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 한 편으로 훌쩍 자란 우리반 아이들
손유라(마산 교동초)
몇 달 전 우리 반 아이가 <아빠 얼굴>이란 제목으로 시를 한 편 썼다.
아빠 얼굴
양승철(마산 교동초 6년)
아빠 얼굴은 참 잘생겼다
눈도 있고 코도 있고 입도 있고 귀도 있다
다정상이다
근데 귀가 좀 이상한 거 같다
내 말을 잘 안 들어 준다
(2013. 9. 25.)
‘아버지’를 주제로 시를 쓰자고 한 날이었는데 아이들에게 승철이의 시를 읽어주니 반응 없기로 소문난 우리 반 아이들이 배를 잡고 책상을 두드리며 웃어대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작 승철이는 아이들이 왜 웃는지 모르겠다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이들에게 승철이의 시를 듣고 왜 웃었는지 그 이유를 물어보았다.
“반전이 있어서 재미있어요.”
“양승철이 아빠를 놀리는 것 같아서 재미있어요.”
승철이는 그 이유를 듣더니 더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다. 승철이에게 시작(詩作)의 동기를 물어보았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 아빠는 정말 잘 생겼어요. 되게 잘 생겼는데 가끔씩 제 이야기를 안 들어줄 때가 있어요. 그 때는 아빠 귀가 좀 이상해서 내 말이 잘 안 들리나 하고 생각해요.”
승철이는 아버지를 놀리려는 의도도 전혀 없었을 뿐더러 반전의 재미를 의도하여 시를 쓸 정도로 시 쓰기에 능숙한 아이도 아니다. 그런데 이렇게 재미있는 시를 쓸 수 있었던 것은 일말의 계산 없이 순전히 승철이의 진심을 담아냈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승철이가 특별히 시를 잘 쓰는 아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재미있고 풍자적인 시를 썼다는 것은 아이들이라면 누구나 승철이처럼 시를 쓸 수 있다는 얘기다. 이를 동시의 시작(詩作)법과 비교해보면 큰 차이가 있다.
어린이시와 동시 모두 시인의 자기 감동에서부터 시 쓰기가 시작되지만 그 이후부터는 극명히 다른 노선을 취하게 된다. 동시는 단어 선택에서부터 시의 구성까지 철저한 계획에 의존하지만 어린이시는 대부분이 시인의 직관에 의존한다. 동시는 필요에 따라 현실을 가공해야 더 현실감 있는 시, 좋은 시가 되지만 어린이시는 어린이가 몸소 체험하고 느낀 것 그대로를 시로 옮길 때 좋은 시가 탄생한다. 동시와 어린이시는 이렇게 다르다.
우리 반 아이들 대부분은 동시보다 어린이시를 선호한다. 시 쓰기 시간에 비슷한 주제나 소재를 가진 어린이시와 동시를 함께 소개하곤 하는데 거의 과반수의 아이들은 어린이시를 더 재미있어 한다. 그런데 최근에 우리 반 아이들이 좋아하게 된 동시집이 한 권 있다. 남호섭 선생님의 《벌에 쏘였다》(창비, 2012)이다. 총 5부로 되어있는 이 시집에서 아이들이 유독 좋아하는 부분은 바로 제5부, <새는 자유롭게>이다. 담임교사인 나의 취향이 아이들에게 전혀 영향력을 끼치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말이다. 국어나 사회 과목에서 시사적인 내용을 다루는 내용이 많아서인지 요즘 우리 반 아이들은 세상 돌아가는 사정에 꽤 높은 관심을 보인다. 종교분쟁으로 전쟁의 고통에 아파하고 있는 사람들, 더러운 물로 인해 질병과 죽음의 두려움에 살고 있는 사람들, 학교도 가지 못하고 하루 종일 강도 높은 노동에 시달려도 제대로 된 임금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의 삶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어느 날은 아이들이 이런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을 내게 물어보더니 자발적으로 모금을 하여 유니세프 단체에 기부를 하기도 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아이들과 어떤 시를 읽어보면 좋을까 고민을 하다가 우연히 남호섭 선생님의 시집 《벌에 쏘였다》를 읽게 되었다. 이제 막 ‘나’와 ‘우리’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인류’에 대한 관심을 키워가는 아이들이 흥미를 가질 만한 시들이었다. 그동안의 동시와는 다소 다른 형태도 많아서 “이게 시에요?” 하고 묻는 아이들도 많았다. 딴에는 좋은 동시를 고른다고 골라 아이들에게 읽어주긴 했지만 그동안 아이들의 반응은 시큰둥했었다. 어린이시와 동시, 비슷한 수준에 내용에도 별 차이가 없는 시라면 차라리 제 나이 또래의 아이들이 쓴 시에 더 호감이 갔으리라.
하지만 <작은 선녀-이소선>이라는 시를 읽어주니 아이들의 반응은 그 전과는 달랐다.
작은 선녀
-이소선
하늘에서 내려온 작은 선녀라고
아버지가 지어 주신 이름 ‘소선’
네 살 때 아버지는 일본 순사에게 끌려가 죽었다. 고향에서 살 수 없게 된 엄마 따라 새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열일곱에 근로 정신대로 방직 공장에 끌려갔다. 거기를 도망쳐 나와 산밭에서 숨어 지내다 해방을 맞았다. 한 번도 울지 않았다.
열아홉에 시집가서 네 남매, 태일이 태삼이 순옥이 순덕이를 낳았다. 대구로 부산으로 서울로 가난 때문에 여기저기 떠돌았다. 식구들이 함께 모여 살지도 못했다. 어느 날 죽어 가던 거지 소년을 살려 주고 어린 거지들의 ‘거지 엄마’로도 살았다.
큰아들이 죽었다. 엄마를 끔찍이 사랑하고 동생들 잘 보살피던 태일이. 가난하고 차별받는 사람들 살리려고 자기 온몸에 불을 놓았다. 태일이는 스물세 살, 영원한 청년이 되었다.
“내가 죽으면 캄캄한 세상에 좁쌀만 한 구멍이라도 뚫리겠지요. 그걸 보고 학생이랑 노동자랑 함께 싸워서 구멍을 조금씩 넓혀 나가요. 내 말 알았지요? 꼭 그렇게 할 거지요?”
온몸에 화상을 입고 죽어 가며 말하는 아들 앞에서 엄마는 대답했다. 큰 소리로 대답했다. 울 사이도 없었다.
“내 몸, 가루가 돼도, 네가 원하는 거, 끝까지 할 거다.”
소선은 이날부터 아들의 길을 따라나섰다. 차별받는 사람들과 손을 잡고 맨 앞에 서서 싸웠다. 그들이 한목소리로 어머니, 우리 어머니라고 불렀다. 세상에서 가장 아들을 많이 둔 어머니가 되었다.
아니, 이 땅에 살아 있는 ‘작은 선녀’가 되었다.
-《벌에 쏘였다》(남호섭, 창비, 2012)
아이들은 전태일이라는 이름을 떠올렸다. 5학년 때 배운 적이 있다느니, 전태일 평전이란 것이 있는데 읽으려다가 말았다느니, 전태일 엄마도 저렇게 유명한 줄 몰랐다느니 저마다 쑥덕쑥덕 하며 아는 지식을 총동원하여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이들을 진정시키고 이 시를 쓴 시인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소개를 했다. 오래간만에 아이들에게 흥미로운 동시를 소개해서 그런지 어깨가 으쓱했다. 매번 어린이시의 인기에 밀렸던 동시가 주목을 받으니 어쩐지 기분이 좋았다. 이어서 아이들에게 1970, 80년대에 열악한 노동 환경에 죽거나 다친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해 주며 1980년대에 번성하였던 탄광촌 마을 아이들의 이야기 《아버지 월급 콩만하네》에 실린 <아버지의 병>을 읽어주었다.
아버지의 병
6학년 서영태
우리 아버지는 광업소에서
너무 일을 많이 하셔서
몸이 아파 앓아 누울 때가 많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아버지의 병이 빨리 나아
일을 하게 해 달라고
마음 속으로 빈다.
아이들이 물었다.
“탄광에서 일하면 병 걸려요?”
“무조건 걸린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럴 가능성이 높지. 탄가루가 폐에 들어가면 진폐증 같은 폐병에 걸리게 되거든. 그러면 호흡하는 게 힘들어져서 일 하는 것도 쉽지 않아.”
“마스크 같은 거 끼고 일 안해요? TV 보니까 그렇게 하던데…….”
“그 당시에는 노동자들을 보호하는 법이 없었던 때라 그런 장치가 거의 없었어. 지금은 일하다가 다치면 회사에서 보상을 해주지만 옛날에는 그런 보상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일터에서 쫓겨난 사람들도 많았고.”
“헐……. 진짜 나쁜 사람들이네요. 요즘에도 저래요?”
“있지, 바보야. 지난 번에 우리 본 거 있다 아니가. 동화책.”
“그래, 유현아. 제목이 《거짓말 같은 이야기》였지?”
“아, 맞아요. 어린 애들이 광산에서 일하고 카펫 짜고 그랬잖아요.”
“전쟁터에서 총 들고 싸우는 애들도 있었어요.”
그림책을 읽어줄 당시에는 별 반응 없던 아이들이었던지라 그 그림책의 내용을 기억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런데 아이들이 그림책을 기억하고 있었다니, 그것도 이 장면에서 그 책을 떠올렸다니!
동시를 공부하면서도 언제나 마음 한켠에서는, 그래봤자 동시는 아이들이 쓴 시를 못 따라간다, 어린이시보다 재미가 없다는 생각을 줄곧 해 왔다. 그런데 《벌에 쏘였다》는 시집을 읽고 어린이시와 동시는 비교대상이 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되어서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이시와 동시는 본래 서로 다른 범주의 것이기 때문에 애초에 비교대상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어른과 아이가 세상을 이해하는 수준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다르고, 그래서 아이가 쓸 수 있는 시, 어른이 쓸 수 있는 시가 다르다. 그런데 어른들이 어린이를 흉내 내는 시를 쓰다 보니 동시가 자꾸만 어린이시와 비교당하는 것이다. 아이들이 잘 쓸 수밖에 없는 것을 어른이 따라 쓰다 보니 동시는 어린이시보다 재미없는 것이 되어버린 것이 아닐까?
어른이 아이에게 보여주고 들려주고 느끼게 해 주는 그 모든 것들은 결국 아이의 성장을 돕기 위함이다. 동시를 쓰는 어른의 마음도 매한가지여야 한다. 아이들이 세상을 좀 더 다양한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이해의 지평을 넓혀 주어야 한다. 아이들이 받아들이기에 어렵지 않을까, 동시의 소재로 삼기엔 너무 무겁지 않을까 하는 한계를 그어서는 안 된다. 그러한 이야기들이야말로 어른이 아이들에게 들려줄 수 있는 시가 된다.
<작은 선녀>를 읽어준 다음 날 우리 반 아이 한 명이 도서관에서 《전태일 평전》을 빌려왔다. 또 한 놈은 내게 어제 읽어 준 시집을 좀 빌려보아도 되겠냐고 했다. 이런 것이 ‘성장’이구나 하며 혼자 감탄을 하였다. 어른이 쓴 동시 한 편이 하루아침에 22명의 아이들을 훌쩍 자라게 한 것을 보고 또 혼자 감탄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