

청산을 노래하는 생명의 상상력, 청산도

 

김현자
이화여자대학교 국문과 교수, 문학평론가

 

 

1.자연의 인식에셔 보여주는 생명적 이미지

 

‘청산’이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익숙하다. 시원의 향수와 함께 애틋한 그리움을 환기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일찍이 ‘살어리 살어리랏다/ 청산에 살어리랏다’라고 노래했던 고려인의 희구가 담긴 영원한 고향이자, ‘나비야 청산에 가자 범나비 너도 가자’ 나 ‘청산은 어찌하야 만고에 푸르르며’ 라고 노래했던 조선의 수많은 선비들이 꿈꾸었던 이상향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청산에 들어가 살지 않았다. 아니 그곳에 들어가 살 수 없었기 때문에 그토록 오래 청산올 노래했을 것이다.

이러한 이상향이란 흔히 지고의 선, 완성,동일성 등과 동의어로 쓰여지는 개념이다. 인간과 우주와의 완전한 화해, 부정적인 모든 것의 제거, 주체와 객체의 동일성, 모든 소외가 극복되어진 궁극적인 상태 등을 표현한다. 따라서 우리 문학에서 청산은 일상적인 실상으로서의 푸른 산을 넘어서 부정적인 현실에 대한 반대 개념으로서 대치된 곳으로, ‘인간의 자연화, 자연의 인간화’로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 길지 않은 우리의 현대시에서 이와 갇은 ‘청산’이 우리말의 리듬과 향기에 기대어 새롭게 재현된 대표적인 시를 꼽으라면 단연코 박두진의 〈청산도) <1947) 를 들 수 있겠다.

전통에 자리잡은 “동양적이고 얼마간 은둔적이고 자연스러운 호흡과 그러한 정서의 세계로 안정해 들어앉으려는” “고요하면서도 밝고 싱싱하고 생명에 찬 세계 그러한 ‘청산’을 시화하고 싶었다' 라는 시인의 고백에서도 이러한 특정은 재확인할 수 있다.

청산으로 대표되는 그의 자연은 이상화된 자연, 혹은 관념의 세계를 동시에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청산도  박두진

 

산아 우뚝 솟은 푸른 산아,

철철철 흐르듯 절푸른 산아,

숱한 나무들, 무성히 무성히 우거진 산마루에, 

금빛 기름진 햇살은 내려오고,

둥 둥 산을 넘어, 흰 구름 건넌 자리 씻기는 하늘,

사슴도 안 오고 바람도 안 불고,

넘엇골 골짜기서 울어오는 뻐꾸기 ..... .

 

산아 푸른 산아,

네 가슴 향기로운 풀밭에 엎드리면,

나는 가슴이 울어라.

흐르는 골짜기 스며드는 물소리에,

내사 줄줄줄 가슴이 울어라.

아득히 가 버린 것 잊어버린 하늘과,

아른아른 오지 않는 보고 싶은 하늘에,

어쩌면 만나도질 볼이 고운 사람이,

난 혼자 그리워라. 가슴으로 그리워라.

 

티끌 부는 세상에도 버레 같은 세상에도 눈 맑은,

가슴 맑은,

보고지운 나의 사람,

달밤이나 새벽녘,

홀로서서 눈물 어린 볼이 고운 나의 사람. 달 가고 밤 가고,

눈물도 가고 티어올 밝은 하늘 빛난 아침 이르면,

향기로운 이슬밭 푸른 언덕을,

총총총 달려도 와줄 볼이 고운 나의 사람.

 

푸른 산 한나절 구름은 가고 골 너머,

골 너머,

뼈꾸기는 우는데,

눈에 어려 흘러가는 물결같은 사람 속,

아우성 쳐 흘러가는 물결같은 사람 속에,

난 그리노라, 너만 그리노라.

혼자서 철도 없이 난 너만 그리노라.

 

 

〈청산도〉라는 제목을 가진 이 시는 산문시 형식의 4연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행구분의 역할을 하는 잦은 쉽표와 마침표의 효과적인 사용, 극도로 절제된 종결어의 사용은 이 시에 짧은 휴지와 긴 호흡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의성 ? 의태어를 비롯한 감각적인 시어와 함께 현재시제의 사용도 생생한 구체성과 현장감을 증폭시켜 준다. 이러한 시형식의 특정은 이 시의 근간이 되고 있는 반복에 힘입어 빠르고 힘찬 그러면서도 유려한 리듬을 만들어 낸다.

 

특히 이 반복 형식은 소리의 층위에 있어서만이 아니라 의미론적 층위에서도 매우 중요한 작용을 한다. 1연에서 세 번, 2연에서 두 번에 걸쳐 반복되고 있는 호격  ‘산아' 이것은 산을 부르는 소리이다. 이 부름은 대상을 가깝게 꿀어들이는 기능을 한다. 그 부름이 점층적으로 감각화된 수식어를 동반하면서 반복되고 있다는 점은 시인의 감정을 더욱 고조시킬 뿐만 아니라 독자의 주의를 강하게 환기시켜 주고 있다. 또한 이 도입부의 부름은 2연에 두번, 4연에 세 번 반복하고 있는 종결어 ‘그리워라’ ‘그리노라’와 호응한다.

즉 이 시를 가장 간단한 문장으로 정리하자면 ‘산아 그리워라 ? 그리노라’ 로 요약될 수 있다는 말이다. 이 종결어 또한 부름과 같이 점층적인 반복으로 이루어져 있어 이 시는 수미상응 구조를 이루고 있다.

 

 

2. 상정음과 반복에 의한 리듬의 효과

 

일차적 의미 해독을 위해 1 연부터 천천히 원어보자. 이 시는,마치 카메라의 앵글을 멀리 그리고 높은 산마루에서부터 산기슭 혹은 산 속 가까이로 옮기고 있는 것처럼,산을 조망해 내는 것으로 시작한다.

‘철철철’과 ‘둥 둥’ 이라는 의성 ? 의태어로 압축되는 우뚝 솟고, 짙푸르고, 무성하고 기름진 산은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 부동(不動)의 공간이다. 그러나 그 풍경은 시인과 친화적인 대응으로 시작되고 있으며 산 속의 여러 청각적 요소들을 중심으로 밝고 생명에 찬 세계인 청산으로 시화하고 있는 것이다.

 

2연에 이르면 시인은 보다 밀접하게 산에 동화되어, 산이 ‘나’요 내가 ‘산’ 인 상태에 이른다. 산기슭의 풀섶에 가슴을 대면 산의 골짜기를 흐르는 물소리와 나의 가슴이 우는 소리는 ‘줄줄줄’ 이라는 의태어에 의해 동일화된다. 청산이 품은 동경의 대상이 ‘아득히 가버린 것 잊어버린 하늘’ 이라면 내가 꿈꾸는 동경의 대상은 ‘볼이 고운 사람’ 이다. 그러나 산 밑에 있는 나의 세상에는 있어야 할 볼이 고운 사람이 없기 때문에 냐는 ‘가슴으로 그리운’ 것이다. 이때 의연한 산의 물소리는 나의 가슴 속에 맺힌 정서의 응어리를 풀어준다.

여기서 ‘청산’과 ‘볼이 고운 사람’ 은 대비적인 공간 속에서 같은 의미항을 이룬다. 각각 자연(초월)과 세속(일상)에서, 즉 공간을 달리하는 곳에서 시인이 열망하는 대상들이기 때문이다. 그 열망을 시인은 ‘아른아른’ 이라는 의태어로 구체화한다. 나는 볼이 고운 사람이 그리워 청산에 올랐고 다시 그 청산은 의연한 가슴에다 나의 그리움을 이입시키고 있는 셈이다.

 

3연에서, 시인이 몸담고 있는 일상적 공간은 ‘티끌 부는 세상. ‘버레 같은 세상’ 이라는 구절에 의해 더욱 구체화된다. ‘달’ ‘밤’ ‘눈물’은 시인의 고통스런 일상의 내면 표상이다. 그러나 시인은 이처럼 시끄러운 세파를 ‘밝은 하늘 빛난 아침’과 ‘푸른 언덕’을 지나 달려올 ‘볼이 고운 사람’에 대한 희망으로 극복하고자 한다. 그 희망의 대상은 역시 의태어 ‘총총총’으로 감각화하고 있다.

여기서 ‘볼이 곱다’라는 구절은 둥글고 붉은 이미지를 연상시키는데 이는 ‘해’ 의 이미지와 일치한다. 이 이미지는 또한 ‘달’과 ‘밤’과 ‘눈물’ 이 가 버린,그와 정반대의 ‘청산의 아침’이라는 개방적 공간으로 의미화된다.

 

끝연에서 3연의 절정을 마무리하면서 ‘아우성 쳐 흘러가는 물결같은 사람’ 들과 일상의 흐름 속에서, 짙푸른 청산과 볼이 고운 아침해에 대한 그리움이라는 시인의 진정한 희원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있다. 특히 ‘철도 없이 난 너만 그리노라’에서 ‘철’은 1 연의 ‘철철철'과 대응된다.

청산은 세 음절 '철철철’처럼 넘치고 있는 반면 나는 단음절 ‘철’ 도 없는 것이다. 또한 청산에 대해서는 액체화되어 넘치는 양태를 환기하는 반면 나에게는 시기(계절)나 분별(지각)의 의미를 환기한다.

 

시에 있어서 하나의 시어가 지시하는 의미와 소리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 일은 사실 새삼스럽다. 그 중에서도 특히 의성 ? 의태어는 그 기본적인 표현장치의 하나로서 시인은 자신의 감정이나 의사를 상징어로 사용함으로써 음악처럼 직접 전달하게 된다. 이를테면 민요의 후렴이나 시조 작품 중에서는 의성 ? 의태어를 사용하여 자기의 감정이나 의사를 대단히 효과적으로 표상하고 있는 것이 많다.

이 〈청산도〉는 5개의 의성 ? 의태어를 포괄하고 있다. 대체로 2.3.4음절의 다양함과 움직임이 큰 모음으로 구성되어 산의 생명력과 풍요함을 표상한다.

 

먼저 1연의 ‘철철철’ 이라는 의태어는‘ 몇 개의 어휘를 똑같은 울림 가운데 서로 이어주는 기능을 하고 있다. 그것은 표면적으로는 청산의 푸르름을 형용하나 나무의 무성함, 금빛 햇살의 인위적인 때가 하나도 없는 흐름의 상태까지 나타내는 이중삼중의 다성성( 多聲性)을 지님으로써 복합적인 기능을 하고 있다. 또한 그것은 ‘금빛 기름진’ 햇살의 [k] 음의 유포니와 함께 햇빛과 산 그리고 나무를 동일한 시적 구조의 단위 안에서 동시에 의미를 포괄하고 있다. 나아가서 빛은 생명력에 가득찬 것으로 감각화되어 기름진 빛으로 육화(肉化)되어 나타나기까지 한다. 이 빛에 대한 생생함과 도취감, 풍부한 열정은 사물을 근원의 위대함으로 되돌려 보내주는 존재의 힘과 함께 우리의 상상력과 이념을 단순성의 영역으로 이끌고 간다.

 

‘둥 둥 산을 넘어, 흰 구름 건넌 자리 씻기는 하늘’ 의 ‘둥 둥’은 구름의 움직임이자 산과 시인을 연계시키는 느낌을 들게 하면서 정중동(靜中動)의 술렁임을 나타내고 있다. 생명의식에 대한 그의 지향성은 ‘씻다’ 라는 서술어에 의해 강화되고 있다. 근원적으로 정화와 세례의 속성을 지닌 구름(물)의 씻김에 의해 하늘과 태양과 인간과 세상 모두는 씻김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 것은 단순히 깨끗하게 한다는 차원을 넘어서는 상징의 세계로의 이행을 뜻하는 것으로 생명력의 정화, 나아가서 재생과 동일한 것이 되기도 한다.

 

2연의 ‘줄줄줄’ 이라는 의태어도 표면상으로는 가슴이 우는 상태의 묘사지만 골짜기에 스며드는 물소리와 눈물을 같이 포용하는 이중성과 연관되어 이 연의 중심이 되는 가슴과 물소리를 이어주고 있다.

즉 ‘줄줄줄’ 은 눈물과 물소리에서 비롯된 의태어이면서 산의 가슴과 시인의 가슴을 통일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또 반복되는 ‘줄줄줄’에 의한 동일 행위의 계속은 마음에 맺혀있는 것을 후련하게 씻어 주는 효과를 지난다 .

 

'아른아른’은 원래, 무엇이 조금 보이다 말다 하거나 그림자가 희미하게 움직이거나, 물이나 거울에 그림자가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양상을 나타내는 어휘이다. ㅏ/ㅡ 의 음상이 밝음과 어두움의 양면성의 교체에 의해 꿈과 실상, 그리움의 대상인 볼이 고운 나의 사람, 산과 시정(市井)의 물결, 시인의 울음과 나의 사람과의 만남을 상징화한다. ‘아른아른’ 은 꿈과 그리웅의 아득함과 연결되는 불안정한 흔들림인 것이다.

 

3연의 ‘총총총’이라는 표현도 현실적인 소리가 아닌 경쾌하고 명랑한 음향으로 바뀌고 있다. 눈물과 밤의 어둠이 걷힌 시간으로, 향기로운 이슬밭 푸른 언덕의 공간으로 바뀌고 있다. ‘총’ [chong]은 음의 또렷또렷하고 맑음이 급히 달려올 듯한 걸음의 발랄하고 신선한 몸짓을 적절히 표현하고 있다.

 

이 시 전체는 물 흐르듯 유연한 [r] 음의 수많은 반복과 다음 다음으로 이어지는 완만한 리듬이 산의 공간이 갖는 청정한 움직임을 풍요롭게 구축하고 있다. 이런 리듬의 웅직임이 전체 시에 깔린 무성한 생명력의 이미지와
어울려 유동성이 넘치는 세계의 통일된 이미지를 주는 것이다.

특히 ‘철철철’, ‘줄줄줄’ 이라는 상징어에 의해 이 시 전체는 모든 시적 대상이 액체화하고 있다 .

산-흐른다, 햇살-기름지다, 구름-움직이다, 나-울다로 변용함으로써 자연과 그 속의 인간이 물의 정화하는 속성에 의해 세상의 ‘티끌’과 ‘버레’ 같은 보잘 것 없음이 씻겨져 맑음으로 연결된다. 그리하여 이 시의 주된 어조를 형성함에 있어서 가장 중심이 되는 감정인 그리움은 아우성 쳐흘러가는 물결 같은 사람 속에서도 밝고 빛나게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청산도〉는 시어의 특이한 구사와 더불어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 반복에 의한 리듬의 되울리는 효과, 모음과 자음의 유포니, 의성어와 의태어가 문장속에서 조응하는 이중적 기능 등은 한국어가 지니는 소리의 표현력 내지 운율학 연구의 풍부한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자연의 소리나 사물의 태도를 묘사하고 있는 의성어와 의태어들은 대상에 대한 시인의 애정을 나타내는 음성 묘사와 함께 대개가 첩어의 형태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음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요소와 함께 음률을 형성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이러한 특징은 박두진 특유의 자유분방하게 쏟아져 내리는 감정을 폭넓게 표현하려는 의도에 의하여, 호홉이 긴 시형의 개방성과 행이 주는 의미보다는 울림이 주는 리듬감을 바탕으로 “음악적인 음영을 의식적으로 노리는 행들로 시를 구성하고 있는 사실”과 깊이 관련된다.

 

 

3. 빛에의 희구와 능동적 상상력

 

시인의 욕망 속에는 언제나 청산의 아침이 잠재해 있다. 그러니까 시인에게 청산은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티끌 부는 세상’ ‘버레 같은 세상’ ‘아우성쳐 흘러가는 물결같은 사람’ 들에 대응하는 공간의 의미를 띠고 있다. 그곳은 달과 밤과 눈물의 골짜기에서 금빛 기름진 햇살이 솟아나게 하는 생명의 힘이 생성되는 공간이며, 흰 구름과 푸른 하늘, 사슴과 뻐꾸기, 그리고 인간이 한자리에 교감하고 조응하며 살아가는 새로운 이상의 공간이자 주술의 공간인 셈이다. 나아가 그곳은 개인적 ? 시대적 ? 민족적 어둠을 생명이라는 절대성과 함께 묶는 초월의 상징이 되기도 한다. 밝은 빛의 요소와 함께 새로움, 아름다움, 순수, 시작 등을 의미하는 자연의 질서는 불멸의 확실성에 가득찬 신념의 세계로서 동경이나 열정에 의한 시의 개방성이 힘찬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특히 청산 뒤에 불은 ‘도(道)’의 의미가 길이라는 구체적인 의미를 넘어 산과 나, 자연과 인간의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관점에 이르는 형이상학적 의미를 담고 있다는 데서도 이러한 특성은 더욱 뚜렷해진다.

 

박두진의 〈청산도〉가 갖는 시사적 의의는 1930년대의 시문학파나 모더니즘이 지니는 한계의 극복으로 자연을 제시함으로써 개성있는 정서와 순수한 시 정신에 의해 한국 현대시에 깊이 있는 토대를 마련해 준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자연의 인식에서 보여주는 생명적 이미지,시에 활력을 불어 넣는 능동적 상상력, 한국어가 갖는 소리의 다양성과 리듬에 대한 효과, 그리고 시를 시대나 종교 윤리와 동일한 것으로 꿰뚫는 시 정신의 다면적인 추구에 있다 하겠다.

 

 

 

제7권 3호, 1997년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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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 박두진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너머 산 너머서 어둠을 살라 먹고,

산 너머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 먹고,

이글이글 애띤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달밤이 싫어, 달밤이 싫어,

눈물 같은 골짜기에 달밤이 싫어,

아무도 없는 뜰에 달밤이 나는 싫어

 

해야, 고운 해야,

늬가 오면, 늬가사 오면,

나는 나는 청산이 좋아라.

훨훨훨 깃을 치는 청산이 좋아라.

청산이 있으면 홀로래도 좋아라.

 

사슴을 따라, 사슴을 따라,

양지로 양지로 사슴을 따라,

사슴과 만나면 사슴과 놀고,

칡범을 따라, 칡범을 따라,

칡범과 만나면 칡범과 놀고

 

해야, 고운 해야, 해야 솟아라.

꿈이 아니래도 너를 만나면,

꽃도 새도 짐승도 한 자리에 앉아,

워어이 워어이 모두 불러 한 자리에 앉아,

애띠고 고운 날을 누려 보리라

 

 

-「상아탑」6호(1946. 5월호)

 

 

 

 

 

어서 너는 오너라 / 박두진 

 

복사꽃이 피었다고 일러라. 살구꽃도 피었다고 일러라.

너이 오오래 정들이고 살다 간 집, 함부로 함부로 짓밟힌 울타리에, 앵도꽃도 오얏꽃도 피었다고 일러라.

낮이면 벌떼와 나비가 날고, 밤이면 소쩍새가 울더라고 일러라.

 

다섯 뭍과 여섯 바다와, 철이야. 아득한 구름 밖, 아득한 하늘 가에, 나는 어디로 향을 해야 너와 마주 서는 게냐.

 

달 밝으면 으레 뜰에 앉아 부는 내 피리의 서른 가락도 너는 못 듣고, 골을 헤치며 산에 올라 아침마다, 푸른 봉우리에 올라서면, 어어이 어어이 소리 높여 부르는 나의 음성도 너는 못 듣는다.

 

어서 너는 오너라. 별들 서로 구슬피 헤어지고, 별들 서로 정답게 모이는 날, 흩어졌던 너이 형 아우 총총히 돌아오고, 흩어졌던 네 순이도 누이도 돌아오고, 너와 나와 자라난, 막쇠도 돌이도 복술이도 왔다.

 

눈물과 피와 푸른 빛 깃발을 날리며 오너라. …… 비둘기와 꽃다발과 푸른 빛 깃발을 날리며 너는 오너라.……

 

복사꽃 피고, 살구꽃 피는 곳, 너와 나와 뛰놀며 자라난, 푸른 보리밭에 남풍은 불고, 젖빛 구름, 보오얀 구름 속에 종달새는 운다.

 

기름진 냉이꽃 향기로운 언덕, 여기 푸른 잔디밭에 누워서, 철이야, 너는 늴늴늴 가락 맞춰 풀피리나 불고, 나는, 나는, 두둥싯 두둥실 붕새춤 추며, 막쇠와, 돌이와, 북술이랑 함께, 우리, 우리, 옛날을, 옛날을, 딩굴어 보자.

 

<청록집, 을유문화사, 1946>

 

 

 

 

자화상 / 박두진

 

돌과 돌들이 굴러가다가 나를 두들기고,

모래와 모래가 쓸려가다가 나를 두들기고,

물결과 물결이 굽이쳐가다가 나를 두들기고,

너무도 기나긴 억겁의 세월,

햇살과 햇살이 나를 두들기고,

달빛이 나를 두들기고,

깜깜한 밤들이 나를 두들기고,

별빛과 별빛이 나를 두들기고,

아, 훌훌한 낙화가

꽃잎이 나를 두들기고,

바람이 나를 두들기고,

가랑비 소낙비 진눈깨비가 나를 두들기고,

싸락눈 함박눈 눈보라가 나를 두들기고,

우박이 나를 두들기고,

그 분노가 나를 두들기고,

회의와 불안,

고독이 나를 두들기고,

절망이 나를 두들기고,

아니, 사랑이 나를 두들기고,

끝없는 뉘우침

끝없는 기다림

갈망이 나를 두들기고

양심과 정의, 지성이 나를 두들기고,

진리와 평화

자유가 나를 두들기고,

겨레가 나를 두들기고,

끝없는 아름다움

예술이 나를 두들기고,

나사렛 예수

주 그리스도와 하느님,

말씀이 나를 두들기고.

 

속(續)ㆍ수석열전(水石列傳) / (1976)

 

 

 

하늘 / 박두진 (시인, 1916-1998)

 

하늘이 내게로 온다.

여릿여릿

머얼리서 온다.

 

하늘은, 머얼리서 오는 하늘은

호수처럼 푸르다.

 

호수처럼 푸른 하늘에

내가 안긴다. 온 몸이 안긴다.

가슴으로, 가슴으로

스미어드는 하늘

향기로운 하늘의 호흡

 

따가운 볕,

초가을 햇볕으로

목을 씻고,

 

나는 하늘을 마신다.

자꾸 목말라 마신다.

 

마시는 하늘에

내가 익는다

능금처럼 마음이 익는다.

 

 

 

도봉 / 박두진

 

산새도 날아와 우짖지 않고

구름도 떠 가곤 오지 않는다.

 

인적 끊인 곳

홀로 앉은 가을 산의 어스름.

 

호오이 호오이 소리 높여

나는 누구도 없이 불러 보나.

울림은 헛되이 빈 골 골을 되돌아올 뿐.

 

산 그늘 길게 늘이며

붉게 해는 넘어가고

황혼과 함께 이어 별과 밤은 오리니.

 

삶은 오직 갈수록 쓸쓸하고

사랑은 한갓 괴로울 뿐.

 

그대 위하여 나는 이제도, 이

긴 밤과 슬픔을 갖거니와

 

이 밤을 그대는, 나도 모르는

어느 마을에서 쉬느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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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7.10.10 21:40

    첫댓글 좋은 글 올려주셨는데
    이제야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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