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트린은 전쟁의 위력을 아예 처음부터 믿지 않았다. 모든 폭력은 그녀의 본성과 어긋나는 것이다. 그녀는 무력으로 정치적 문제들을 해결 할 수 없다고 굳게 믿었다. ‘전쟁에서 승리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 그녀의 신조였다. 이는 곧 휴머니스트의 금과옥조였다. 전쟁을 피하려고 했던 그녀는 중무장한 적들 앞에서 거의 늘 패배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녀만의 전투방식으로 그들에게서 최후의 승리를 빼앗곤 했다. 그것은 바로 협상, 외교, 화해라는 전술이었다. 그녀는 이 패들을 써서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한 승리가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을 지라도…” 칠순의 나이로 늙은 황태후 카트린은 지병으로 쓰러지는 악순환을 계속하면서 앙리 3세가 평생 경쟁자이면서 열등감을 느끼게 했던 ‘파리의 왕’ 기즈 공작을 암살하자 처참한 심경이 되었다. 그리고는 유언장을 작성한 후1589년 1월 5일 숨을 거뒀다. 그녀는 남편인 앙리 2세의 곁에 묻히고 싶어했지만, 교회 밑바닥에 방치되어 묻혔다가 20년이 지난 후에야 생드니 대성당으로 시신을 운구하여 앙리 2세의 곁에 묻힐 수 있었다. 그녀가 유지하고 싶었던 피투성이의 프랑스는 가톨릭과 루터파의 싸움으로 한시도 편안할 날이 없었다. 그녀에 대한 평가 역시 입장에 따라 크게 다르다. 하지만 이런 평가는 양쪽을 다 만족시킬 것이다. “그 분의 삶은 인내와 끈기의 연속이었습니다.”
종교전쟁은 예나 지금이나 정말 할 말이 없을 정도로 가혹하다. 그 시절을 피렌체에서 건너온 메디치 가의 한 여인이 지켜낸 30년은 프랑스라는 나라를 버티게 한 버팀목이었다. 그 누가 나선들 더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었을까? 시대의 걸작이자 공과가 분명했던 이 여걸에 대해 묘비명과 같은 시 한편을 인용한다.
‘여기 누워 있는 왕비는 악마이자 천사라네 한편으론 비난 받고 또 한편으로는 칭송 받는 왕비는 국가를 떠받치고 국가를 쓰러뜨렸네 왕비는 수많은 협약을 맺고 수많은 토론을 벌였네 왕비는 세 명의 왕을 낳고, 다섯 번의 내전을 일으켰네 왕비는 성을 쌓고 도시를 폐허로 만들었네 훌륭한 법을 제정하고 나쁜 칙령을 발표했다네 자, 그녀가 지옥과 천당에 가길 바라자.’
카트린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젊고 현명한 신부의 초상화이다. 얼핏 보기에는 박색이다. 온 몸을 장식한 보석들이 없다면 그녀는 과연 한 시절 프랑스의 절대 권력자였다는 설명이 가능할지 의심스럽다. 그렇다면 이 그림은 맹아이다. 조금 더 집중해서 바라본다. 주위가 조용해서인지 묘한 일이 벌어진다. 그녀의 장식품들이 사라지고 눈과 코 입이 조화롭게 다가온다. 그녀가 말한다.
“신이여, 저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