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20살때인 1944년에 결혼하시고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사시는 할머니 친정, 즉 아버지 외갓집에
들어가 사셨다 한다.
엄마 결혼하실때 할아버지는 52세 셨다.
할아버지는 충청남도 서산에서 부잣집 외아들 이셨는데 평생 일을 해서 돈을 버신적이 없이
집안의 재산을 쓰고 다니셨다 한다. 그때 할아버지는 독립운동 하는 사람들을 따라다니시며
돈을 대 주셨는데...그곳에서 독립운동을 하시던 할머니를 만나 결혼하시고
독립운동가들의 아지트였던 할머니집인 처갓집에서 사셨는데, 해방후에도 계속 그곳에서 사셨다 한다.
이때 집안에는 우리 할아버지와 할머니(할아버지 왼쪽), 시외할머니, 큰 시이모님(뒷줄 맨 왼쪽),
둘째 시이모님(뒷줄 맨 오른쪽)과 큰 시이모님의 딸과 아들,
둘째 시이모님 딸둘, 서울로 공부하러와 사돈집에 머물던 아버지 고종사촌 승규 아저씨,
훗날 고바우 영감을 그리신 경복고등학교 학생 김성환씨
(이분 아버지도 할아버지와 같이 독립운동을 하셨었다고...)
우리 아버지, 엄마등... 15명 이상의 사람들이 이 집에서 살았다 한다.
아버지, 엄마, 대학생이던 용이 아저씨와 우리 엄마 아버지는 다 같이 20살 동갑,
고대의대의 전신인 여의전에 다니던 진이 아줌마가 두살위(?),
이대 의대에 다니던 정현 아줌마, 이대 영문과에 다니던 대현아줌마,
모두 비슷한 또래의 처녀, 총각들이었는데...
아버지가 경제력이 없어서 엄마는 이 대식구와 살았었는데, 그렇게 시집살이를 시작하신것 같다.
그때는 한동네인 청진동에 외갓집이 있어서
친정할머니가 고생하는 엄마를 가엾어 하시고
우리 4식구 옷을 철철히 장만해 보내시고...
어린애들(나와 동생) 먹이라고... 장조림, 굴비등을 자주 보내시곤 했다고 한다.
그리고 육이오 사변이 터지고, 우리 아버지는 인민군한테 의용군으로 강제 징집되어
전쟁터로 끌려 나가셨다고 하는데, 그 이후 아버지는 행방불명이 되셨다.
이렇게 엄마는 25살에 과부가 되셨다.
625 사변이 일어났을 때, 엄마는 임신중셨는데, 5살인 나는 걸리고 2살 동생은 업고 피난민들 틈에
끼어 걸어서 걸어서...
어느날은 피난민 일행이 밤중이 되니 빈집 사랑채에 들어가 쉬었는데
엄마도 우리들 데리고 한 구석에서 쉬고 계셨는데
엄마가 업고있던 동생을 내려 보니 온몸이 빨긋 빨긋 홍역인것 같았다 한다.
엄마는 혹시 주위의 다른사람들이 알면 옮는다고.. 피난민들 일행에서 쫒겨날까봐
남들이 보지 못하게 동생을 포대기로 꼭 싸안고 계셨었다고..
이렇게 엄마는 간신히 먼저 피난을 떠나신 할머니, 할아버지가 계신, 충청남도,
아버지 고향에 도착하셨다 한다.
(피난길이 너무 힘들었는지.. 아기는 저절로 유산이 됐다고..)
피난에서 돌아온 우리는 할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하셨던 혜택인지
경기도 양주군 중하리에 적산가옥, 과수원을 불하받으셔서
할아버지, 할머니와 우리 3식구가 같이 살기 시작했다.
위의 사진에 내 머리를 보니 아마도 크리스마스때 무용할때 엄마가 고대를 해 주신것 같다
할머니가 건강하셨을때는 농사를 지으며 그런대로 살만 했던것 같다.
배가 익으면 엄마가 이고 나가 팔기도 하고, 파배(벌레먹은 배, 썩은배)를
바께쓰로 갔다놓고 칼로 나쁜데는 저며내고 실컷 먹기도하고...
나는 그때 그 시골동네에서 멋쟁이 스타였다.
여학교 가사선생님을 하셨던, 솜씨좋으신 할머니가 구호물자로 저렇게 코트등 옷을 예쁘게 고쳐주시고
크리스마스 때는 무용을 잘해서 온 교회에서 칭찬을 받고...
사진 뒷쪽에 배나무들에 배들 하나하나에 봉지가 씌워있다.
매해 배봉지를 만드는것도 참 힘든일이 었다.
1) 신문지를 얻어다가 짜르고,
2) 풀을 쑤어, 신문지 짜른것을 붙여 봉투를 만들고,
3) 봉투 하나하나에 황을 작은 스푼으로 하나씩 넣고
4) 배 하나하나에 그 봉지를 씌워 철사로 묶어주었다
할아버지는 엄마가 멋을 내면 바람이라도 날까봐... 시집을 가버릴까봐...
아마도 농사일, 집안일등 할 사람이 필요해서 그러셨든것 같다,
엄마한테 파마도 못하게 하셔서
엄마는 저렇게 생머리에 핀을 꼽고 사셨다.
그때 정현이 아줌마 남편이시던 김용준 목사님이
엄마가 시집살이에.. 힘든 농사일에.. 고생을 하는게 안타까우셨는지
아저씨 시무하시던 교회 부속 유치원에 엄마를 유치원 선생으로 취직을 시키셨다.
그래서 엄마는 나와, 동생을 데리고 중하리집을 뛰쳐 나오셨다.
우리가 따로 나와 사니까 할아버지는 불만이 많으셨다. 농사짓고, 살림살이 할 사람이 없고,
무엇보다도 할아버지 옷을 수발 할 사람이 없어서...
양평동 살때 우리가 중하리에 할아버지 뵈오러 가면
"북통같은 셋방에서 사는게 좋으냐?" 며 화난 소리를 하셨었다.
엄마는 평생을 할아버지 한복을 지어 드렸다.
겨울이면 솜바지, 솜저고리, 솜두루마기, 여름이면 모시, 베 바지저고리.., 가을 봄이면 광목/옥양목 홑 바지저고리...
그런데 할머니가 암에 걸리셔서, 살림살이, 농사일 이외에도 병간호를 할 사람도 없어서
큰아버지가 엄마한테 사정 사정 부탁을 하셨는지..
할머니가 위독 하시다는 소리에 마음이 약한 엄마는 거절을 못하시고,
유치원 선생을 그만두고 다시 중하리로 돌아 오셨다
중하리에 돌아온 엄마는 또 다시 황소같이 전보다 일을 더 많이 하셨다.
할머니 병간호, 할아버지 한복 옷수발, 살림살이.. 농사..
이때는 할아버지께서 3천평짜리 과수원을 큰아버지한테 넘겨 주셔서
이른 봄부터 농사지어 배가 어느정도 크면 큰아버지께서
도급으로 장사꾼한테 파시니까
우리는 전같이 파배(벌레먹은 배, 썩은 배) 조차도 먹을 수가 없었다.
할머니는 2년후 내가 중학교 3학년때 암으로 결국 돌아가셔서
이때부터 엄마는 홀 시아버지인 할아버지를 1977년 세상 떠나실 때 까지
22년을 더 모셨다.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신 우리 할아버지는
마당 한 번 쓰신적도 없고, 밭에서 풀 한포기 뽑으실 줄도 모르시고
아침식사 하시고는 서울로 외출을 하셨다가
저녁에 집에 돌아오셔 저녁식사를 하시곤 했다.
남편도 없는 엄마가 시아버지 모시고
큰아버지 과수원 농사지어 드리는 대가였는지
큰아버지는 나와 내 동생 중, 고등학교와 대학교 등록금을 내 주셨다.
엄마는 먹고 살기가 너무 힘드니까
여기, 저기, 돈 얻으러 다니고.. 하느라고 우리들 공부에 신경쓸 겨를이 없으셨던것 같다.
나는 중하리에서 효자동까지 매일 새벽에 일어나서 편도에 2시간 이상 걸리는 진명에
다니느라 잠도 제대로 못자고 물도 제대로 못마시고 김치/짠지에 밥.. 영양가도 제대로 섭취못해 그런지
키가 자라지 못했다. 물로 뇌도 제대로 발전한것 같지 않다.
중하리가 중화동으로 서울에 편입되고 이동네 땅값이 많이 올라서
이 시골에 땅가진 동네 사람들은 모두 큰 부자가 됐다.
3000평 우리 배 과수원도 1968년에 5천만원인가에 팔렸다.
처음엔 큰아버지께서 엄마한테 집을 한채 사줄테니 보러 다니라 해서..
엄마랑 나랑은 희망에 들떠 집을 보려 다녔는데
1968년 그때는 장위동에 우리 맘에 맞는 집들이 150만원-200만원정도 했던것 같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큰아버지가 자기 이름으로 방3개에 가게 달린 집을
신림동에 사 놓으시고 우리보고 이사가 살으라고...
그때 중화동에는 유치원이 없었는데
교회 유치반 에서 엄마가 4살-6살 아이들을 일요일 마다
노래, 무용, 성경을 가르켜, 크리스마스나 행사때 꼬마들이 교회에서 노래, 성경암송, 무용, 연극을 잘 해서
그 근처동네까지 소문이 나서 작은 애들이 있는 집은 일요일에 꼬마들을 교회에 데리고 와서
유치반이 전체 교인과 비슷한 수.. 120명 이상이었었다.
우리가 계속 중화동에 살았다면, 땅부자가 된 그 곳 사람들한테
유치원이 필요할 때라, 엄마가 유치원 선생님을 할 수가 있었을 텐데...
신림동으로 이사를 가는 바람에, 교회 유치반에서 엄마 보조를 하던
아가씨가 유치원을 세웠는데, 학생들이 많았다 한다.
큰아버지는 할아버지랑 먹고 살라고
가게가 딸린 자기 집에서 세도 안받고 공짜로 살게 해 주신것 같은데
엄마는 장사.. 그런건 전혀 할 줄을 몰라서
그 가게에 미장원을 내기는 했는데
엄마가 미용기술이 없어 미용사를 쓰니까
미용사 월급도 안나오고.. 결국 미용실 열기 위하여 한 시설비등... 손해만 봤다.
그 때 할아버지만 방3개에 가게 딸린 그 큰아버지집에
가시게 하고, 우리는 중화동에 셋방이라도 얻어 독립했으면
엄마가 유치원 선생을 할 기회가 있었는데...
엄마는 또 마음이 약해서 할아버지만 덩그러니 보낼 수가
없어서 할아버지 모시고 같이 큰아버지집으로 이사를 하신것 같다.
하여간 그때 내가 구로공단에 아이멕이라는 외국인 회사에
엔지니어로 취직을 해서 할아버지랑 온 식구가 먹고 살았고
70년부터 74년까지 4년은 남편과 내가 맞벌이를 하면서
아이들을 엄마한테 맡기느라.. 그 근처에 살았으니
엄마, 할아버지, 취직못한 동생까지..
먹고 살 걱정은 없었다.
그런데 우리가 미국에 온 1974년부터 할아버지 돌아가실 때인 1977년까지는
엄마는 생활비에 쪼들리고
80세가 넘으신 할아버지는 건강이 나빠지셔
엄마는 똥 오줌을 치워드리면서 힘들게 할아버지 시중을 하셨다 한다.
그때 할아버지 독립유공자 신청이 돼 있다 해서
엄마는 할아버지가 유공자가 되셔, 정부에서 할아버지 앞으로 돈이 나오면
할아버지 시중하며 사는데... 큰 도움이 될꺼라며 눈이 빠지게 기다렸는데
할아버지는 돌아가신 직후 독립유공자가 되셔서
아들이 아닌 며느리인 우리엄마 에게는 아무런 혜택도 없었다 한다.
엄마는 20살에 시집을 와서 남편인 우리 아버지와는 달랑 5년을 같이 사셨고
시아버지인 할아버지와는 32년간을 같이 사셨다.
할아버지는 함석헌씨 같이 긴머리에 하얀수염과 두루마기를 입고 다니셔서
어떤 동네사람들은 "예수님 할아버지"라고 했다.
할아버지는 살아계셨을때는 초라하셨었는데, 돌아가신 후에 호강을 많이 하고 계시다.
둘째줄에 차남 자부로 엄마 이름도 있다.
우리는 나중에 알았는데 충청도 할아버지 고향 시청앞에 할아버지 동상이 있다고 한다.
첫댓글 25살에 아이 둘 데리고 과부가 된 며느리&제수씨가 불쌍하지도 않은지
일만 죽어라 시켜먹고
남편도 없는데
32년을 시아버지 모시게 하고
정말 나쁜 사람들이에요
그렇게 고생시키고
배밭 판 5천만원으로
150만원짜리 집이라도 한채,할머니 명의로 사 주셨다면 그나마 덜 섭섭했을텐데
공짜로 다 부려먹고
그 돈은 큰아버지가 다 챙기고
어찌 그리 뻔뻔한 사람들이 있는지
있는 사람이 더 지독하네요
어머님의 25살에 남편없이 그 긴세월 시집살이에
눈물이 나려고 하네요.맘이 너무 아픕니다.
어떤 분들은 일부러 재가하라고 등떠밀어 돈도 줘서
멀리 내쫒는다는 말도 들어보았는데..너무 속상합니다.
그 어머님 밑에서 자라신 청이님 그래서 복을 많이 받으셨고,
또 그어머님을 모시고 사시니 하늘의 상이 클거예요.
남의집 귀한 딸을 데려다가 종처럼 부리셨군요.
차라리 어머님께서 안하시겠다고 멀리 이사가셔서 사셨으면
고생도 덜하셨을텐데요.왜 그렇게 착하셨는지 제가 속상합니다.
제 시어머님 고향이 서산으로 알고 있어요.
예전 김옥선씨던가 하시는 정치하시던 남장 여자분께서
제 시어머니를 존경해서 서울로 시집가서 사시던
제시어머님께 찾아온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제시어머님은 '표'씨성 이셨지요.
제 시어머님은 좀 당차셨어요.여장부라고 하기는 그렇고
경기여중 시험보러 가던날 시어머님 아버지께서 돌아가셔서
시험을 못치러 가셨다고 말씀하셨지요.
그 고생하시던 어머님께서 청이님과 같이 사시니
저도 참 감동을 받네요.청이님 내외분께서 꼭 건강하시고
늘 즐거운 나날이 되셨으면 좋겠어요.
즐거운 어머니날 되셨나요?
(지금은 월요일 아침입니다.)
이제 일어나 크리스틴 데이케어센타 등교준비를 해야 할텐데...
청이님 어머님 슬픈 긴 시집살이에 제가 슬프네요.
그당시 고우신 친정어머님 얼굴이 슬퍼 보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