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싸움과 다툼의 근원
야고보는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만연한 시기와 싸움 및 다툼에 깊은 우려를 표합니다. 그리고 지혜와 총명이 있다고 주장하며 혀를 놀리는 자들에게, 그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라 땅 위의 것이자 정욕의 것이며 귀신의 것이라고 일갈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의 공동체와 나 자신을 돌이켜 보고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마음을 성결하게 하는 은혜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1-2)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야고보서 내용만으로는 그리스도인 공동체 안에 어떠한 갈등이 있었는지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렵습니다. 싸움, 다툼, 살인 등의 용어 때문에 신체를 사용한 폭력 행위가 있었다고 추론할 수도 있지만, 그렇다면 그 문제를 더욱 상세히, 그리고 엄격히 다루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야고보가 편지 내내 언급하는 부유한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갈등, 행함과 믿음에 대한 의견 차이, 그리고 그에 따른 언어의 오용 문제로 인한 공동체 내의 분쟁을 다루고 있다고 보는 편이 적절합니다. 게다가 야고보가 특정한 문제를 지적하고 그 잘잘못을 가리고 있지는 않기에 다양한 견해가 지닌 문제 자체보다는 그러한 주장을 하는 그리스도인의 자세와 태도에 더 관심을 기울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인 교회 내에서도 여러 가지 갈등이 나타나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소소한 분쟁이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다툼이 그리스도인의 미덕을 해하는 지경까지 이르도록 허용하면 허물이 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6장 7-8절 말씀에서 “너희가 피차 고발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뚜렷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그는 너희 형제로다”라고 한탄합니다. 믿음의 공동체 내에서는 차라리 불의를 당하고 속는 편이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 편보다 낫습니다. 내가 주장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의롭다고도 할 수 없고, 설사 자신이 옳다고 해도 한 지체가 다른 지체를 상하게 만드는 일은 어리석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손해를 보더라도 하나님이 일하심을 기다리며 가만히 기도하는 편이 그리스도인의 지혜입니다.
야고보는 이러한 싸움과 다툼이 나는 근원을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이라고 분명히 밝힙니다. 지체란 인간 개인의 몸으로 볼 수도 있고 교회의 구성원으로 볼 수도 있는데, 그 안에서 싸우게 만드는 정욕이야말로 갈등의 근본적인 원인이라는 말씀입니다. 싸움의 원인은 다른 곳에 있지 않고 바로 우리, 그리고 내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남을 비판할 것이 없습니다. 문제는 나에게 있습니다. 죄의 뿌리도 내게 있습니다. 내가 예수님과 같다면 싸우지 않고 다투지 않습니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는 말처럼 혹여라도 갈등이나 다툼 가운데 있다면 남을 지적하기보다는 나를 바라봐야 합니다. 그리고 과연 내게 어떤 정욕이 있기에, 내가 무엇을 즐거워하기에 이러한 문제가 발생했는지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정욕이라는 단어는 3절에서도 반복되는데 ‘헤도네’라고 하여 쾌락을 의미합니다. 이 단어는 쾌락 자체가 목적인 부정적인 즐거움을 말합니다. 여기에서 쾌락주의를 뜻하는 ‘헤도니즘(hedonism)’이라는 단어가 나왔는데, 현대사회의 큰 특징이 바로 이 쾌락주의입니다. 즉 쾌락을 충족하는 것이 절대선이 된 세태를 말합니다. 디모데후서 3장 4절은 말세란,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는 때라고 간단히 정의합니다. 하나님을 배제한 쾌락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약속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모든 것을 앗아갑니다. 그 쾌락은 성취해도 더 큰 쾌락에 목마르게 만들 뿐 참 만족을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시기하여도 취하지 못하기에 살인과 다툼과 싸움을 일으킵니다. 이 말씀은 다만 믿음 공동체 내에서만 아니라 인류 역사, 세상의 모든 영역에 적용됩니다. 하나님 없는 쾌락과 정욕을 위해 아무리 애를 쓴들 무슨 선한 결과가 있습니까? 오히려 나보다 더 좋은 것을 소유한 이들에 대한 독한 시기를 낳고, 그것을 빼앗기 위한 살인과 다툼만을 초래할 뿐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야고보의 말씀이 놀랍습니다. 너희가 얻지 못하는 이유는 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세상에서 얻기 위해 애를 쓰는 모든 것들도 우리가 구하기만 하면 하나님이 주신다는 뜻이지 않겠습니까? 기도만 하면 다 된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이러한 오해에 바로 제약이 들어갑니다.
(3)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우리는 구하여도 받지 못하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이유가 쾌락으로 쓰기 위해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구하여도 받지 못한 것이 있다면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든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1-33)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이자 즐거움이 되지 않는 한 우리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혹여라도 하나님이 아닌 대상에 욕심을 내고, 그것 때문에 시기하며 다투고 싸우고 있으시다면 야고보의 권면을 따라 먼저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하나님께 무언가를 구하는 기도의 자리에 나간 것만 해도 큰 발전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구하는 것을 주지 않으셨다고 기도를 멈추지 말고 계속해서 내가 진정으로 구하는 대상이 무엇인지, 어디에서 그러한 욕구가 나왔는지를 계속해서 살펴야 합니다. 그러면 내가 욕심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질투하고 미워했던 이유가 무엇인지 샅샅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렇게 기도하면서 하나님 아닌 대상을 하나씩 제하다 보면, “하나님, 지금까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했으니, 이제는 제발 마실 것, 먹을 것, 입을 것을 더하여 주시옵소서”라는 기도를 드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진정한 즐거움의 원천이 되시는 하나님을 깊이 누리는 기도를 드리게 될 것이고, 그 기도는 반드시 응답됩니다. 존 파이퍼라는 목사님은 본인을 기독교 희락주의자 또는 쾌락주의자라고 공공연히 말합니다. 기독교는 쾌락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가장 본질적인 쾌락이 하나님이심을 주장합니다.
(4-10) 주 앞에서 낮추라
(4)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야고보의 말씀은 참으로 강력합니다. 파괴적인 쾌락만 추구하면서 하나님께 구하지도 않고, 구해도 잘못 구하는 공동체의 사정을 생각하다 보니 여간 답답한 심정이 아니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간음한 여인들아! 하고 외칩니다. 여기에서 간음한 여인은 문자적으로 외도한 아내들을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신부가 된 교회가 남편인 그리스도를 두고 다른 대상에서 즐거움을 찾는 영적 상태를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벗됨이란 헬레니즘 세계에서 ‘영적으로 육체적으로 모두 하나가 되어 모든 것을 공유하다’는 뜻을 지닌 말이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아닌 세상과 벗된다는 말은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과 원수되는 세상과 연합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생명을 받았고 하나님의 형상을 입어 하나님과 교제하게 된 우리가 그 고귀한 사랑을 벗어 버리고 세상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모욕하고 원수 삼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연인이나 부부 사이에서도 상대방을 배신하고 바람을 피면 죽이려고 듭니다. 그 배타적인 사랑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간음한 사람들아! 라고 외치는 하나님의 음성이 우리 마음에 박혀야 합니다. 하나님이 무엇이 아쉬워서 우리를 이렇게 부르시는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 사랑이 얼마나 큰지 돌이켜 봐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영적으로 간음한 사람처럼 하나님도 사랑하고 세상도 사랑하는, 불가능한 줄타기를 하고 있지는 않았는가 살펴야 합니다.
(5)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
이 말씀은 야고보서뿐 아니라 신약 성경 전체에서도 난해한 구절로 꼽히는 구절입니다. 원문 자체가 모호한 측면이 많기 때문에 해석이 어렵습니다. 참고로 새번역 성경, 공동번역 성경, 현대인의 성경만 봐도 그 뜻이 다 다릅니다. 거기다가 영어 성경을 보면 훨씬 다양한 해석을 접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 시간에는 개역개정 성경이 택한 해석을 따라 그 의미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러한 입장에서는 우리 속에 거하시는 성령이 시샘할 정도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말씀을 헛된 것으로 여기지 말라는 엄중한 명령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깊이 사랑하시는지 삼위일체 하나님이 서로를 사랑하신 정도에 비견되고, 성령님이 시기하시기까지 한다는 가히 충격적인 말씀입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사랑한다는 고백을 받아도 가슴이 떨리고 내가 그 사랑을 받아도 되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 마련인데, 하나님이 하나님을 사랑하시는 것처럼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말씀은 얼마나 위대한 사랑 고백입니까? 이러한 감당할 수 없는 일방적인 사랑을 공연한 것으로 받지 말아야 한다는 강력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6)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참으로 놀라운 위로의 말씀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에게 감당할 수 없는 사랑을 제시하고 그 대가로 동일한 사랑을 내놓도록 요구하신다면 우리는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랑을 주신 것에 멈추지 않고 더욱 큰 은혜를 주셔서 그러한 사랑을 받을 수도 있고, 할 수도 있는 존재가 되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은 불가능한 것을 명령하시지 않는다. 명령하시는 하나님은 그것을 이룰 수 있는 힘 또한 우리에게 건네주신다”고 말했습니다. 고린도전서 4장 7절은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것처럼,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 역시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우리 능력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한다면 큰 착각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함조차 하나님이 주신 능력입니다. 사랑받을 수 있는 능력, 사랑할 수 있는 능력 모두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이 은혜에 대한 마땅한 반응은 겸손입니다. 쓰레기 같은 나라는 존재에게 이와 같이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주시느냐는 자기 낮춤이 당연히 일어나는 것입니다. 교만과 겸손은 성경의 주요 주제로서, 아담과 하와는 자신이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는 교만으로 사망을 불러왔고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없다는 겸손으로 생명을 낳으셨습니다.
(7)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따라서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알고 겸손해졌다면 일차적으로는 하나님께 복종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복종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본받아 하나님의 주재권 아래 자신을 둔다는 의미로서, 모든 일 가운데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자신을 헌신한다는 뜻입니다. 연인 사이에도 사랑하면 서로에게 종이 되고 싶어 합니다. 상대방의 생각과 감정을 미리 읽고 거기에 맞춰 움직이고자 합니다. 사람에게도 그러한데, 하나님께는 어떻겠습니까? 마땅히 하나님의 생각과 감정을 알기 위해 애를 쓰고 깨달은 대로 행동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복종은 마귀 대적과 이어집니다. 마귀는 사람을 하나님에게서 멀게 만들고 하나님께 복종하지 못하도록 유혹하고 거짓말을 합니다. 하지만 마귀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마귀는 우리에게 실제적인 위험을 줄 수 있는 것처럼 위협하지만 사실은 우리가 대적하면 피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를 꾀려는 마귀의 유혹을 의식하고 맞서십시오. 그러면 마귀는 달아나고 맙니다.
(8)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마귀를 대적하는 일은 또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일과 연계됩니다. 사랑의 가장 큰 특징은 언제, 어디서든 함께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멀리 계신 분이 아니십니다. 어느 때나 찾을 수 있으신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 얼마나 위대한 특권입니까!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믿는 자는 항상 자신을 반겨주시는 하나님께 언제든 나아가 교제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자신의 손을 깨끗이 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자신이 깨끗한지 살피고 더러운 것을 제해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에 한 발 걸쳐 놓은 듯한 두 마음을 성결하게 해야 합니다. 두 마음이라는 단어는 두 개의 라는 뜻과 영혼이라는 뜻이 조합된 형태로서, 한 입으로 두 말을 내고 교회 내에서 독한 시기로 인해 싸움도 마다 않는 그들의 이중적인 상태를 잘 보여주는 단어입니다. 야고보는 그들을 죄인이라고 칭하며 손과 마음을 깨끗이 할 것을 요청합니다. 우리 역시 말씀을 의지하여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되, 손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회복하는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9)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우리가 죄인임을 인정했다면 슬퍼하고 애통해야 합니다. 울어야 하고 근심해야 합니다. 한국 교회에 이러한 애통함이 많이 퇴색했습니다. 예전에는 생활이 어려워서도 울고, 믿다가 고난받아 울고, 민족을 위해 울었습니다만 이제는 그러한 울음이 많이 사라진 것 같습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을 속이지 말고 영적인 상태를 직면할 때 그에 따라 정직한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죄를 자각하고서도 이 세상의 쾌락주의자처럼 “내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자”(사 22:13)라고 말하며 슬픔과 울음을 피한다면, 하나님은 그 죄악을 결코 용서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10)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김환영 님의 ‘울 곳’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그 시는 이렇습니다.
할머니 어디가요? 예배당 간다.
근데 왜 울면서 가요? 울려고 간다.
왜 예배당 가서 울어요? 울 데가 없다.
이 시는 할머니로 대표되는, 예전에 기도하던 분들의 마음을 잘 담아냅니다. 더 이상 낮아질 곳이 없어 하나님 앞에 가서 눈물을 흘리고, 하나님 앞에 서기만 하면 눈물이 나왔던 모습은 어디로 갔습니까? 지금 우리는 어디서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까? 눈물을 흘리기는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야고보서 말씀을 무섭게 받아들이며 주 앞에서 영적 가난을 깨닫고, 하나님의 도움이 없으면 살 수 없는 존재임을 의식하고 겸비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 눈물을 닦으시고 높여주실 것입니다. 우리를 넘어뜨리고 유혹하려는 행악자들이 많고, 또 우리 안에도 그런 정욕이 때로 꿈틀거립니다. 하지만 그러한 목소리에 ‘나를 떠날지어다’라고 강력히 선포하고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낮추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야만 내가 살고, 가정이 살고, 교회가 살고, 나라가 사는 은혜가 있을 것입니다.
야고보가 야고보서를 통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전했던 이유는 당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이신득의(以信稱義)의 교리가 그릇된 인식으로 말미암아 행함이 없는 믿음 생활로 이어지는 것을 막고, 세속화되고 자기 합리화의 수단이 되는 것을 막고자 함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야고보가 이행득의(以行稱義)를 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참된 믿음이 아님을 강조한 것입니다. 3장 13절부터 5장 6절까지는 세속적 가치관에 기인한 행동을 멀리하고 행함이 있는 믿음 생활을 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서로 비방하지 말라(11-12절)
본문의 주제 역시 하나님을 가까이하여 한마음을 품고 겸손하게 살아간다면 해결될 일들입니다.
11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한마음을 품고 겸손하게 살아간다면 성도가 서로 비방하거나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서로 비방하고 판단하는 행위는 1절의 표현대로 일종의 싸움과 다툼입니다. 싸움과 다툼은 정욕과 욕심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정욕과 욕심은 마음의 교만에서 발생합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형제를 비방하고 판단하는 일은 상대보다 자신이 우월적 존재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서로 비방하고 판단하는 사람은 자신이 상대보다 경험과 지식의 수준이 더 높거나 하나님의 법을 더 잘 알고 더 잘 지킨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형제를 비방하고 판단하는 사람들의 행위는 곧 율법을 판단하는 행위라고 합니다. 율법을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율법의 재판관이어야 합니다. 누가 율법의 재판관이 될 수 있겠습니까? 12절이 율법의 입법자와 사법권자가 누구인지를 알려줍니다.
12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외에 누구도 율법의 입법자와 재판관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판단하여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십니다. 하나님 외에 누구도 사람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는 말은 ‘너는 이웃을 판단할 자격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는 ‘너는 형제를 비방하거나 판단함으로 율법의 재판관이 되려고 하지 말라’는 메시지입니다. 형제를 비방하고 판단하는 사람은 곧 하나님이 되려고 하는 교만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2장에서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법이 ‘최고의 법’임을 기억하며 형제를 사랑해야 합니다.
허탄한 자랑을 하나니(13-17절)
13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13절부터 17절까지 말씀은 인생을 자기 계획대로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들에 대한 책망입니다. 구체적으로 사업을 통해 이익을 얻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그 대상입니다. 단순히 생각해 보면, 다른 지역에 가서 일정 기간 머물며 장사하려는 사람에게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야고보가 ‘들으라’ 그리고 무엇을 하는 ‘자들아’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이들은 자기 나름대로 사업 계획을 세우고 성공의 확신을 가졌으나 가장 중요한 요소가 빠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위한 간구가 없습니다. 우리는 잠언 16장 9절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잠13:9)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성도가 자기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사업 계획을 잘 세워 성공을 확신하더라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없다면 헛된 계획을 세우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사업을 하든 무슨 일을 하든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최우선으로 고려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마치 율법의 재판관이 되려는 것처럼 인생의 주인이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울 때 고려해야 할 점을 14절이 알려줍니다.
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우리가 내일의 계획을 세울지라도 내일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습니다. 내일이 오기 전 오늘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잠언 27장 1절에 이와 유사한 말씀이 있습니다.
(잠27:1)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
우리는 오늘 하루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습니다. 야고보는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라고 물음으로써 오늘 이 땅에서 인생살이가 끝날 수 있음을 명심하라고 합니다. 우리의 인생은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처럼 한순간 있다가 사라질 수 있습니다. 사람은 유한한 존재입니다. 지금 내가 보고 듣고 생각하고 느끼고 있다고 해서 평균 수명까지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희망 사항일 뿐입니다. 야고보는 인생은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로 비유하였지만, 성경 여러 곳에서 인생은 ‘꽃과 같이 자라나서 시들며 그림자 같이 지나가며’(욥14:2), ‘한 뼘 길이만큼’ 짧고(시39:5), ‘풀과 같다’(벧전1:24)고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런 존재인 우리가 내 인생을 내 계획대로 실행할 수 있다는 생각은 교만한 생각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 있는 존재라고 생각한다면 겸손한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겸손한 삶의 자세가 무엇이겠습니까? 15절이 알려줍니다.
15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도리어 말하기를’, 그리고 ‘할 것이거늘’은 자기 계획대로 살아가지 말고 이런 마음으로 살라는 권면입니다. ‘이런 마음’이란 ‘주님의 뜻이면 우리가 생명을 유지할 수 있고 이것저것을 할 수 있습니다’는 마음입니다. 우리는 이런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런 마음은 두 마음이 아닌 한마음입니다. ‘주님의 뜻이면 오늘 일도 할 수 있고 내일 세운 계획도 이룰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좋은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신 내용입니다.
(눅22:42)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며 기도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는 기도가 틀릴 수 있기에 언제나 마무리는 내 뜻대로가 아닌 하나님의 뜻대로 되기를 원해야 합니다. 인생의 계획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최우선이 되어야 합니다. 비록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몰라 확신이 없을지라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이루어지지 않게 하시옵고 하나님의 뜻이라면 저의 걸음을 인도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16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16절과 17절은 13절에서 호칭한 사람들에게 전하는 결론의 말씀입니다. ‘허탄한 자랑’은 원형의 뜻을 고려하면 ‘오만한 태도의 자랑’입니다. 오만한 사람은 자랑할 것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자랑은 허탄한 자랑일 뿐입니다. 그 자랑은 하나님을 배제한 마음에서 나온 자랑이므로 악할 뿐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자기를 드러내기 위해서 자랑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자랑은 무엇인지를 하나님께서 친히 알려주셨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입을 통해 전해 주셨습니다.
(렘9:23-24)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우리가 자랑할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께서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행하시는 분이심을 깨달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자랑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을 깊이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밝히신 성경을 묵상해야 합니다.
17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
자신을 드러내는 자랑이 악인 줄 알았다면 그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해야 합니다. ‘선을 행함’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행함입니다. 그것을 본문에서 찾아본다면 ‘나의 인생을 하나님께서 주관하심’을 인정하며 살아가는 일입니다. 그리고 예레미야 선지자의 입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누구신지를 자랑하는 것’과 ‘하나님께서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행하시는 분이심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자랑이란 입으로 그리고 삶으로 하나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선을 행함입니다. 야고보는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알고도 하나님의 뜻을 삶으로 전하지 않으면 행함이 없는 믿음이며, 죽은 믿음이며, 죄가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도 선을 행하고 있는지를,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자신을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형제를 비방하고 비판하는 습관이 있는지, 내일이나 미래의 계획을 자기 마음대로 세우는지, 그리고 은연중이라도 자신을 드러내는 자랑을 하는지를 점검해 보십시다. 오늘 하루 말씀을 거울로 삼아 자신의 마음을 보고, 두 마음을 품지 않도록 오직 하나님만을 생각하고 선을 행하며 살아가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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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행함입니다. 믿음을 여러 단어로 정의할 수 있지만, 우리가 현재 묵상하고 있는 야고보서를 통해 더욱 절실히 깨닫는 사실은 믿음은 바로 행함이라는 것입니다. 소망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안에 어떤 소망하는 것을 주셨다면, 그 소망하는 것을 향해서 걸어가는 나의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소망한다 말하며 절망하는 삶을 산다면 그것은 진정으로 소망하는 사람의 모습이 아닐 것입니다. 사랑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안에 사랑이 있다면, 그 사랑은 표현하는 것입니다. 아니 표현될 수밖에 없습니다.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사랑합니다.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 남자는 그녀에게 사랑한다고 말해 주어야 합니다. 표현하지 못하는 사랑은 비 내리지 못하는 구름과도 같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을 간직한다 하더라도 행함으로 보여주지 못한다면 그 사랑은 결실을 맺기 어려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정확한 표현을 드리자면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분의 사랑은 태초 이전부터 시작되었고 지금도 사랑하고 계시며, 앞으로도 영원히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십자가의 고난이 두렵고 떨렸지만, 주님이 피하지 아니하시고 당당히 걸어가셨던 이유도 그만큼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2천 년이 더 지난 지금. 지구의 정반대 편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 성령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주님을 ‘My Lord My God’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 고백하게 되었고, 세상 사람들이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우리는 주님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의 행함을 통해서 이루어주신 것입니다. 그만큼 ‘행함’은 우리 신앙에 있어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아주 중요한 믿음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믿음은 인내와 순종을 통해서 더욱 굳건한 신앙으로 성장해 나갑니다.
이러한 행함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순종을 통해서 반응하며 나아가는 믿음의 행함입니다. 아브리함은 창세기 22장에서 자신의 아들인 이삭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제단에 바쳤습니다. 100세가 되어서 얻은 귀한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음으로 순종함으로써, 결국 의롭다(약 2:21)는 여김을 받았습니다.
두 번째는 오늘 본문에서처럼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일을 하지 않는 행함입니다. 우리는 십계명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친수(親手)하셔서 우리에게 적어주신 하나님 사랑과 사람 사랑의 결정판입니다. 그런데 이 십계명도 하나하나 구분해 보면 결국 ‘~하라’라는 것과 ‘~하지 말라’는 계명으로 나누어집니다. 주지의 사실대로 십계명에는 하나님께서 ‘~하라’고 명하신 것보다, ‘~하지 말라’고 명하신 숫자가 더 많습니다. 이와 같은 수치는 유대인들이 율법서에 있는 613개의 계명들을 나누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렇듯 우리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금하는 명령들이 실은 더 많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순종하여 행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께서 NO라고 말씀하신 것을 단호히 거부할 줄 아는 용기 또한 필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하지 말아야 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첫 번째는 세상과 벗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본문 4절입니다.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혹시 여러분들에게 용서할 수 없는 존재가 있으십니다. 원한이 맺힐 정도로 여러분에게 해를 끼친 사람이나 집단이 있으십니까? 우리는 그런 대상을 보통 원수라고 표현합니다. 그런 대상을 생각할 때 마음이 평안해지거나 은혜가 넘치는 분은 아마도 안 계실 겁니다. 오히려 화가 나고 분이 삭히지 않아서 힘든 시간을 보내야 할 것입니다.
공의의 하나님에게 있어서 세상은 바로 그와 같은 존재입니다. 우리의 분함과 화남은 비견할 수 없을 만큼, 악에 물든 세상을 하나님은 거부하십니다. 왜냐면 그분은 선 그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시면서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을 그리워하신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왜 너희들은 내가 너희 안에 영으로 임하고 있음에도, 나를 바라보지 못하고 세상을 바라보고 있느냐’ 하시며 한탄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세상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코스모스’는 성경 속에서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는데,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원리 원칙과는 반대되는 법칙들이 지배하는 장소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말씀과 반하는 법칙들이 너무나도 당연히 통용되고 있는 현 사회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서로 비방하지 말라 하십니다. 새번역성경을 통해서 보면 ‘헐뜯지 말고 심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울인 시절에 그리스도인들을 잡으러 다메섹 도상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때 우리 주님으로부터 음성이 들려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실상 사울은 예수님을 박해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잡으러 가던 중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박해하는 것이 곧 나를 박해하는 것이다’고 동일시하셨습니다. 사랑하는 교우님. 우리가 살다보면 때로는 주위의 지체들을 비방하거나 헐뜯고 정죄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그럴 수밖에 없는 우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우리들에게 예수님은 오늘 ‘그들에게 하는 것이 곧 나에게 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며 도전하고 계십니다.
마지막으로는 허탄한 생각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허탄한 생각이란 무엇일까요? 본문 13-14절을 새번역으로 제가 읽겠습니다.
"오늘이나 내일 어느 도시에 가서, 일 년 동안 거기에서 지내며, 장사하여 돈을 벌겠다" 하는 사람들이여, 들으십시오.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버리는 안개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일 일도 알지 못하면서 일 년을 계획 세우는 것, 잠언 27장 1절의 말씀 인용하자면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처럼 오늘 하루 어떤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미약하고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하나님을 등한시 한 채 내일 일을 말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잠깐 있다가 사라질 안개임을 인식하지 못한 채 허탄한 자랑을 하며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한 허탄한 자랑을 오늘 본문 16절은 악이라 말하고 있고, 더불어 선한 일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하지 않으면 그것은 죄라고 하십니다.
야고보서 4장 본문을 통해 함께 생각해 보고 싶은 것은 세상과 벗하지 말고, 서로 비방하지 말고, 허망한 자랑을 하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을 아담은 어기고 죄 앞에 무너지고 말았는데, 예수님께서는 그 과정을 어떻게 이겨내실 수 있으셨나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늘 말씀에 비추어보면, 7절의 말씀처럼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입니다.(7절)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8절) 그리고 하나님 앞에 낮아지는 것입니다.(10절) 본문은 계속해서 이어갑니다. 11절에 입법자와 재판관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겁니다. 그리고 구원을 베푸시는 분 역시 내가 아니라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이것 은 바로 하나님을 아나블레포, 올려다보며 살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만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바른 믿음의 행함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더불어 본문 14절의 말씀처럼, 우리는 우리의 존재의 이름인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면 우리가 우리의 실존을 확인하고 인정했을 때, 비로소 영원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두 눈을 통해 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하루 하나님을 의식하시고 아나블레포 하시며, 실상 우리는 안개와도 같아서 금세 사라지고 마는 아무 의미 없는 존재임을 잊지 않는 복된 하루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런 하찮은 존재인 우리임에도 불구하고 천하보다 더 귀하게 여기주시고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이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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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변화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사람은 변화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십니까? 변화된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자신에게 있어 무엇이 변화 되셨습니까? 그리고 변화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자신의 무엇이 변화되지 않고 있습니까?
“1%의 변화도 변화다.” 사람은 그렇게 조금씩 변화되는 것임을 말씀해주는 것입니다. 이 말에 반대하지는 않습니다. 도저히 끊을 수 없었던 담배를 끊고, 그토록 즐기던 술을 입에도 대지 않게 되는 것 또한 변화라면 변화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변화는 그런 외적인 행위의 변화만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본질적인 변화를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물론 이 본질적 변화에는 우리의 어떠한 공로나, 조건, 자격이 없습니다.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새로운 피조물로의 본질적 변화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본질적 변화를 경험한 우리에게 그 변화의 성품이 흘러나와야 옳지 않습니까. 세상 사람과는 무언가 다른 변화의 흐름들이 나타나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과연 그렇습니까?
욕을 먹을 때로 먹어서 이제는 감각이 무뎌진 한국교회는 둘째 치고, 우리 모두가 선망하고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초대교회의 모습은 어떠했을까요?
사도들의 생명력 있는 말씀, 초자연적인 기적과 능력, 임박한 종말 사상으로 인해 땅의 것을 넘어 영원을 목적 삼는 당시의 살아있는 신앙 등. 초대교회는 분명히 놀라운 은혜의 시대였음은 두말할 나위 없었습니다. 그랬던 초대교회의 모습은 과연 어떠했을까요?
지금 야고보 사도가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편지하고 있습니다. 그 편지의 내용이 믿음의 선한 싸움을 힘겹게 싸우는 데에 대한 위로의 내용이 아니고, 세속의 것을 내려놓는 삶을 살아내고 있는 데에 대한 격려의 내용도 아니고, 서로 돌봄과 섬김의 삶을 살고 있는 것에 대한 응원의 내용도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정반대입니다.
왜 그렇게도 싸우냐는 것입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살인하며 까지, 시기하며 까지 욕심을 내며 다투고 싸우느냐는 것입니다. 본문 1절의 싸움으로 번역된 ‘폴레모스’는 원래 적을 무찌르기 위해 무기를 가지고 공격하는 전쟁을 의미합니다. 야고보 사도가 보기에는 교회 현장은 전쟁터입니다. 서로 할퀴고 찢고 뜯기고 피가 터지는 무시무시한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것이 교회의 실상이었습니다. 이는 오늘날 한국교회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야고보 사도가 눈떠 보고 있는 초대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초대교회 내에 성추행, 간음의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4절, 고전5장). 그리고 서로 비방하고 판단하며 수군거립니다. ‘악플’로 사람을 죽이는 오늘날이나, 말로 사람을 죽이는 초대교회나 다를 바 하나 없습니다.
또한 당시 무역업이 번창하던 때에 발맞춰 부의 축적에 혈안이 된 그리스도인들도 상당수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다른 그 무엇보다도 경제적인 부, 즉 돈이 최고의 가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본문 13절의 말씀처럼 ‘어디 가서 장사를 해야 돈을 많이 벌까’만 궁리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부유한자와 가난한 자의 차별이 공공연하게 일어났습니다(약2:2-4). 그들에게는 주님의 말씀도, 주님의 뜻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습니다. 말은 예수 그리스도가 삶의 목적이요 목표라 하지만, 실상은 허탄한 자랑을 일삼는 것이 그들의 유일한 삶의 목적이요 목표입니다(15-16절).
이는 이제 갈 때 까지 간 한국교회의 모습이 아니라,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생명의 말씀이 생생하게 살아있던 초대교회,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은 찰나의 인생을 넘어 영원에 잇대어 살아가는 삶을 시작했던 초대교회,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내 것이라 하지 않고 아름다운 나눔의 삶을 꽃피웠던 초대교회, 그 초대교회의 실상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는다고 하지만 삶의 주인이 진정 누구입니까? 우리의 삶에도 싸움과 다툼이 비일비재 하지 않습니까. 그 싸움과 다툼은 실로 모두 나의 지독한 욕심과 고집, 이기적인 자기 사랑 때문이지 않습니까. 우리 안에도 욕망과 음란으로 우글거림이 가득하지 않습니까. 돈 때문에 좋았다가 슬펐다가, 그 놈의 돈이 내 삶을 주인노릇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한국교회가 문제가 아니라, 초대교회가 문제가 아니라, 바로 ‘나’. ‘나’가 문제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아버지라 믿고 부르는,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주인이요 그리스도라 믿고 부르는 바로 ‘나’가 문제 아닙니까.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놀라운 본질적 변화를 믿고 말은 하고 있건만, 왜 우리의 삶의 실상은 이토록 끔찍합니까.
우리는 어찌해야 합니까?
유일한 길이 있습니다. 본문 9절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9절)
야고보 사도는 그 놀라운 은혜의 시대 한 복판에서도 여전히 변화되지 않고 옛 것을 주물럭거리며 정욕으로 살아가고 있는 초대교회 성도들을 향해 슬퍼하랍니다. 애통하랍니다. 울랍니다. 저는 이 반복되어지는 세 단어를 한 단어로 이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비통함’
우리가 사는 길은 비통함입니다. 비통해야 합니다. “주님, 새로운 피조물 된 나의 모습이 여전히 이 모양입니다. 참으로 죄악 된 내 모습이 마치 죄짱아찌 같아만 보입니다. 어찌 이토록 소망이 없습니까.” 이렇게 비통해야 합니다. 그 비통의 자리에서 주님을 깊이 만나게 됩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먼저, 우리를 향해 비통해 하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나 자신을 향해 비통해 하셨습니다.
눅23장 34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언제 주님 앞에서 죄악 된 자신을 끌어안고 비통해 하셨습니까? 마지막으로 비통해 하신적은 언제 이십니까? 나를 향해 비통해 하며 절규하며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깊이 만나신 적은 언제 이십니까?
초대교회가 “어찌할꼬”의 비통함으로 시작되었던 사실을 기억하십시다. 그 초대교회가 “어찌할꼬”의 비통함이 잦아들면서 욕망의 아우성치는 소리로 가득하게 된 현실도 기억하십시다. 그래서 신앙은 날마다 주님 앞에서 “어찌할꼬”의 비통함으로 엎드려야 하는 것임도 기억하십시다. 그래야 시들지 않고 청정해지며, 그래야 그리스도인다운 변화의 향기가 피어 퍼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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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에는 항상 싸움과 갈등이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싸움을 그치려면 우리가 무엇을 가까이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가까이 하는 것에 영향을 받고 영향을 줍니다 어떤 친구를 가까이 하느냐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습니다. 돈을 가까이 하는 사람은 얼굴이 황금과 같이 노래집니다. 겜을 가까이 하면 겜에 나오는 케랙터를 닮아갑니다. 음란 동영상을 가까이 하면 눈이 음심이 가득한 똥개와 같습니다. 이런 것을 가까이 하면 공동체에 싸움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성경을 가까이 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예수님을 가까이 하면 우리는 예수님을 닮아가고 우리는 점점 영광스럽게 변화됩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나를 도와주십니다. 하나님 나라가 우리의 공동체에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있을까요?
1절을 보십시오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우리 주위에는 싸움이 많습니다. 개인의 내면 안에서 싸움도 있고, 개인과 개인의 싸움도 있고, 개인과 집단의 싸움도 있고, 집단과 집단의 싸움이 있고, 인간과 자연의 싸움도 있습니다. 이런 싸움 때문에 많은 인명이 죽고 자연이 파괴를 당합니다. 우리는 이런 싸움이 일어나면 상대방에서 문제를 찾고 상대방에게 책임을 전가합니다. 부부간에 갈등이 일어나면 대부분 상대 때문에 싸운다고 생각하고 이혼하면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생각합니다. 교회의 갈등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안에서 사람과 갈등이 있으면 그 사람을 떠나서 해결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야고보 선생은 싸움의 원인이 다른 사람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바로 나 자신 때문에 일어난다고 합니다. 나의 내면에 있는 정욕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정욕은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욕망입니다. 정욕은 분수를 넘어서는 지나친 욕심입나다. 싸움은 지나친 욕심 때문에 생겨나는 것입니다. 욕심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식욕이 나쁜 것이 아니라 건강한 것입니다. 지나친 식욕이 문제인 것입니다. 자나친 식욕이 비만을 부릅니다. 자연 파괴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지나치게 자연을 착취하며 환경오염을 시키고 환경을 파괴 시키고 있습니다.
야고보 저자는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에서 싸움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공동번역에는 지체 안에서 갈등을 일으키는 욕정에서 라고 나옵니다. 지체는 몸의 각 부분을 의미합니다. 우리 각 개인은 몸 전체를 이루는 지체와 같다는 것입니다. 개인이 공동체에 대한 지체의식이 없고 이기적인 욕망을 추구할 때 싸움이 일어납니다. 암은 다른 세포는 생각지 않고 자기만 키우는 이기적인 세포입니다. 암세포가 사람을 죽이듯이 이기적인 존재가 공동체를 파괴시킵니다. 대부분의 싸움은 자기만 잘되기를 바라고 남은 망하기를 바라는 데서 일어납니다. 많은 사람들이 남은 망하고 나만 잘되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남이 망하면 나도 망하는 것입니다. 눈이 아프면 손발도 제대로 기능을 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손발은 눈이 잘되기를 바래야 합니다. 한국 경제가 망하고, 동양의 경제가 망하면 서양의 경제도 위험합니다.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에 대공항이 일어났습니다. 대공항의 원인은 빈부 격차에 있습니다. 잘 사는 사람은 잘 사는 데 못사는 사람은 더욱 못살았습니다. 중산충이 무너지자 소비자가 없어지고, 소비자가 없어지자 공장에서 만드는 물건이 팔리지 않고 공장에서 만드는 물건이 팔리지 않자 공장이 문을 닫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주가가 폭락하고 세계경제가 어려워졌습니다. 이런 대공황이 2차세계대전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대기업이나 공기업으로 부가 편증되는 것도 심각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남이 잘되는 것이 내가 잘되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싸움이 그치고 모두가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북한이 잘되는 것이 남한이 잘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남북의 싸움을 극복하는 길입니다. 자연이 잘 되어야 인간도 잘 됩니다. 인간 이기주의를 극복해야 환경을 보호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나는 망하더라도 남이 잘되기를 바라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지체는 자신이 몸을 살리는데 방해가 될 때는 자신을 과감히 희생합니다. 팔이 썩어 들어가면 몸을 살리기 위해서 팔을 자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자신은 망해도 우리가 잘 되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그때 우리는 공동체의 갈등을 극복하고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남편은 나는 망해도 아내는 잘되기를 바라고, 사장은 나는 망해도 노동자는 잘되기를 바라야 때 가정과 사회가 살아나고 함께 잘 살게 됩니다. 아내와 노동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야 공동체가 하나가 됩니다.
2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야고보는 우리가 기도의 응답을 받지 못하는 것도 욕심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우리 가운데 얻고자 하는 재화는 적고 얻고자 하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사람들은 더 많이 얻고자 하여 욕심내고, 시기하고, 다투고, 싸우고, 심지어는 죽이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면 결국은 상대도 망하고 자신도 망하고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가 이것을 얻으려면 나의 노력으로 얻으려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주시도록 기도해야합니다. 하나님은 구하는 자에게 주십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아버지는 떡을 달라면 돌을 주지 않으십니다. 생선을 달라는데 뱀을 주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가장 좋은 독생자도 주시고 생명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까지 아낌없이 주셨는데 다른 것을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우리는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일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아버지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도 생각하며 공동체의 유익이 되는 일을 구해야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그런데 기도해도 못 얻는 사람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3절을 보십시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야고보 사도는 기도해도 얻지 못하는 것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정욕으로 구하는 것은 남이야 어떻든 나만 잘되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려 이기적으로 구하는 것입니다. 구하는 동기가 잘못된 것입니다. 한 여자가 유부남을 좋아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유부남과 결혼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이는 욕심으로 구하는 것입니다. 그의 기도가 이루어지면 유부남은 이혼해야 하고 가정이 파괴됩니다. 한 흑인 소녀가 백인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는 아무리 기도해도 백인이 되지 않았습니다. 키 작은 사람이 더욱 키가 크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잘 먹어도 어느 정도 크고 더 이상 키가 크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아버지, 어머니가 키가 작기 때문입니다. 이는 욕심으로 구하는 것입니다. 이들의 기도가 응답되면 이 세상은 백인만 있고 키 큰 사람만 있는 재미 없는 세상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속에서 기도해야 합니다. 탐심보다는 하나님이 주신 것을 감사함으로 기도해야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기도해야합니다.
4절을 보십시오.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야고보 선생은 다툼은 이기적인 탐심에서 나온다고 하였습니다. 이기적인 탐심을 가진 사람이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야고보는 이들을 간음한 여자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간음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떠나서 세상을 사랑하는 절조 없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신랑이고 우리는 신부입니다. 세상은 또 다른 신이고 또다른 남편입니다. 세상과 벗되는 것은 세상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자들은 하나님보다 세상이 좋아 보입니다. 세상의 쾌락이 좋고 돈이 좋고 자기를 자랑하는 것이 좋습니다. 세상에서 술 마시고 나이트 클럽에 가는 것이 좋아 보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 보이고 신앙생활하는 자신은 초라해 보입니다. 세상 드라마나 개그맨들이 좋아보입니다. 어떤 아줌마는 이승기가 좋아서 온 방안에 이승기 사진을 붙여놓고 설거지 하는데도 이승기 사진을 붙여놓았습니다. 이승기를 보아야 힘이 난다고 하였습니다. 어떤 분은 소녀시대나 원더걸스가 좋아보입니다. 광주의 어느 가정을 둔 약사는 약을 팔며 매일 텔레비전을 보았습니다. 그는 소녀시대의 여자들이 좋아보이다가 교회에 나오는 한 여학생을 짝사랑했다고 합니다. 기도하면 이 자매가 계속 나타났다고 합니다 이렇게 세상을 사랑하면 하나님은 싫어집니다. 말씀공부가 싫어지고, 예배가 부담스러워 집니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들에 대해서 분노하십니다. 이런 자들이 공동체의 싸움을 일으킵니다.
5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성령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면 우리 안에 성령님이 오십니다. 성령은 우리가 세상을 사랑할 때 시기하십니다. 우리가 음란하고 돈이나 쾌락을 우상숭배할 때 우리를 미워하시고 분노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의 죄에 대해서 징계하십니다. 진정한 사랑은 죄에 대해서 분노하는 것입니다. 남편이나 아내가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는지 하지 않는지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 하나는 다른 사람과 바람을 피울 때 반응을 보는 것입니다. 아내가 남편을 제쳐두고 다른 사람과 바람을 피울 때 분노가 나는 것이 정상적인 사랑입니다. 이런 시기와 분노는 다른 사람이 망하기를 바라고 자기만 잘 되기를 바라는 병적인 시기심과는 달리 건강한 시기심입니다. 건강한 부부관계를 유지하고자 하는데서 오는 분노입니다. 상대방이 잘 되도록 사랑해서 분노하는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에 기초한 분노입니다. 그런데 아내가 바람 피는 것을 보면서도 허허 웃는 남편이 있다면 이는 진정 사랑하는 것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은 가정을 파괴하는 사람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지으면 분노하십니다. 분노 속에도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 있습니다. 하나님은 축복 속에서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고난 중에서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어떤 가운데도 우리를 변함없이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항상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해야합니다. 우리가 이런 사랑을 알 때 우리 주위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보입니다. 다른 사람도 사랑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사랑하는 자에게 천대까지 은혜를 주십니다. 욥은 재산을 잃고 자녀를 잃었습니다 심지어 건강까지 잃었습니다. 욥은 이런 일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원수같이 여기는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욥이 받는 고난은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어떤 고난이 있어도 그의 믿음이 변치 않을 것을 믿는 사랑과 신뢰에서 나온 고난입니다.
6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기 원하십니다. 더욱 큰 은혜를 주시기 원하십니다. 우리를 복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공동체가 평화롭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큰 복을 받으려면 복을 받을 만한 그릇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복받는 그릇은 겸손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깊이 발견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나 같은 자를 쓰시는 것에 대해서 크게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나보다 다른 사람이 더 훌륭하게 보이는 사람입니다. 교회사에 18세기에 전세계의 부흥을 일으킨 두 분의 사역자가 있습니다. 조지 휫필드와 요한 웨슬리입니다. 조지 휫필드는 칼비니즘으로 하나님의 주권과 선택을 강조하였습니다. 요한 웨슬리는 알미니즘으로 인간의 자유와 책임을 강조하였습니다. 둘은 논쟁도 하였습니다. 어떤 교인이 조지 휫필드에게 웨슬리가 천국에서 볼 수 있을까요? 라고 말하였습니다. 아니요. 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질문한 사람은 신이 나서 말했습니다. 그렇지요. 알미니안주의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지요. 그러자 휫필드가 말했습니다. 오해하셨군요. 웨슬리는 너무 훌륭하여 주님께 가까이 가지만 나는 너무 부족하여 그곳에 갈 수 없다는 말입니다. 참으로 멋있는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해야합니다. 겸손한 사람은 하나님은 크게 보이고 나는 작게 보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크게 보이고 세상은 만만하게 보이는 사람이 겸손한 사람입니다. 겸손의 크기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부어 주실 수 있는 그릇의 크기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자신을 자랑합니다. 내가!- 내가!-라고 나를 자랑합니다. 그러면 교만해진 것입니다. 지구촌 교회를 담임하였던 이동원 목사는 아내에게 이렇게 부탁했다고 합니다 내가 메시지에서 나를 자랑하면 한 눈을 가려달라고 하였습니다. “두 눈 뜨고 못봐주겠네” 그래도 모를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는 손으로 손바닥을 뒤집어 달라고하였습니다. “지랄하고 자빠졌네” 이렇게 하는 자가 겸손한 자입니다.
7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겸손한 사람은 하나님께 순종합니다. 우리는 순종의 삶을 살아야합니다. 베드로는 젊은 자들아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보내신 분들에게도 순종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십니다. 겸손한 사람은 마귀를 대적합니다. 하나님은 마귀보다 더 크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마귀를 물리칩니다. 우리도 마귀를 대적해야 합니다. 마귀에게 분노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영적권세로 대적해야 합니다. 우리가 똥개가 방안에 들어오면 어떻게 합니까? "이 개새꺄 나가!" 소리쳐야 합니다. 그래야 나가지 그렇지 않고 웃으면서 "개야, 제발 나가다오" 사정을 해도 나가지 않습니다. 우리는 영적 권세를 가지고 사단에게 분노하며 대적해야 합니다. 사단의 역사에는 노우!라고 단호히 말해야합니다. 그러면 사단을 이길 수 있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이 말씀은 오늘 요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가까이 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가까이 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도와주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가까운 자녀들처럼 우리를 사랑하시고 돌보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은 최고의 축복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가까이 하시면 하나님이 우리를 가까이 하시고 우리 안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집니다. 우리 마음에 평안과 기쁨과 자유가 찾아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의 삶에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복을 주십니다. 공동체가 화목하게 하십니다. 하나님 안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과 가까이 해 주십니까?
하나님은 자신을 가까이 하는 사람과 가까이 해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가까이 하는 것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항상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함으로 기쁨을 느껴야 합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며 기도하는 시간을 사랑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 자신을 좋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좋은 걸 어떡합니까?"라는 찬송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생활입니다. 주일 말씀이 기다려지는 사람, 말씀을 들을 때마다 새로운 것이 깨달아 지는 사람, 말씀이 꿀송이처럼 달게 느껴지는 사람들은 모두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관심갖는 것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잠언에 나오는 것처럼 하나님의 마음을 마음 판에 새기는 사람이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하나님이 친히 공동체에 평화를 주십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가까이 한 사람은 아브라함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벗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벗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무슨 일을 하든지 항상 함께 하여주셨습니다. 모세도 하나님을 가까이 하였습니다. 모세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다 준행하여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었습니다. 하나님과 대면하여 사십일을 두 번이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모세를 가까이 하시고 그에게 십계명을 주시고 여러 기적을 나타내게 해주셨습니다.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과 가까이 하려면 손을 깨끗이 해야 합니다. 손을 깨끗이 하는 것은 죄를 회개하는 것입니다. 두 마음을 회개하고 한 마음을 품고 하나님을 사랑해야합니다. 탐심을 회개해야합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을 회개해야합니다. 교만한 마음을 회개해야합니다. 음란한 마음을 회개해야합니다. 마음을 성결케 해야 합니다. 성결케하는 것은 마음을 순수하고 정결하게 갖는 것입니다. 사심을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룩하면 하나님을 가까이 하게 됩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을 가까이서 사랑하면 하나님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돌봐 주십니다.
9, 10절을 보십시오.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자신의 죄를 발견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갈수록 자신의 죄가 크다는 것을 압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죄를 슬퍼하며 애통하며 우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슬퍼하는 것으로 슬퍼해야합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입니다. 하나님은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을 기뻐 받으십니다. 우리는 우리 죄를 인하여 애통하며 울어야 합니다. 우리의 탐욕 교만 세상을 사랑하는 죄를 회개해야합니다. 마음에 찾아오는 불신과 불순종을 회개해야합니다. 불평과 원망을 회개해야합니다. 마음에 탐욕과 이기심을 회개해야 합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죄를 애통하며 회개해야 합니다. 마음이 높아져서 남을 판단하는 죄를 애통하며 울어야 합니다. 두 마음 품은 죄를 인하여 울며 통곡해야 합니다. 이것이 자신을 낮추는 것입니다. 이것이 겸손한 것입니다. 겸손은 하나님 앞에서 죄를 발견하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함께 해주십니다. 우리를 높여 주십니다. 우리가 구하는 것을 주십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싸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싸움을 해결할수 있는 길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우리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하나님은 우리와 가까이 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복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가까이 해야 할 것이 많습니다. 많은 사람이 정보화 시대를 맞이하여 컴퓨터를 가까이 합니다. 학생으로 학과 공부를 가까이 해야 합니다. 직장 일을 가까이 하고 자녀들을 가까이 하고 오락을 가까이 합니다. 본능을 따라서 이성을 가까이 합니다. 돈을 가까이 합니다 오직 돈 생각으로 보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음란한 것을 가까이 합니다 무엇보다 자기의 탐욕을 가까이 합니다. 이런 것을 가까이 하는 자는 하나님을 멀리합니다. 우리는 이런 죄를 회개해야합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을 회개해야 합니다. 깨끗하고 순수해야합니다. 겸손해야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해야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까이 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사 우리에게 풍성한 은사를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싸움이 그치고 아름다운 성령의 공동체를 이룰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인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피조물이요 죄인입니다. 한계적인 삶을 사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꽃과 같이 잠시 영화를 누리다가 사라지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이런 존재를 인식할 때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하는지 미래에 대해서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하는지 알게 됩니다. 오늘 말씀에는 다른 사람의 죄와 물질에 대해서 어떻게 대해야하는지 나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우리는 신앙 생활하다가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할 때가 있습니다. 판단하는 마음이 생기고 미움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왜 그렇게 하는가? 왜 그것도 못하는가? 나같으면 이렇게 할텐데" 이렇게 판단하는 것은 마음이 교만해진 것입니다. 더 나아가 그 잘못에 대해서 내가 심판을 하고자 합니다. 내가 벌을 내리고자 합니다. 우리가 판단하는 것은 그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나의 율법을 만들어 놓고 하나님이 만드신 율법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위치에 올라가는 것입니다. 매우 교만한 자입니다. 우리는 내가 그 사람 때문에 고통을 당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있어서 내가 고통을 당하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나의 믿음에 따라서 복을 받고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율법의 판단자가 아니요 준행자입니다. 율법을 재판하는 자가 아니요. 율법의 재판을 받는 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똑 같은 죄인입니다. 우리는 남을 판단할 자격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에게 돌을 던지고자 하는 자에게 너희 중에 죄없는 자는 돌로 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같은 죄인으로서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보다 불쌍히 여기고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다만 우리는 하나님의 입장에 서서 죄에 대해서는 분별력을 가지고 하나님 편에 서서 때로는 죄를 책망하고 권면해야합니다. 죄인은 사랑하되 하나님이 미워하는 죄를 함께 미워해야합니다. 이럴 때도 나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잘 살펴야합니다. 우리를 진정 판단하실 수 있는 분은 누구입니까?
12절을 보십신오.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 우리를 판단하시는 분은 한 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법을 만드신 분이시오 법을 가지고 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입법부와 사법부를 운영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국회위원이시며 동시에 판사가 되시도 동시에 대통령이 되십니다. 하나님은 삼권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죄를 판단하시고 벌을 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느니라" 우리는 모든 판단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정확히 아십니다. 가장 바르게 판단하십니다. 우리의 중심을 보시고 판단하십니다. 우리의 삶을 전체적으로 보시고 판단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보다 더 정확하고 철저히 판단하십니다. 우리는 심판은 주님께 맡기고 서로 불쌍히 여기며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의 원수를 갚아 주십니다. 그렇지 않고 자신이 판단하고 원수를 갚고자 하면 자신도 똑같은 죄인이 되어 버립니다. 우리는 교만한 죄인이 됩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 우리는 다른 사람을 도울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서도록 돕는 것입니다. 말씀 앞에서 자신을 발견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재판장이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발견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도록 도와야합니다. 그러면서도 자신도 하나님 앞에서 혹시 그런 죄가 있지는 않은가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대신하여 때로는 죄에 대해서 책망할지라도 나도 같은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 그 사람은 불쌍히 여겨야합니다. 죄에 대해서만 분노해야합니다. 우리는 진정한 목자가 아니고 하나님이 진정한 목자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양입니다. 재판관이신 주님 앞에 서야하는 죄인들입니다. 이것을 인식하며 긍휼의 마음으로 다른 사람의 죄문제를 도와야합니다.
13,14절을 보십시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사람들은 오늘과 내일의 계획을 세우며 돈을 벌고자 합니다. 그들은 많은 돈을 벌어서 행복하게 떵떵거리며 살고자 합니다. 이들이 돈을 벌고자 하는 것이 잘못이 아니라 돈에 소망을 두는 것이 잘못입니다. 돈에 소망을 두고 벌고자 하는 사람들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내가 무엇이나 계획한 대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잘못입니다. 우리는 내 마음대로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잠간 살다가 죽는 안개와 같습니다. 안개는 해만 뜨면 없어져 버립니다. 우리도 언제 죽을 지 모릅니다. 기껏 산다고 해야 80-90살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적이고 지상적이고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것에 소망을 두지 말아야 합니다. 나 자신에게 소망을 두지 말아야합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예수님은 한 부자를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많이 돈을 벌고 창고에 곡식을 쌓아두었습니다. 이제는 먹고 마시고 즐기자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날 밤에 생명을 가져가십니다. 그는 돈을 하나도 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우리의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아야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부유하게 살아야합니다.
15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우리는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이 원하시면 이것을 할 수도 있고 저것을 할 수도 있다는 자유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다가 우리는 주님이 부르시면 모든 것을 놓고 가야 합니다. 이 세상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합니다. 내 뜻대로 살고자 하는 교만을 버려야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뜻안에서 계획해야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로마로 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였습니다. 그는 주님의 뜻이라면 죽어도 좋고 살아도 좋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안에서 자유함이 있어야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하나님 말씀뿐이 없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사야 말씀을 인용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라" 우리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16절을 보십시오.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사람들 가운데 돈 자랑하는 사람, 권세 자랑하는 사람, 자식 자랑하고 이것을 의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는 다 악한 것입니다. 이런 안개 같은 것을 자랑하는 사람은 이것이 다 헛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오히려 자신이 자랑하던 그것이 자신에게 짐이 될 때가 있습니다. 구운몽이라는 소설에 보면 성진은 여덟명의 아내를 얻고 부귀영화를 누립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 모든 것이 헛것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인생무상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것이 도를 깨우치는데 짐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을 자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혜를 자랑해야 합니다. 우리의 약한 것을 자랑하고 고난을 자랑해야합니다.
17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 죄는 모르고 짓는 죄와 알고 짓는 죄가 있습니다. 하지 말아야 하는 소극적인 죄와 할 것을 하지 않는 적극적인 죄가 있습니다. 우리는 선이란 것을 알면 적극 행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죄가 되는 것입니다. 선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세상 것을 자랑하기보다 하나님을 자랑하고 하나님의 뜻을 즐거운 마음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랑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삶 속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집니다 아멘!
결론적으로 우리 인생은 한계적인 인생입니다. 우리는 잠시 있다가 없어지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입니다. 우리는 이런 자신을 발견하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합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말고 불쌍히 여겨야합니다. 죄를 회개시킬 때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