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기도.
1. 솔로몬이 애굽의 바로와 인연을 맺어 그의 딸과 결혼합니다(1). 지혜로운 왕이라 인정받았던 솔로몬의 통치 후기가 세속화와 우상숭배로 변질되었는데, 이러한 변질은 솔로몬의 통치 초기부터 내재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한 구절입니다. 솔로몬은 혼인 정책을 통해 외교적 실리를 얻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왕은 아내를 많이 두지 말라는 하나님의 율법에서는 멀었습니다. 올바른 왕도에서 떠나 있었습니다.
2. 또한 열왕기의 기자는 솔로몬이 산당에서 제사한 사실을 언급하는데, “솔로몬이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아버지 다윗의 법도를 행하였으나, 산당에서 제사하며 분향하더라”라는 언급을 통해 다소 부정적인 뉘앙스를 담고 있습니다. 당시에 언약궤는 예루살렘에 있었지만, 모세 시대에 세워진 성막은 기브온에 있었습니다.
3. 솔로몬은 기브온 산당에서 번제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가 번제를 드리는데 한 마리만 드려도 될 것을 무려 천 마리나 드렸다(천일 동안 나눠서 드린 것이 아니다)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헌신된 태도를 잘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태도에 하나님은 크게 만족하셨고, 솔로몬에게 무엇이든지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4. 솔로몬은 아버지 다윗에게 주셨던 큰 은혜 가운데 자신이 왕이 되었음을 인정하고, 수많은 백성들을 다스려야 하는데, 자신이 어린아이와 같아서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 못하겠다며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합니다(7-8절). 그리고 솔로몬은 하나님께 “듣는 마음”과 “선악을 분별하는 능력”을 얻기를 구합니다(9절). 그리고 솔로몬이 구한 것에 대해 “주의 마음”에 들었다고 말씀합니다(10절).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에게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이런 지혜가 이전에도,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5. 솔로몬은 오직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말하였습니다. 자신을 위해 부와 장수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은 기뻐하시며, 하나님의 마음에 들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기도는 어떨까요? 얼마나 우리 자신을 위한 기도로 채워져 있을까요? 우리의 기도는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에 들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기도일까요?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기에 하나님은 그가 구한 지혜에 더하여 솔로몬의 인생에 부와 권세도 더하셨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자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우는 분이십니다.
6. 비록 꿈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들은 것이지만, 그 꿈이 꿈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것은 이후에 일어난, 두 창녀의 아이 소유권 분쟁을 재판할 때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당시 범죄 심리학이나, 거짓말 탐지기가 있는 것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오직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도저히 가려낼 수 없는 사건을 인간 모성애의 깊은 심리를 이용하여 분별하였습니다. 이 재판으로 인하여 온 백성들은 솔로몬 안에 하나님의 지혜가 있는 것을 보게 되었고, 그를 두려워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28절).
7. 솔로몬의 지혜로운 재판을 통해, 우리는 온 세상을 지혜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통치를 생각하게 됩니다. 솔로몬이 지혜로 재판하여 의인과 죄인을 구분하여 내듯이, 하나님께서도 그의 완전하신 지혜로 온 세상을 공의로 판단하십니다. 하나님의 판단에는 실수나 오류가 없으십니다. 어떤 숨겨진 죄라도, 심지어 마음 깊숙이 있는 죄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것이 드러나게 됩니다.
8. 말씀 에서 우리의 기도를 돌아보게 합니다. 오늘 내가 기도한 이유와 목적이 무엇입니까? 무엇을 위해서 하나님께 구하고 있습니까? 기도의 동기와 목적을 살피십시오. 우리가 하는 기도의 동기를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기뻐하실지, 그래서 마음에 들어 하실지, 아니면 안타까워하실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중심을 다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그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기도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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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이 애굽 공주와 결혼하다(1-3)
우리는 흔히 솔로몬의 통치를,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하여 왕국이 번성하고 복을 받았던 전기와 하나님께 불순종한 결과로 심판 받아 왕국이 나뉘어져야 했던 후기로 구분하여 이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과연 이렇게 구분하여 이해하는 것이 정당한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점을 주는 것이 사실입니다. 애굽 공주와 결혼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1) 솔로몬이 애굽의 왕 바로와 더불어 혼인 관계를 맺어 그의 딸을 맞이하고 다윗 성에 데려다가 두고 자기의 왕궁과 여호와의 성전과 예루살렘 주위의 성의 공사가 끝나기를 기다리니라
정략결혼이고, 결혼동맹입니다. 서로의 필요에 따라 혼인을 수단으로 삼은 것입니다. 애굽으로서는 메소포타미아로 가는 길목에서 신흥 강자로 급부상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중요성을 인지했기 때문에 이런 결정을 한 것이었습니다. 애굽은 앗수르와의 사이에 이스라엘을 우호 세력으로 돌려 완충지대로 삼는 이점이 있었고, 이스라엘 또한 남방의 오랜 강국 애굽과 가장 강력한 결혼 동맹을 맺음으로써 얻는 실익이 상당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게셀입니다. 게셀은 쉐펠라 지대의 전략적 요충지로, 여차하면 예루살렘으로 바로 진격할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적에게 대문을 열어놓은 것과 진배 없는 이곳을 애굽이 차지하고 있었는데, 이를 애굽의 공주가 결혼에 대한 예물로 가져온 것입니다(왕상 9:16). 그뿐만 아니라 가장 최고 등급의 동맹 관계에 있었다보니 두 나라간 무역이 활성화되고 여러 산물을 들여옴으로써 이스라엘의 문명화에 크게 이바지했을 것입니다.
율법은 가나안 여인들과의 결혼을 금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잊어버릴 것에 대한 경계 때문입니다. 혈통상 이방인이라고 해도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 되면 결혼할 수 있었습니다. 룻이 그랬고, 라합이 그랬습니다. 애굽 공주가 솔로몬과의 결혼으로 이스라엘로 시집 오면서, 애굽의 무수한 신들을 버리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온전히 받아들인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기록 가운데 이를 뚜렷이 확인할 방법이 없습니다.
게다가 이 일을 기점으로 솔로몬이 주변 나라들과 결혼 동맹을 맺은 이후로 예루살렘에 우상이 창궐하게 된다는 것을 보게 될 때, 애굽 공주와의 결혼은 솔로몬이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따른 것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상황이 이런 데도 서두에 말씀드렸던 솔로몬의 전후를 나눠서 성공과 실패로 도식화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여기에서부터 알 수 있습니다. 솔로몬의 실패는 여기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2-3) 그 때까지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아직 건축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들이 산당에서 제사하며 솔로몬이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아버지 다윗의 법도를 행하였으나 산당에서 제사하며 분향하더라
당시 가나안에 산재해 있던 수많은 산당은 바알 숭배가 만연했던 중심지에 세워졌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사는 곳 가까이에 위치하여 접근이 쉬웠을 것이고, 바알에게 제사하기에도 적당한 장소였을 것입니다. 솔로몬이 통치하던 시기에는 아직 성전이 지어지지 않았고, 예루살렘에 있었던 성막은 많은 백성이 하나님께 나아와 예배드리기에는 그 규모가 부족했을 것이므로 편의상 수많은 산당들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었음을 2절이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열왕기 기자가 성전을 건축하기 전이었으므로 백성들이 산당에서 제사했다고 말하는 것은, 보기에 따라서 대단히 비판적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습니다.
성전을 건축할 뜻을 품었고, 건축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던 다윗의 왕위를 물려 받은 솔로몬이 먼저 했던 일은 애굽 공주와의 결혼과 그에 따른 왕궁 건축이 먼저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솔로몬의 판단에,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국정 현안이었을지는 몰라도 과연 그러한가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순위에 대한 바른 분별이 필요합니다. 저마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들에 매진하지만 세월이 흘러 인생을 되돌아보니 헛된 일들 가운데 인생 대부분을 허비했다고 후회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되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예배와 봉사와 교제의 삼각형을 균형감 있게 가져가야 한다는 것에 있어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동의하지만 실제로 그런 삶을 살아가지 않습니다. 정말 중요하다면 삶의 루틴들을 정리해서라도 우선하고, 중요하고, 더이상 미룰 수 없는 일들에 시간을 배정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이와 같은 우를 범하지 않으려면 무엇이 더 중요한 것인가에 대해 우선순위의 분별이 바르게 되어 있어야 합니다. 우선순위가 엉켜 본말이 전도되면 돌이키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처음부터 가치의 경중을 잘 판단하여, 바른 길을 걸어야 합니다. 그 바른 길이란 눈에 보이는 세상의 기준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으로 봤을 때의 바른 길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10장 22절을 통해 강조하는 것이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언제 어디에서나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일상을 살아가실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축복합니다.
솔로몬이 듣는 마음을 구하다(4-15)
(4-5) 이에 왕이 제사하러 기브온으로 가니 거기는 산당이 큼이라 솔로몬이 그 제단에 일천 번제를 드렸더니 기브온에서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솔로몬이 큰 산당이었던 기브온 산당으로 가서 일천 번제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가 드렸다던 일천 번제는 역대기에서는 일천 희생이라고 하여, 천 마리의 번제물을 드렸음을 확실하게 합니다. 하루에 한 마리씩 1,000일 동안 번제를 드렸다고 해석하는 경우들도 있는데 맞지 않습니다. 그럴 거였으면 성막 앞에서 제사 지내도 충분했고, 굳이 큰 산당을 찾을 까닭도 없었습니다. 왕이 되고 나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 마음을 다해 제사를 드리기 위해 규모가 큰 산당을 찾았고, 그 마음을 다해 제물을 드렸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꿈에 나타나신 것은 솔로몬이 여전히 부족한 가운데서도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6) 솔로몬이 이르되 주의 종 내 아버지 다윗이 성실과 공의와 정직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주 앞에서 행하므로 주께서 그에게 큰 은혜를 베푸셨고 주께서 또 그를 위하여 이 큰 은혜를 항상 주사 오늘과 같이 그의 자리에 앉을 아들을 그에게 주셨나이다
6절에서 솔로몬이 하나님께 고백하는 감사는,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하셨을 뿐만 아니라 자신과 같은 아들을 주셔서 왕위를 잇게 해주셨다는 것에 대한 감사입니다. 그저 눈으로 보기로는 다윗 왕권이 강력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왕위를 이은 것으로 보이지만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섭리와 은혜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온 이스라엘의 기대를 한몸에 받았던 사울조차 제대로 왕위를 물려주지 못했음을 기억한다면, 우여곡절 끝에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던 부친의 뒤를 이어 자신이 왕이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 언약을 이루시는 신실하신 헤세드가 아니고서는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분명 하나님은 다윗과 소금 언약을 체결하시면서 사무엘상 7장 15절에서, 다윗의 후손이 잘못을 범할지라도 사울에게서 거둔 것처럼 자신의 사랑을 거두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은혜가 오늘 우리에게까지 임합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우리의 잘못을 간과하시면서 변하지 않는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그러니 주변을 둘러싼 모든 일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깨닫고, 늘 감사로 응답하는 자세를 견지하시기 바랍니다.
(7-10)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종으로 종의 아버지 다윗을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셨사오나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 주께서 택하신 백성 가운데 있나이다 그들은 큰 백성이라 수효가 많아서 셀 수도 없고 기록할 수도 없사오니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든지라
솔로몬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종”이라 부르며,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 알지 못한다라고 말합니다.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겸손의 표현입니다. 자신이 이 큰 백성을 감당하기가 매우 어렵다고 말하며, 듣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이 요청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었다고 말합니다. 솔로몬이 이 대목에서 왜 듣는 마음을 구했고,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기도를 흡족하게 여기셨는지에 대해 알 필요가 있습니다.
솔로몬의 기도는 11절에 나오듯이 자기를 위하는 간구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더 정확하게는 일신상의 영달이나 지위의 공고함을 구한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 곧 하나님을 대리하는 인간 왕으로서의 역할을 잘 감당하기 위해 간구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가운데 정의와 공의로 표상되는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구현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가 필요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의 기도는 예수께서 마태복음 6장 33절에서 말씀하신 대로,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기도였습니다. 그랬더니 주님의 말씀대로 “이 모든 것”을 더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십니다.
무엇을 기도하고 계십니까? 우리 기도의 범주가 더 확장되고 본질적인 것,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기도여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의 이유가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생명 주신 까닭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의 기도입니다.
(14) 네가 만일 네 아버지 다윗이 행함 같이 내 길로 행하며 내 법도와 명령을 지키면 내가 또 네 날을 길게 하리라
하나님께서 약속을 주십니다. 다윗의 길로 행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천착하면, 솔로몬의 날들을 길게 만들어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아직 얼마 지나지 않은 초반 몇 년의 행적만으로 솔로몬을 판단하시지 않습니다. 다니엘서 5장에서 잘 보여주듯이, 하나님께서 벨사살을 하나님의 저울에 달아보았더니 부족함이 보여서 그 나라를 쪼개었다는 것처럼 하나님은 인생을 보시고, 그에 따라 결과를 주십니다. 솔로몬이 이 말씀대로 하나님의 법도와 명령에 천착했더라면, 이스라엘이 맞이할 미래가 비극적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15) 솔로몬이 깨어 보니 꿈이더라 이에 예루살렘에 이르러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 서서 번제와 감사의 제물을 드리고 모든 신하들을 위하여 잔치하였더라
솔로몬은 산당에서 꾼 꿈을 하나님의 계시로 받아들이고, 감사의 예배를 드립니다. 솔로몬이 언약궤 앞에서 제사를 드렸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가 언약의 맥락 가운데서 힘을 발휘할 것임을 드러내줍니다. 그 지혜는 일신의 영달을 위한 지혜가 아니라 철저하게 하나님 나라를 위한 지혜이고, 그 백성을 다스리는 지혜입니다.
우리가 구할 것도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리에서 주의 뜻을 이루기 위한 그 무엇이어야 합니다. 오늘 솔로몬이 기도한 것을 보면서 내가 구해야 할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 기도해보시기 바랍니다. 그 기도를 바탕으로 정말 우리가 주님을 위해 목숨을 건 인생을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먹이시고 입히시는 은혜가 정말 함께하는지도 경험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그의 속에 있어
솔로몬의 일천 번제를 받으신 하나님은 그에게 원하는 것을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솔로몬은 백성을 잘 다스릴 수 있도록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이 지혜를 구한 것에 대해 기뻐하셨고, 그에게 전무후무한 지혜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오늘 본문에서는 솔로몬이 하나님께 구하였던 지혜,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주신 지혜가 어떤 것이었는지 확인해 볼 수 있는 하나의 사건이 등장합니다. 사건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어느 날 두 명의 여자가 한 아기를 데리고 솔로몬에게 나아왔습니다. 그리고 서로가 그 아기를 자신이 낳았으며 자신이 아기의 진짜 어머니라고 주장합니다. 쉽게 판결할 수 없는 난해한 사건이 솔로몬 앞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16절입니다.
두 여자가 왕에게 와서(16)
16.그 때에 창기 두 여자가 왕에게 와서 그 앞에 서며
하나님이 주신 지혜를 받은 솔로몬 앞에 창기 두 명이 섰습니다. 이 두 여자의 직업은 매춘부였습니다. 사실 지금도 매춘부는 사람들의 무시와 비난의 대상이고, 사람들 앞에 당당하게 나서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이런 사정은 솔로몬이 다스리던 그 시대에도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지금보다 더 심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무시와 비난을 받는 대표적 인물인 창기 두 명이 존귀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왕 앞에 선 것입니다. 이들이 왕 앞에 서게 된 것은 분쟁 해결을 요청하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들이 분쟁 해결을 위해 처음부터 왕 앞에 서게 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아마도 당시 정해져 있던 사법 행정의 절차를 모두 거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건에 대해 누구도 명쾌한 판결을 내리지 못하자 최고 통치자인 왕 앞에 서게 된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 상황에서 우리가 주목해 볼 것은 솔로몬은 하나님이 주신 지혜를 가지고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과 사소하게 여겨질 수 있는 문제까지도 세심하게 살피고 있다는 점입니다. 솔로몬은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를 사회적으로 보호받지 못하던 창기를 위해서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그에게 지혜를 주신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지혜는 솔로몬 자신만을 위해서 사용하라고 주신 것도 아니요. 특정 사람들을 위해 사용하라고 주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섬기고 도우라고 그에게 선물로 주신 것이었습니다. 이 점을 우리가 인식한다면 우리도 솔로몬과 같이 행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지혜를 선물로 주신 것과 같이 우리 각자에게도 고유한 재능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물질을 잘 벌 수 있는 재능을 주셨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탁월한 지적 능력을 주셨습니다. 또 어떤 사람에게는 주변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재능도 주셨습니다. 또 어떤 사람에게는 건강을 주셨습니다. 각기 모두 다른 재능이지만 중요한 것은 모든 이에게 고유한 재능을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을 주신 분의 뜻에 맞게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재능을 주신 이유는 자신만을 위한 삶을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주신 재능으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섬기며 나누는 삶을 살아가라고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주변을 돌보며 그리스도의 사랑과 나눔, 섬김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17절에서 22절입니다.
두 여자가 왕에게 와서(17-22)
17.한 여자는 말하되 내 주여 나와 이 여자가 한집에서 사는데 내가 그와 함께 집에 있으며 해산하였더니 18.내가 해산한 지 사흘 만에 이 여자도 해산하고 우리가 함께 있었고 우리 둘 외에는 집에 다른 사람이 없었나이다 19.그런데 밤에 저 여자가 그의 아들 위에 누우므로 그의 아들이 죽으니 20.그가 밤중에 일어나서 이 여종 내가 잠든 사이에 내 아들을 내 곁에서 가져다가 자기의 품에 누이고 자기의 죽은 아들을 내 품에 뉘었나이다 21.아침에 내가 내 아들을 젖 먹이려고 일어나 본즉 죽었기로 내가 아침에 자세히 보니 내가 낳은 아들이 아니더이다 하매 22.다른 여자는 이르되 아니라 산 것은 내 아들이요 죽은 것은 네 아들이라 하고 이 여자는 이르되 아니라 죽은 것이 네 아들이요 산 것이 내 아들이라 하며 왕 앞에서 그와 같이 쟁론하는지라
왕 앞에 서게 된 두 여자를 통해 사건의 내용이 진술됩니다. 효과적인 설명을 위해 본문에 등장하는 두 여자를 1번과 2번 여자로 구분하여 명칭하겠습니다.
먼저 1번 여자가 주장한 내용입니다. 1번 여자는 한 집에서 2번 여자와 함께 살았는데 비슷한 시기에 두 사람이 해산하게 됩니다. 1번 여자가 먼저 해산하였고, 그로부터 삼 일 후에 2번 여자도 해산합니다. 물론 이 집에는 두 여자 말고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1번 여자가 아침에 아이 젖을 먹이려고 일어났는데 이게 웬일입니까! 아들이 죽어 있는 겁니다. 그런데 죽은 아이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자신이 낳은 아이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1번 여자는 이렇게 추측하며 주장합니다. 2번 여자가 잠결에 몸부림을 치다가 아들을 덮치게 되었고 이 때문에 그의 아들이 질식해서 죽게 되자 그 죽은 아들을 자신에게로 가져다 놓고, 살아 있는 자신의 아들을 2번 여자가 데려간 것이라고 합니다.
반면 2번 여자는 1번 여자의 주장을 모두 부정합니다. 하지만 부정한다고 해서 특별한 근거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살아 있는 아기가 자신의 아이이고, 죽은 아이는 1번 여자의 아이라고만 주장할 뿐입니다. 두 여자는 자신의 주장만 반복하고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둘 중 하나는 거짓을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거짓은 곧 드러나게 됩니다. 23절에서 27절입니다.
왕이 이르되(23-27)
23.왕이 이르되 이 여자는 말하기를 산 것은 내 아들이요 죽은 것은 네 아들이라 하고 저 여자는 말하기를 아니라 죽은 것이 네 아들이요 산 것이 내 아들이라 하는도다 하고 24.또 이르되 칼을 내게로 가져오라 하니 칼을 왕 앞으로 가져온지라 25.왕이 이르되 산 아이를 둘로 나누어 반은 이 여자에게 주고 반은 저 여자에게 주라 26.그 산 아들의 어머니 되는 여자가 그 아들을 위하여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왕께 아뢰어 청하건대 내 주여 산 아이를 그에게 주시고 아무쪼록 죽이지 마옵소서 하되 다른 여자는 말하기를 내 것도 되게 말고 네 것도 되게 말고 나누게 하라 하는지라 27.왕이 대답하여 이르되 산 아이를 저 여자에게 주고 결코 죽이지 말라 저가 그의 어머니이니라 하매
두 여자의 입장을 모두 확인한 솔로몬은 살아 있는 아이를 칼로 베어 두 쪽으로 나누고 한쪽은 1번 여자에게 주고, 또 다른 한쪽은 2번 여자에게 주라고 명령합니다. 최고 통치자의 지엄한 명령이었습니다. 살아 있는 아기를 둘로 나누라는 왕의 명령에 두 여인은 각기 다른 반응을 보입니다.
1번 여자는 아이를 반으로 나누라는 왕의 명령을 듣자 아기를 보호하기 위한 모성애가 불타올라 마음에 불이 붙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왕에게 아이를 죽이지 말고 2번 여자에게 줄 것을 간청합니다. 1번 여자는 이러한 행동이 양육권을 포기하는 행동이고, 동시에 거짓 주장을 한 것으로 인정되어 자신의 생명을 잃게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눈앞에서 사랑하는 자녀를 죽게 내버려 둘 수 없었습니다.
반면에 2번 여자는 “내 것도 되게 말고 네 것도 되게 말고 나누게 하라”는 잔인한 말을 합니다. 이는 아이를 사랑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질투와 소유욕을 채우기 위한 도구로 여기고 있음을 확인하게 합니다. 두 여인의 상반된 반응을 통해 누가 진짜 어머니인지 확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아들의 존재는 기업이자 미래의 소망과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2번 여인은 자신의 기업이자 소망과 같은 아들이 죽게 되자 자기 자신을 목적 삼고 살아가던 2번 여자는 탐욕과 욕심에 눈이 어두워져 이웃의 아기를 훔치고 자신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을 거짓으로 속였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2번 여인의 자기중심적 죄 성이 탐심을 만들어 냈고, 그 탐심을 거짓으로 포장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거짓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언젠가는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주신 지혜를 통해 거짓이 드러났다는 사실입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이 주신 지혜를 통해 상반된 두 여인의 반응을 확인했고, 아이의 생명 보존을 요청한 1번 여자가 아이의 진짜 어머니라는 판결을 내립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는 거짓과 속임이 난무한 시대입니다. 거짓이 판치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와 때를 따를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고 살아가는 우리가 모두가 되길 축복합니다. 28절입니다.
판결함을 듣고(28)
28.온 이스라엘이 왕이 심리하여 판결함을 듣고 왕을 두려워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지혜가 그의 속에 있어 판결함을 봄이더라
아기에게 진짜 어머니를 찾아 준 솔로몬의 명쾌한 판결은 온 이스라엘에 전해졌습니다. 증인도 없고, 오늘날과 같이 유전자 검사도 존재하지 않던 시절, 이 사건은 미궁 속으로 빠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를 사용하여 아이를 훔쳐 간 여인의 탐욕과 거짓을 밝히 드러내었습니다. 동시에 하루아침에 아기를 잃어버리고 고통 가운데 머물러 있던 여인의 마음에 기쁨의 빛을 비추어 주는 은총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지혜가 솔로몬을 통해 드러났다는 사실을 그들의 눈과 귀로 확인했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허락하신 지혜로 인해 모든 거짓과 불의가 밝히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 것입니다.
이 일을 계기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솔로몬 안에 하나님의 지혜가 있음을 알고 그를 두려워하게 되었고, 이는 궁극적으로 솔로몬에게 지혜를 주신 하나님을 경외하였음을 의미합니다.
우리도 우리의 시선을 솔로몬의 지혜에 머물러 있게 하지 말고 그에게 지혜를 주신 참 지혜의 왕이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 어려운 일들이 많이 있지만 그럴 때 지혜의 왕이신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고 주님이 주시는 힘으로 이겨나감으로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드러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은총을 누리며 그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드러내는 복된 삶을 살아가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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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다윗을 이어 이스라엘의 왕이 된 솔로몬은 나라를 다스리기 시작할 때,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하나님의 도움을 간구하는 겸손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3절과 4절을 보면 “솔로몬이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아버지 다윗의 법도를 행하였으나 산당에서 제사하며 분향하더라 이에 왕이 제사하러 기브온으로 가니 거기는 산당이 큼이라 솔로몬이 그 제단에 일천 번제를 드렸더니”라고 말씀합니다. 왕이 되고 나면 여러 가지로 할 일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그 많은 일들 가운데 솔로몬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하나님의 도움을 바라는 것을 최우선 순위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일천 번제를 드렸다는 말은 일천 마리의 짐승을 번제물로 드렸다는 것입니다. 솔로몬 왕과 같은 나라의 지도자들이 번제를 드릴 때에는 한 번의 제사에 여러 마리의 짐승을 번제로 드렸기에 반드시 천 번의 번제를 드린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천 마리의 짐승을 번제를 드리기 위해서는 상당히 오랜 기간이 걸렸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솔로몬이 이처럼 오랜 기간 동안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면서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 자신을 의탁하며 도움을 간구했으며, 마침내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께 간구하며 나아갈 때 한 두 번 해보고 응답이 안 된다고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기간을 두고 지속적으로 기도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5절을 보면 “기브온에서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고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응답을 하십니다. 하나님의 응답에 대해 솔로몬은 먼저 7절을 보면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종으로 종의 아버지 다윗을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셨사오나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라고 말합니다. 솔로몬은 자신을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는 작은 아이’라고 말하는데, 이 말은 혼자서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두 세 살의 어린 아이라는 뜻 보다는 나라를 다스릴 만한 경험이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하나님께 자신의 무능력을 겸손하게 아뢰는 것입니다.
또한 8절과 9절을 보면 “주께서 택하신 백성 가운데 있나이다 그들은 큰 백성이라 수효가 많아서 셀 수도 없고 기록할 수도 없사오니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라고 말합니다. 솔로몬이 하나님께 구한 것은 ‘듣는 마음’이었습니다. 이것은 선악을 분별하는 지혜이기도 합니다. 선악을 분별하는 지혜는 사람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바르게 다스리기 위해 하나님의 지혜를 구한 것입니다.
솔로몬이 다스려야 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삶의 모습들은 천차만별의 복잡하고 다양한 삶의 모습입니다. 이에 반해 솔로몬은 왕궁에서 자랐기에 가난한 사람들의 고달픈 삶을 잘 알지 못합니다. 솔로몬은 자신이 직접 몸으로 체험하지 못한 것들도 바르게 분별을 하고 나라와 백성들을 바르게 다스릴 수 있는 마음과 지혜를 구한 것이었습니다.
10절을 보면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든지라”고 말씀합니다. 솔로몬이 ‘듣는 마음’ 즉 지혜를 구한 것은 즉흥적으로, 생각나는 대로 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솔로몬이 일천 번제를 드리는 그 기간 동안 하나님께 가장 중요한 것으로 무엇을 구해야 할지 기도하며 정리가 된 것이었습니다. 우리도 어느 정도 기간을 두고 지속적으로 기도하는 시간을 지나오다 보면 나중에는 정말 중요하게 구해야 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해집니다. 지속적으로 기도하는 가운데 정말 중요하지 않은 것들은 하나 둘씩 가지치기가 되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에게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와 총명한 마음뿐만 아니라 부귀와 영광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받은 솔로몬은 그 지혜를 드러내게 되는 재판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재판은 두 명의 창기가 고소한 사건이었습니다. 한 집에 사는 두 여인이 사흘의 간격을 두고 해산을 했습니다. 그런데 한 여자가 자다가 아기 위에 자는 바람에 아기가 죽자 죽은 아기를 살아있는 아기와 밤중에 몰래 바꿔치기를 한 것입니다. 두 여인은 서로가 살아있는 아기가 자기 아기라고 싸우다가 마침내 솔로몬왕에게 재판을 받으러 나온 것입니다.
오늘날 같으면 유전자검사를 하게 되면 쉽게 누구의 아이인지 알아낼 수 있지만, 증인과 증거도 없는 상태에서 누구의 아이인지를 판단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살아 있는 아기를 칼로 나누어 반반씩 주라는 말도 안 되는 판결을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하나님의 지혜가 담겨 있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보시는 하나님의 지혜를 받은 솔로몬은 어머니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이 있는 것입니다. 이 두 여인에게 어머니의 마음이 있는지 없는 지를 알아볼 수 있는 판결입니다. 아기를 살리려고 하는 여인이야 말로 아기의 진짜 어머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28절을 보면 “온 이스라엘이 왕이 심리하여 판결함을 듣고 왕을 두려워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지혜가 그의 속에 있어 판결함을 봄이더라”고 말씀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에게 사람의 본성과 마음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지혜의 통찰력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가진 지식과 지혜만으로는 이 험한 세상을 도저히 제대로 살아갈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를 우리는 구해야만 합니다. 야고보서 1장 5절을 보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구했던 솔로몬의 기도에 응답해주신 그 하나님께 우리 역시 지혜를 구하는 가운데 주님의 휘페르테스와 마르튀스로 살아가는 오늘 이 하루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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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째 부분(왕상 3:1-3) : 정략적 혼인
솔로몬이 타락의 길로 가는 단초가 된 사건은 다름 아닌 결혼이었습니다. 본문 1절을 보면, 다윗사후 반대세력 제거를 통해 내부왕권을 견고히 했던 솔로몬은 이웃국가와의 정략결혼을 통해 대외적인 안정을 도모했습니다. 고대왕권 중 최강국이었던 애굽(이집트)이 팔레스타인의 조그마한 나라의 왕인 솔로몬과 정략결혼을 맺었다는 것은 애굽의 세력이 쇠퇴일로에 접어들었다는 것을 의미함과 동시에 다윗에 이은 솔로몬 왕국의 힘이 그만큼 강력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이유에 의해서든 솔로몬의 이러한 결정은 옳지 못한 것이었으며, 이로 인해 나중에 후비가 700명이요, 빈장이 300명에 이르게 되었으며, 결국 그 부인들이 섬기는 이방신들로 인해 자신마저 오염되고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어린 나이에 왕이 되고, 내부의 반란을 진압하고 보니 내심 불안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불연 듯 인간적인 안전장치를 마련하고 싶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는 바로 그 순간 두 가지 실수를 범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 묻지 않았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결혼을 수단화했다는 겁니다.
결혼이란? 수많은 정의들이 있지만, 그 어떤 정의에서든 그 나름이 가진 신성함과 더불어 부족한 한 인간을 둘이 같이 세워가는 은총이 그 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그 결혼이란 것을 거룩한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전락시켰습니다. 그 결과 그의 인생도 훗날 타락하게 되었던 겁니다.
◉ 둘째 부분(왕상 3:4-15): 3가지 비결
정략결혼이 훗날 솔로몬이 타락하게 되는 단초가 된 것이라면, 본문 4절 이하에 등장하는 꿈속에서 하나님과 나눈 대화는 솔로몬이 지혜로운 왕으로 세워져간 3가지의 비결을 보여줍니다.
그 3가지 비결을 살펴보기 전에 잠시 짚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브온 산당에서 솔로몬이 하나님께 드린 일천 번제와 관련된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일천 번제’를 천 번 드리는 희생제라고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정말1,000번 동안 매번 번호를 매기며 헌금을 드리는 분을 직접 뵙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실은 일천 번제라는 것은 1,000번의 제사가 아니라, 희생제물 1,000마리를 한 번에 드린 제사라는 의미입니다.
이제 솔로몬이 지혜의 왕이 된 비결을 본문 4절 이하부터 15절에서 살펴보면… 솔로몬은 일천 번제 이후 소원을 물으시는 하나님 앞에서 다음의 3가지를 말씀을 드렸는데, 실은 그것이 지혜로운 삶의 비결이 되었습니다.
첫째 비결: 솔로몬은 자신이 왕이 된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고백했습니다(6절).
: ‘하나님의 은혜’라는 복음성가에 다음과 같은 가사가 있습니다.
“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 나를 부르신 이가 하나님, 나를 보내신 이가 하나님, 나의 나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나의 달려갈 길 다 가도록, 나의 마지막 호흡 다 하도록, 나로 그 십자가 품게 하시니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이 가사의 고백처럼, 솔로몬은 자신의 자신됨과 왕됨이 모두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임을 고백했습니다. 이 고백이 평생에 계속되는 한 하나님 앞에서 존귀히 여김을 받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삶이 지혜로 점철되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둘째 비결: 솔로몬은 자신의 연약함을 하나님께 고백했습니다(7절).
: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을 알지 못하고”라는 말은 비록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다윗을 이어 왕이 되기는 했지만, 들어가고 나가는 것조차도 혼자서 할 수 없는 자신의 연약함에 대한 고백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겸비함의 표현이었습니다.
자신의 한계와 약함을 고백하는 이런 겸비함으로 하나님 앞에 겸손히 서는 한 하나님께서 그 인생을 책임져 주시는 것은 또한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러기에 이 겸비함이 솔로몬의 인생을 지혜롭게 만들어 준 두 번째의 비결이었습니다.
셋째 비결: 듣는 마음(9절)
: 수많은 백성들을 다스려야 하고, 그들과 더불어 하나님의 나라를 일구어 가야하는 솔로몬에게 있어 가장 부담되는 것은 올바른 판단과 결정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올바른 분별을 해야 했습니다. 이것이 그에게 가장 부담으로 다가왔으며, 그렇기에 가장 간절했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하나님께서 자신으로 하여금 올바른 분별을 할 수 있도록 직접 말씀해 주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음성을 듣고 올바른 판단과 결정을 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듣는 마음’을 구했던 겁니다.
이전 개역성경에는 ‘듣는 마음’을 ‘지혜로운 마음’이라고 번역을 했었는데, 개역개정에서는 보다 원문에 가깝게 ‘듣는 마음’으로 번역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참된 지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듣는 데에서 나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인간의 얄팍한 꾀와 꼼수에 의해 우리의 인생 길을 걸어갈 것이 아니라,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머리로만 기울일 것이 아니라, 온 맘으로 기울여야 합니다. 그래서 ‘듣는 마음’이 참 지혜가 되고, 승리하는 인생의 비결이 되는 겁니다.
이상과 같이 우리는 짧게나마 솔로몬이 타락의 길로 가게 했던 단초와 지혜의 삶을 살게 된 비결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타락의 단초와 승리의 삶의 비결, 이 두 가지를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 둘은 그리 멀리 떨어진 것들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음성에 마음을 기울이느냐, 아니면 인간의 꾀와 생각으로 인생을 계획하느냐 이 차이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 우리는 짧은 삶 속에서 수많은 일들과 만나는 사람들 속에서 많은 판단과 선택을 요구받게 될 겁니다. 그때 교우님들은 어느 것에 귀를 기울이실 겁니까? 인간의 꾀와 수단입니까? 아니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입니까? 이쪽이냐? 저쪽이냐? 이 한 가지에 따라 우리 인생은 타락한 솔로몬이 되느냐, 아니면 지혜로운 솔로몬이 되느냐가 결정되어 갈 겁니다.이 새벽 하나님께서 교우님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또한 교우님들은 '듣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드립니다.
솔로몬은 이스라엘의 제 3대왕으로서 "지혜의 왕"이라는 이름이 붙어 다닙니다.
솔로몬은 이 지혜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오늘 말씀은 솔로몬의 지혜가, 누가 옳은지 분간하기 어려운 소송사건에서 어떻게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는지 잘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함께 사는 두 여인은 공교롭게도 삼일 간격으로 각자 아들을 낳았는데, 어느 날 한 여인이 자기 아들을 압사시키는 일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그 여인은 "자식을 잃을 수 없다는 강한 집념에 사로잡혀 함께 사는 여인의 아들과 자기의 죽은 아들을 몰래 바꿔놓았습니다.
아들을 바꿔치기 당한 여인이 새벽에 일어나보니 기가 막힐 노릇 이었습니다.
두 여인은 살아있는 아이가 서로 자기 아이라고 주장합니다.
하는 수 없이 두 여인은 솔로몬 왕을 찾아가 사유를 말하고 지혜로운 판결을 요청했습니다. 그들은 재판관이었던 솔로몬 앞에서도 살아있는 아이가 서로 자기 아이라고 하면서 그들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만일 우리가 재판관이라면 어떻게 처리 했겠습니까?
여간 난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기에 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물론 오늘날이라면 이것은 별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유전자 검사를 하면 어느 아이가 누구의 아이인지 구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유전자 검사와 같은 방법이 없었습니다.
대신 솔로몬은 인간 심리에 대한 놀라운 통찰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솔로몬은 자식에 대한 독특한 심리 반응을 이용해 이 사건을 심리했습니다.
솔로몬은 살아있는 아들을 둘로 나누어 공평하게 두 여인에게 주라고 명령합니다.
이것이 판결이라면, 아마 이것은 분쟁을 해결하기 어려울 때, 분쟁의 소지(素地)를 없앰으로써 소송사건 자체를 말소시키려는 의도로 파악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공평한 판결은 될 수 없었습니다.
누가 누구의 아이인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솔로몬의 이 조치는 주변 사람들에게 차선의 판결로 받아들여졌을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솔로몬의 이 판결이 최종 판결이었다면, 자기의 아들을 빼앗긴 여인만 억울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솔로몬이 살아있는 아이를 반으로 나누어 분쟁 당사자인 두 여인에게 주라고 명령했을 때 두 여인의 반응은 정반대로 나타났습니다.
자기 아이를 압사시킨 여인은, 자기 아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자기 아이가 아닌, 살아있는 아이가 반으로 나뉘어 죽는 것을 가슴아파하지 않았습니다.
그 아이를 자기 아이로 가질 수 없을 바에야 죽도록 내버려 두자고 생각했습니다.
그 여인은 솔로몬의 판결이 오히려 잘 되었다고 맞장구를 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아이의 어머니는 달랐습니다.
이제 그 아이의 어머니는 자기 아이를 찾느냐 빼앗기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안 되었습니다.
자기 아들을 살리느냐 죽이느냐 만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자기 아들이 죽게 된 것을 보게 되자 그 어머니는 가슴이 불붙는 것 같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황급히 친권을 포기하고
친권을 다른 여인에게 넘기겠다고 선언합니다.
그것이 자기 아이를 살리는 유일한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나타난 심리는 조작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솔로몬은 최종 판결을 내립니다.
"산 아들을 저 여인에게 주고 결코 죽이지 말아라. 저가 그 어미니라"
솔로몬의 이 판결을 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슴이 후련함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리고, 과연 명 판결이구나 하고 감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할 것은
자기 아이를 압사시키고 남의 아이를 빼앗아 자기 아이라고 주장하는 여인처럼 악한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기 것만 챙기면 그만이라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겉보기에는 선하지만 악한 마음을 품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양의 옷을 입고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를 삼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7: 15)
이런 세상에서 실족하지 않기 위해서는 깨어있어야 합니다.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적 지혜를 구합니다.
세상적 지혜의 핵심은 <나>요, 세상적 지혜로 얻고자 하는 것은 <성공>입니다.
세상적 지혜는 본질적으로 어떻게 바르게 사느냐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참 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솔로몬의 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왔습니다.
내가 판단의 기준이 된다면 어리석은 선택을 할 때가 많습니다.
그것을 후회 할 때는 이미 때는 늦게 됩니다.
그러므로 삶의 중심이 내가 아니라 이웃의 필요를 채우기 위하여 사는 삶이 되어야 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기 위한 삶이 되어야 합니다.
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오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그 말씀에 귀를 기울여 순종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뿐만이 아니라 누구의 말이든지 잘 들을 줄 아는 귀, 경청하여 필요를 채워줄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이같은 지혜를 얻어 이 세상의 누구도 두려워함이 없이, 어떤 상황에도 염려 없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로 당당하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