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창세기 6~8장은 최초의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메시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광범위하게 일어난 홍수 심판이었다는 점에서, 마지막 때에 있게 될 하나님의 최후 심판에 대한 하나의 전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 속에 들어온 죄악이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계속해서 확산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는 것”을 경계한 바울 사도의 말씀을 기억나게 합니다(고전 5:6).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말씀을 들을 때, 그들 가운데서도 얼마든지 이런 일이 반복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했을 것입니다.
2. 성경에서 가장 논란이 많이 되는 본문 중에 하나인,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의 결혼의 이야기는 그 해석이 쉽지 않습니다. 어떤 해석도 완벽하지는 않겠지만, 하나님의 아들들이 셋의 후손을, 사람의 딸들이 가인의 후손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무난한 해석입니다. 이 두 후손들, 섞여서는 안 되는 것이 섞였고,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을 넘었습니다. 거룩은 죄와 섞일 수 없는 것입니다. 섞이면 거룩이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더 이상 어느 사람에게도 삶의 기준으로서의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3. 결국 거룩은 무너지고 섞이면서, 하나님의 영은 이들에게서 떠나시고, 이들은 “육”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육이 되었다는 말은 죄된 본성 가운데, 목이 곧고 마음이 부패한 사람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제 더 이상 영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 말씀을 쫓는 인생에서 벗어나게 된 것입니다. 결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수 없는 인생이 되고, 각기 제 길로 걸어가는 것입니다. 결국 노아를 통해 하나님의 심판이 120년 후에 있을 것이 선언되었습니다(창 6:3).
4. 하지만 이런 심판의 메시지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는 여전히 흘러가고 있다는 것이 매우 놀랍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그리고 오늘날 교회는 끊이지 않는 이 은혜의 물결을 보아야 합니다. 심판 중에서도 긍휼을 잊지 않으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5. 8절에 보면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말하며, 이어서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 번 에녹처럼 하나님과 동행했던 또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이 구절은 실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의 특징과 열매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그의 의인됨과 하나님과 동행함이 어떻게 연결되어 나타납니까? “노아가……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22).”
6. 아담과 하와의 실패는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우습게 여긴 것이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는 사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였습니다. 비록 죄악이 무성하고, 어두운 세상이 되었지만,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기에 하나님과 동행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기 힘든 세상에서 홀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킴으로써 말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구원을 얻어내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정반대입니다.
7. 오늘날에도 이 원리는 동일합니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라면, 당신은 그 말씀의 권위를 알 것이며, 어떤 상황이라도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당신은 그 말씀을 결코 우습게 여기지는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특징지어주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에 순종하는 삶입니다. 당신은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습니까?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을 기뻐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당신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인가?
========================================
세월이 지나가면서 점점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범죄와 타락에도 불구하고 창조시 인간들에게 주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하나님의 복의 성취입니다. 사람들이 번성하며 땅에 충만해지자 한동안 분리되어 살아가던 가인의 후손들과 셋의 후손들이 차츰 뒤섞여 살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1,2절)
사람의 딸들은 4장에 나온 가인의 후손 즉 하나님을 떠난 불신자를 의미하고 하나님의 아들들은 셋의 후손, 즉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리킵니다. 어제 새벽시간에 나눈 말씀처럼 가인의 후손들은 화려한 이력과 성공신화를 자랑하며 마치 역사의 주인공인 것처럼 행세합니다. 그러나 가인에게 죽은 아벨대신 주셨던 셋의 후손들은 가인의 후손들의 성공신화에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노아의 때에 이르러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화려한 모습에 끌리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없이도 인간의 노력과 능력으로 만족하며 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성공과 번영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사람의 딸들의 화려해 보이는 삶의 외형에 매료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2절)
이제 셋의 후손이나 가인의 후손이 구분이 안되게 되었습니다. 경계가 무너지고 구분이 없어졌습니다. 세상의 타락은 악한 자들의 번성에만 그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백성들이 세상을 사랑하여 세상과의 야합함에도 그 중요한 책임이 있음을 본문은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경건한 하나님의 백성인 셋의 후손들마저 영적 순결을 지키지 못하고 가인의 후손들과 어울림으로써 죄악의 확산은 더욱 심해졌습니다. 이러자 하나님은 인간을 지었음을 한탄하시고 지면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새들까지도 쓸어버리고 진멸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7절)
하나님께서 이처럼 세상을 멸하실 것을 생각하실 때에 느끼셨던 감정을 “근심과 한탄하심”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그것은 온 세상에 가득한 인간들의 죄악상을 바라보시며 느끼셔야 했던 슬픔을 인간적인 감정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그의 가족은 구원해 주시기로 약속해 주시며 방주를 준비하도록 명령하십니다. 노아는 온 땅이 인간들의 죄로 말미암아 부패하고 포악함이 가득 차고 모든 혈육 있는 자들이 다 타락했어도 오로지 하나님과 동행하는 의인이었습니다.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9절)
온 세상에 죄악이 가득하여 마침내 하나님이 홍수로 심판을 하시고자 하셨을 때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로 선택을 받아 구원을 받아 새로운 인류의 조상이 됩니다. 그런데 노아가 이렇게 의로운 삶을 살 수 있었던 원인을 창 6:8에서는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이 히브리어로는 직역하자면 “노아는 여호와의 눈에서 은혜를 찾았다”는 뜻입니다. 즉 노아는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죄악에 대해서 진노하시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눈 속에 은총과 긍휼이 있음을 발견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의 죄악에 대해서 진노하시는 중에서도 그들을 긍휼히 보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자”란 그처럼 진노하시는 중에서도 하나님 눈 속에 있는 은총을 볼 수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노아를 설명하는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는 말은 노아가 한 번도 죄를 지은 적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찾는 사람이고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노아도 욕망이 이끄는 대로 살고 싶은 죄의 충동이 있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홍수 후에 포도주에 취해 실수를 했습니다. 연약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하나님의 은혜가 간섭하셔서 죄를 깨닫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지 알게 하고, 얼마나 부패한 존재인지 알게 합니다. 그래서 매순간 하나님을 찾게 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합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이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성경은 이런 노아를 의인이라고 부릅니다. 의인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것이 아니라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의인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만들게 하신 방주가 바로 노아의 삶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방주를 만들어갑니다. 그러나 그 방주는 돛도 없고 키도 없습니다. 노아가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맡기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순종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습니다. 이것을 믿지 못하면 세상의 방법을 따라가게 됩니다. 용사가 되고 명성이 있는 자가 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눈에 가득한 은혜를 발견하는 것이고 은혜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감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의인의 삶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
창세기는 ‘시작의 책’입니다. 창세기에는 천지만물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인류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그리고 결혼과 가정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아가 창세기에는 ‘죄’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기록되어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아담과 하와로부터 시작된 죄악이 인류를 어떻게 파멸로 치닫게 하고 있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5절)
1절에서 창세기 기자는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5절에서는 사람이 짓는 죄악 또한 세상에 가득했다고 나와 있습니다. 원문을 좀 더 정확하게 번역하면 ‘그 사람의 죄악이 그 땅에 가득 찼다’는 의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지으신 사람의 죄악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그 땅에 가득 찼고, 이것이 하나님께서 탄식하시는 이유라는 말입니다.
창세기 기자는 6일간의 창조기사에서 창조의 하루가 지날 때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표현을 마치 후렴구처럼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6일째 사람까지 모두 만드신 후 그 모든 것을 보시고는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덧붙여 놓았습니다. 이러한 표현을 통해 우리는 천지만물을 지으시던 하나님의 기쁨이 얼마나 컸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6장에서 하나님의 기쁨은 탄식으로 바뀌어 있습니다.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6절)
하나님의 한탄은 한탄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탄식은 심판에 대한 경고로 이어집니다.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7절)
저희 가정에 두 아들이 있습니다. 큰 아이가 다섯 살, 둘째가 세 살입니다. 어제 아침에 이 두 아이가 장난감을 가지고 싸웠습니다. 먼저 형이 동생이 가지고 있는 장난감을 빼앗았습니다. 그러자 동생이 울면서 다른 장난감으로 형을 때렸습니다. 형도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걸 보고 있던 제가 화가 나서 장난감을 모두 다른 방에 넣어버리고는 두 아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너희들 장난감,아빠가 모두 내다버릴 거야! 다시는 장난감 못 가지고 놀 줄 알아!” 그러자 말귀를 알아들은 큰 녀석이 더 서럽게 울었습니다.
아내와 저는 아이들을 꼭 안아주면서 달래주었습니다. 아이들을 달래면서 “신일아, 엄마 빠는 장난감보다 너희들이 훨씬 소중해. 그런데 장난감 때문에 너희들이 싸우는 걸 보니 엄마 아빠 마음이 너무 아파.” 장난감 때문에 싸우면 안 된다는 약속을 하고 저는 각자에게 가지고 싶은 장난감을 나누어주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비판적으로 이야기합니다. 기껏 지어놓고 파괴해버리는 하나님은 성미가 고약한 신이라고 비아냥거립니다. 그러나 그러한 비판은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나오는 것입니다.
6절에서 ‘한탄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나함’은 ‘후회하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근심하다’로 번역된 단어 ‘아짜브’는 ‘마음 깊이 슬퍼하다, 고통스러워하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지 사람들이 악했기 때문에 후회하신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저지르는 죄악의 대부분은 사람과 사람 사이, 즉 사람과의 관계에서 자행됩니다. 마음의 생각과 모든 계획이 악하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향해서가 아니라 모두가 다른 사람을 향해서 드러나는 죄악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마음과 그 마음에서 나오는 죄악을 이렇게 기술해두었습니다.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롬 1:29~31)
하나님께서는 땅과 하늘을 아름답게 만드시고, 그 안에 모든 생물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그 지어진 것을 보시고 기뻐하셨습니다. 또한 손수 지으신 사람을 거기에 두시고 매우 기뻐하셨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당신께서 만드신 땅과 사람을 향해 기쁨을 감추지 못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신 땅에서 번성하면 할수록 서로를 미워하고 죽이고 폭압했습니다. 장난감 때문에 싸우는 아이들로 인해 속상해하는 아비의 마음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하나님 아버지는 그 자녀들로 인해, 당신이 지으신 사람들로 인해 고통스러워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셨음을 후회하신 이유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기자는 하나님께서 심판을 선포하시는 이유를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부패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이었더라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11~13절)
땅이 부패했다는 말은 당시의 토양이 각종 폐기물이나 중금속 등으로 오염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사람들의 탐욕과 폭력으로 흘린 피가 그 땅을 더럽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인류를 전멸하는 데 그 목적이 있지 않습니다. 인간 본성 깊은 곳에 있는 포악함을 제거하기 위함입니다. 인간의 포악함은 그 자체가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인간의 정체성과 존엄성을 파괴하고, 나아가 인류를 파멸로 몰아가는 원흉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서 새로워지지 않으면 내면의 포악함과 그 포악함으로 인한 파멸에서 구원 받을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은 구원의 또 다른 면이기도 합니다.
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 네가 만들 방주는 이러하니 그 길이는 삼백 규빗, 너비는 오십 규빗, 높이는 삼십 규빗이라(14~15절)
노아의 방주는 하나님의 심판하심과 구원하심을 이어주는 연결고리와도 같습니다. 다시 말해 방주는 심판이 끝이 아님을, 심판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의 시작임을 알려주는 신호이자 약속입니다. 심판에 담겨있는 하나님 아버지의 깊은 심정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심판은 한낱 절대권력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무자비한 폭력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님들, 홍수 심판 때 노아를 부르셨듯 오늘도 여전히 고통 중에 계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8~9절)
의인이었기 때문에 노아를 부르신 것이 아니라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노아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아무런 죄악이나 흠결이 없었기 때문에 완전한 자가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했기 때문에 노아는 완전한 자로 살 수 있었습니다. 우리를 부르심도 마찬가지입니다. 완전하기 때문이 아니라, 의인이어서가 아니라 여전히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 마음 깊은 곳의 포악함을 제거하지 못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그 은혜를 힘입어 그 부르심에 응답하십시다. 천지를 지으신 능력의 손이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
1. 아들을 낳은 라멕은, 땅 위에서 수고하는 자들을 위로하는 자가 되라는 의미로 아들의 이름을 ‘노아’라 지었습니다(창5:28-29). ‘노아’는 ‘안위함’이란 뜻입니다. 라멕은 땅에서 수고하는 인간들을 위로 받아 마땅한, 가치 있는 존재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로부터 ‘용사’ 혹은 ‘유명인사’로 추앙받던 자들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네피림’ 지나지 않았습니다(4절). 히브리어 ‘네피림’은 ‘거인’이란 뜻과 동시에 ‘폭군’ ‘불한당’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평가와 인간의 평가는 이처럼 상이합니다. 오늘도 내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존경받고 유명인사로 대접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최우선시 하지 않을 경우, 하나님 보시기에 나는 ‘불한당’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렘2:19).
2.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실 때, 마지막 날 사람을 창조하시기까지 엿새 동안 심혈을 기울여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온 세상에 인간의 죄악이 가득 찼을 때, 하나님께서는 사람뿐만 아니라 온갖 짐승과 새까지 쓸어버리셨습니다(7절). 인간이 없다면, 이 세상의 그 무엇도 하나님께는 더 이상 의미가 없었습니다. 영국 사람들은 심프슨 부인을 이혼녀라 하여 싫어했고 더욱이 그녀와 결혼하기 위해서는 왕위를 포기해야 했지만, 심프슨 부인 없는 왕위란 전혀 무의미했기에 에드워드 왕이 미련 없이 왕관을 내버린 것과 같았습니다. 당신은 알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아니라면, 이 세상 만물을 버리실 정도로 오늘도 당신을 사랑하고 계십니다. 당신이 오늘 어떤 상황 속에 처하든, 자신에 대한 긍지로 의연해야 할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습3:17).
3. 세상이 아무리 어두워도 언제나 하나님의 의인은 있게 마련입니다(9절). 죄악의 세상에서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길이가 삼백 규빗(136.8m), 넓이가 오십 규빗(22.8m), 높이가 삼십 규빗(13.7m)되는 방주를 지었습니다(15절).
사람들은 흔히 방주와 관련, 두 가지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노아가족의 방주채류 기간이 40일이라는 것이 첫 번째 오해요, 방주 속의 삶은 마치 천국과 같았으리라는 것이 두 번째 오해입니다.
노아가족은 600년 2월 10일에 방주에 들어갔고(7:9-11), 601년 2월 17일에 나왔습니다(8:13-16). 노아가족은 무려 1년 17일 동안 방주에 있었습니다. 그 속에는 온갖 짐승과 새들도 함께 있었습니다. 매일 짐승과 새들에게 먹을 것을 공급하는 것은 노아가족의 몫이었습니다(20-21절).
그것은 견디기 힘든 중노동이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새와 짐승의 울음소리에 오물의 역겨움까지, 한 마디로 방주는 천국이 아니라 정신병에 걸리기에 안성맞춤인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노아식구는 그 속에서 1년 17일 동안 맡겨진 사명을 잘 감당했습니다. 그 비결은 방주의 구조였습니다. 그 방주의 유일한 창문은 천정에 뚫려 있었습니다(16절). 만약 노아식구들이 세상을 보았더라면 그들은 방주의 삶을 견디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천정에 난 창을 통해 오직 하나님만 우러러보았습니다. 그리고 인류의 중시조가 되었습니다.
오늘도 세상을 이기는 힘은 밑이나 옆에서 오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우러러 볼 때, 위로부터만 임합니다(골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