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 제1조 제2항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규정하여 국민주권주의를 천명하고 있습니다. 국가 권력의 근원은 국민입니다. 따라서 국민으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은 위정자나 권력자들은 국민의 행복을 위해서 그리고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하기 위해서 매진해야 합니다. 위정자들의 시선이 국민과 정의에서 벗어날 경우, 국가는 분열과 분쟁으로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그런데 교회의 중심은 특정 부류의 사람이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을 중심으로 생활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인지 모르게 주님은 뒷전에 두고, 사람 또는 세상적인 것을 추구하는 모습을 보곤 합니다. 교회에서 분쟁의 원인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당시 고린도교회는 분파와 분립, 성적 윤리, 결혼과 이혼, 여성의 사역, 성령의 은사, 헌금 등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해 분쟁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중에서 교회 내에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와 같은 분파가 발생한 것에 대해 지대한 우려를 표명했습니다. 바울은 1장에서부터 3장에 이르기까지 이 문제를 지적하고, 더 이상 사람을 중심에 두지 말 것을 누차 강조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을 믿은 우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 (3:23)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처럼 교회의 중심은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 라는 사실을 재천명하면서, 그리스도의 것인 우리의 정체성이 무엇인지에 대해 오늘 본문을 통해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가 누구인지를 바로 알 때만 교회에서 분란과 분규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1)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
그리스도의 것인 우리의 첫 번째 정체성은 ‘그리스도의 일꾼’입니다. 일꾼으로 해석된 헬라어 ‘휘페레테스’는 ‘종’으로도 번역되는데, 원래 ‘배 밑창에서 노 젓는 자’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두 번째 정체성은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입니다. 하나님의 비밀은 ‘예수 그리스도 복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증인’을 뜻합니다. 우리가 휘페레테스로 살 때, 우리는 복음의 증인이 됩니다. 다시 말하면 배 밑바닥에서 묵묵히 노를 젓는 종과 같이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삶 자체가 복음을 증거하는 증인의 삶이 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휘페레테스요 복음의 증인인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충성’이라고 합니다. 충성(忠誠) 한자를 풀어서 해석하면 “중심”(中心)으로 주인의 “말씀”(言)을 “이루는 것”(成)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휘페레테스이자 복음의 증인인 우리는 마음을 다해 하나님의 말씀을 삶속에서 구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삶속에서 구현해야 한다는 말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요? 말씀대로 사는 것 ...
본문에서 ‘충성’으로 해석된 헬라어 ‘피스토스’는 ‘믿음’을 뜻하는 ‘피스티스’에서 파생되었습니다. 따라서 ‘충성’이라는 단어를 ‘믿음’으로 대체하면, 주님이 복음의 증인인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은 무엇인가요? 하나님을 믿는 것 ...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참 추상적이지 않을 수 없 지만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앎이 삶으로 연결되기 위해서는, 즉 참되고 성숙한 믿음을 위해서는 추상적인 ’믿음‘을 구체적인 단어로 재정립하는 노력을 지속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정의 할 수 있습니다. 그 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영과 진리로 살아감으로 예배의 생활화와 생활의 예배화’를 이루어 갈 것을 결단했 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 안에서, 주님의 말씀을 읽고 쓰면서, 믿음을 새로운 단어로 재정립해보고, 그 믿음대로 사는 삶을 의미합니다. 오늘은 본문을 이 관점으로, 즉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의 믿음을 재정립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믿음은 ‘판단하지 않는 것’입니다.
(3)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5)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요셉은 정혼녀인 마리아를 자신의 잣대로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초대왕 사울이 몰락한 이유는 자신의 잣대로 다윗을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타인의 판단에 자신을 맡기는 것처럼 위험한 일도 없습니다. 선배 목사님들이 이런 말씀을 해주십니다. ‘설교 후에 교인들이 “은혜받았다”고 하는 말에 절대 휘둘리지 말아라’ 목사도 사람인지라 한 번 두 번 듣다보면 초심을 잃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기 스스로도 자신을 판단하지 않는다’(3)고 했습니다. 하나님만이 사람을 정확히 판단하십니다. 내 잣대로 상대방을 판단할 때 분쟁이 생깁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판단한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소견대로 해석해서 판단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2. 믿음은 ‘주님이 심판자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4-5)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 /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바울은 사도의 직분을 행함에 있어서 양심에 거리끼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주님만이 나를 심판하실 수 있다고 합니다. 주님의 상과 벌을 확실히 인지한 사람만이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3. 믿음은 ‘본이 되는 삶’입니다.
(6)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들어서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말게 하려 함이라
이 말은 자칫하면 바울을 교만한 사람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 스스로가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않은 삶을 살았기에, 즉 주님의 말씀에서 벗어나는 삶을 살지 않았기 때문에 교인들에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자신을 본받으라고 당당하게 권면할 수 있었습니다. 가정에서 나는 어떤 본을 보이고 있습니까? 배우자에게, 자녀에게 본이 될 만한 삶을 살고 있습니까?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는 자신있게 나를 본받고 살라고 할 수 있습니까?
4. 믿음은 ‘교만하지 않는 것’입니다.
(8) 너희가 이미 배 부르며 이미 풍성하며 우리 없이도 왕이 되었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 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가 왕이 되기를 원하노라
교만은 스스로 높아지려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뜻대로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교만은 모든 악의 근원입니다.
(잠언 18:12)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
5. 믿음은 ‘스스로를 낮추는 것’, 즉 ‘겸손’입니다.
(10)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으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비천하여
주님 말씀대로 사는 신앙인에 대한 세상의 평가는 ‘어리석다, 약하다, 비천하다’입니다. 유대종교지도자들이 보기에 예수님은 어리석고, 약하고, 비천한 존재였습니다. 스스로를 죽기까지 낮아지신 주님을 하나님께서는 죽음에서 건져 올리셨고, 가장 높은 하나님 우편에 오르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것인 우리 역시 스스로 낮아져서 세상사람 보기에 어리석고, 약하고, 비천한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어리석음을 통해 주님의 지혜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약함을 통해 주님의 강함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비천함을 통해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6. 믿음은 ‘오래 참음’입니다.
(11-13) 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
바울은 교인들에게 자신의 사역에 대해 진솔하게 이야기합니다. 온갖 시련과 역경과 어려움 속에서도 교인들에게 손을 벌리지 않고 자비량으로 사역을 했습니다. 그럼에도 돌아오는 것은 비방이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교인들로부터 더러운 찌꺼기 취급을 받는다 할지라도 그는 고린도교회를 포기하지 않고 그들을 권면하는 편지를 작성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 대해 오래 참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어리석기 그지없는 나를 오래 참아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생명의 길을 걸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구원의 은혜를 입은 우리 역시 주님의 오래 참음을 본받아야 하지 않겠습니다.
우리의 때가 아닌 주님의 때를 소망하며, 영과 진리로 주님 말씀 안에서 믿음을 재정립하면서, 그 믿음대로 살아가면서 예배의 생활화, 생활의 예배화를 이루게 가는 복된 시간들로 날마다 충만한 시간이 됩시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2차전도 여행 동안 세운 교회입니다. 바울은 긴 기간 동안 고린도에서 복음을 가르쳤습니다(행18:11-18). 그러나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떠난 시점에 여러 문제들이 생겼음을 고린도전서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 여러 문제들 중 하나로 고린도 교인들 사이의 분열이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이 각각의 인물들을 지지 하면서 문제가 불거진 것입니다. 고린도에서 사역했던 아볼로는 탁월한 열심이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회 사람들은 아볼로를 따랐고, 아볼로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고린도 교회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됐습니다. 나아가서 고린도 교인들은 아볼로와 바울을 비교했고, 이는 바울에 대한 판단으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사도 바울을 판단했음을 4장 전반부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헬라 문화의 영향으로, 몇몇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이 수사학적 기교를 사용하지 않는 것에 비판적이었습니다. 복음 전도자이자 사도인 바울은 철학자와 수사학자들과 자신을 비교하며 판단하는 것에, 심각성을 느끼고 강한 어조로 그들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과 복음 전도자인 자신의 관계를 상기시키고, 그들이 본받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말하고, 또한 그들을 다시 회복시키기 위해 무엇을 하는지에 대해 말씀합니다.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14-15)
(14-15)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
바울은 4장 전반에서 강한 어조로 고린도 교인들을 비판하며 그들의 잘못을 책망했습니다. 그의 책망은 교인들을 향한 인신공격으로 오해될 수 있을 정도로 강한 어조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을 부끄럽게 하려는 것이 아님을 밝힙니다. 고린도 교인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고 명예를 깎아내려 치욕을 주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은 그의 어조가 강하고 신랄하지만 고린도 교인들을 비방하기 위해 편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자녀들에게 같이 권하려는 것임을 밝힙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과 자신이 어떤 관계인지 상기시킵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을 수사학자나 철학자들과 같이 비교하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군중으로 여기지 않았고, 복음으로 맺어진 아비와 자녀와 같은 관계임을 말합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바울이 전한 복음으로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어 그리스도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과의 갈등을 옳고 그름을 판가름하므로 해결하지 않았습니다. 사도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신랄하게 책망하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부모와 자녀의 관계 안에 있음을 인식했습니다. 한 믿음 안에서 어떤 책망과 비판이 오가더라도, 한 몸된 가족의 관계 안에 있음을 상기 시킵니다.
즉,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복음으로 낳았다고 하며, 그 관계가 단순히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의 관계가 아니라, 복음으로 하나된 영적인 가족의 관계임을 말합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아버지라고 한 것은 바울의 복음 전파 없이는 그들에게 믿음이 주어지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전하는 자를 통해 사람을 거듭나게 하십니다(벧전1:23). 복음을 듣지 않고는 믿을 수 없으며 전하는 이 없이는 복음을 들을 수 없기에(롬10:14-17) 바울과 고린도 교인은 부모와 자녀의 관계 같이 필연적인 관계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순전하게 전하기 위해 애쓰고 분투하였습니다. 복음이 당시의 헬라철학이나 인문학적 지식과 희석되어 변질되지 않도록, 바울은 그 내용 뿐만 아니라 전달방법에서도 인간적 능력이 우선하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순전한 복음을 그들에게 전하기 위해 분투하였고, 그 복음의 전파로 그들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였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복음으로 낳았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또한 사도바울은 아버지와 일만 스승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복음에 대해 가르치는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아비는 적다고 하였습니다. 누구든 복음에 대해 가르칠 수 있지만, 모든 사람을 아비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한 몸으로 유기체적인 관계에 있습니다. 한 교회가 되는 것은 각 사람이 각 지체가 되어 한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고전12:14-22). 그 중에 누구는 머리의 역할을 하며 누구는 손과 발의 역할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몸의 한 지체로 복음의 말씀을 몸에 공급하고 먹이는 사역자를 각 교회에 주셨습니다(엡4:11-12). 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복음에 대해 가르치는 스승이 될 수는 있지만, 모든 사람이 다 복음을 몸에 공급하고 먹이는 아비가 되지는 않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그리스도 안에 일만 스승과 아비를 구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식과 정보가 풍성한 시대에 설교와 가르침의 홍수 속에 살고 있습니다. 더 탁월한 설교와 가르침을 인터넷과 방송을 통해 들을 수 있습니다. 더욱이 온라인 예배가 일상화된 지금은 더욱 그러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지금과 같은 때에 그리스도 안에 일만 스승은 있으나 아비는 적다는 말씀을 상기해야 할 때입니다. 자칫하면 아비 없이 일만 스승을 쫓는 신앙생활이 횡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더 실력이 좋고 탁월한 지도자들이 있습니다. 더 인기가 많고 더 많은 영향력이 있으며, 사람들로 추앙을 받는 설교가와 사역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렇게 사람들로 추앙을 받고 뛰어난 실력자들을 본받지 말고 복음을 위해 고난을 당하는 나를 본받으라고 합니다.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16-17)
(16-17)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으니 그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고린도 교회에는 사도 바울보다 더 언변이 좋고 지식적으로나 외양적으로 더 탁월한 실력자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고린도 교인들 사이에 인기를 얻고 영향력을 가진 것은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들이 자신을 본받으라고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을 본받으라고 하는 말은, 자신을 더 인정해달라는 말이 아닙니다. 자신이 옳기 때문에 자기를 본받으라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바울이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의 영광을 쫓지 말고, 복음을 위해 고난 받는 삶을 살라는 의미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더 뛰어나고 탁월한 언변과 지식을 좇아가며 세상의 영광을 좇아갔습니다. 그들은 복음에 나타난 십자가의 고난을 잊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처음 복음을 전한 사도 바울을 멸시했습니다.
사도바울은 이러한 고린도 교인을 회복시키기 위해 디모데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디모데로 하여금 사도바울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다시 생각나게 했습니다. 무엇인가 신앙생활에서 어긋난 것 같을 때, 다시 돌이키고 회복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특별한 방법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처음 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도바울의 언변과 외모 처럼 세련되지 못하고 투박하고 구식으로 느껴질 수 있지만, 다시 복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고린도 교회를 향한 이 말들은 철학자나 수사학자들이 하는 논쟁이나 변론과 같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능력은 말의 실력에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능력에 있기 때문입니다.
말에 있지 아니하고 능력에 있음이라(18-21)
(19)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들의 말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 보겠으니
고린도 교회에는 많은 말들이 있었습니다. 복음을 가르치는 말과, 수사학자나 철학자들의 말, 바울을 비판하는 말 등 서로 말로 실력을 다투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이들에게 ‘말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보겠다고 합니다.
고린도 교회에서 사람들의 말이 가져온 결과로 성도들이 교만해져 사도를 비난하고 공동체가 분열되고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의 말에는 어떤 복음의 능력도 없었습니다. 설사 그들이 말로 사람을 감동시키고 행동을 변하시킨다 하더라도, 그것은 복음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능력과는 다른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능력은, 기적이나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능력은 사람으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20)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고린도 교회에 있는 지도자들의 가르침은 사도 바울의 복음이 무색할 정도의 지적인 가르침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지적인 가르침들이 아무리 탁월하더라도, 사람을 변화시키고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면 그것은 사람을 교만하게 합니다.
사람을 거듭나게 하고 구원하는 것은 복음 그 자체이지, 언변이나 지식에 있지 않습니다. 언변으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동요시킬 수는 있지만, 그것이 곧 거듭남과 구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 복음의 능력이 사람의 마음과 감정을 움직이는데 있다면, 우리는 복음을 사람을 감동시키는 언변이나 지식으로 혼돈하게 될 것입니다.
바울이 하나님 나라가 능력에 있다고 하는 말은, 복음만이 사람을 거듭나게 한다는 확신입니다. 그것이 설사 당장 지금 눈에 보이는 극적인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을 지라도, 복음만이 구원을 이루는 능력이 있습니다.
베드로전서는 이것에 대해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23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24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25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베드로전서 1:23-25)’
오늘 고린도후서 4장 후반부의 이 말씀들은 무겁고 엄중한 상황에 대한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말씀에서 나눈 이 말들을 부드럽게 돌려서 권면하며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격앙된 어조로 고린도 교인들의 잘못을 책망하며 꾸짖고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도 이 말씀을 가볍게 받을 수는 없습니다. 그 정황이 다음 구절에 나오고 있습니다.
(21)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
사도 바울이 매를 가지고 나가랴는 말은, 자녀를 매로써 경책하여서라도 잘못된 행동에서 돌이키게 하려는 강한 의지를 표현한 말입니다. 그 만큼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현재의 상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도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고린도 교인들을 대하며 권하고 싶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상황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부모는 누구나 자녀에게 항상 사랑하는 마음으로 온유하게 대하고 싶지만 엄하게 꾸짖고 경책해야 할때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자기들에게 복음을 전해 그리스도인이 되게 한 사도를 판단하고 비판하고 있는 이 상황에 대해 엄중하게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사도 바울을 철학자나 지식인들과 비교하고 판단하며, 복음으로 맺어진 영적인 관계라는 것을 잊었습니다. 그리고 언변과 지적인 능력을 갖춘 사람들을 따라, 복음을 말의 향연으로 착각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사도 바울은 다시금 복음으로 맺어진 영적 가족의 관계를 상기시킵니다. 또한 디모데를 보내 다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르쳐 생각나게 합니다. 그리고 세상의 영광을 쫓지 말고, 바울 자신을 본받아 복음을 위해 고난 받는 삶을 살라고 권면합니다.
이처럼 복음의 능력은 언변과 말의 실력에 의해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며, ‘영과 진리’에 따라 나타납니다. 오늘 하루도 말이 아닌 능력으로 복음을 경험하는 하루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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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예수그리스도와 복음에 대한 증언은 분명합니다.
고전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전1: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고린도 교인들에게 이렇게 담대하게 말하고 있는 바울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부르셔서 맡기신 사명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자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복음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이렇게 담대히 증언 할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사명에 대한 분명한 자각은 오늘 본문 4장1절에서도 드러나고 있습니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바울은 복음을 위해 수고하는 자기 자신과 동료들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
그는 그리스도의 일꾼,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 곧 복음의 파수꾼으로서의 사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지난 주일 설교의 말씀처럼, 복음의 파수꾼으로서의 얼굴로 살아가고있는 바울을 우리는 오늘 본문 첫 구절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복음의 파수꾼의 얼굴로 살아야 하는 것은 단지 바울만이 아니라 복음에 응답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몫이기도 하다고 우리는 배웠습니다. 그렇다면 복음의 파수꾼의 얼굴로 살아가고 있는 바울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살아가야 하는 우리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무엇인지를 오늘 본문을 통해서 살펴보겠습니다. 2절입니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자라면 그리스도의 복음의 파수꾼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데 그 복음의 일꾼인 우리들에게 먼저 요구되는 것이
1) 충성입니다.
충성이라는 단어는 군사적 용어, 전 근대적 용어로 생각되기 쉽지만 실제로 이 단어의 뜻은 신뢰할만하다, 믿을만하다 라는 뜻입니다. 영어성경에도 faithful(NIV,KJV성경), trustworthy(NSAB성경) 로 쓰여져 있습니다. 충성이라는 단어는 끝까지 최선을 다해 신의를 지키는 것, 끝까지 신실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부름받은 자들에게 가장 먼저 요구되는 것이 일을 맡겨도 될 만큼 '끝까지 신의를 지킬 사람이냐 그렇지 않냐'하는 여부입니다. 하나님이 이 시대에 찾고계신 사람이 이런 사람이지 않겠습니까? 처음에는 신의를 잘 지키다가고 끝에가면 배신하는 사람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 처음 가진 그 신의, 처음 가진 그 신뢰를 끝까지 변치 않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쓰임을 받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행20: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그의 말년의 유언의 메시지에서도 여전히 예수님에 대한 신의가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신실하게 최선을 다하였던 바울 사도처럼, 십자가를 마다않고 죽기까지 충성하셨던 예수님처럼, 충성이 우리에게 요구됩니다. 상황에 따라 가치에 따라, 조건에 따라 우리 편, 남의 편 쉽게 갈라지는 이 시대, 이익에 따라 오늘의 아군이 하루 아침에 내일의 적군이 되어버리는 편가르기 세상속에서 오직 한분 예수그리스도앞에서 변치않는 충성을 다하며, 시대가 변하여도, 상황이 바뀌어도 여전히 같은 주인, 같은 상관을 모시고 사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의 일꾼입니다. 끝까지 신의를 지키는 사람을 찾기 어려운 시대속에서 우리가 그런 충성된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 하루 아침에 주인이 바뀌는 세상속에서 온 인생 한 주인만을 섬기며 살아가는 충성된 일꾼, 그가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입니다.
충성이 그리스도의 일꾼에게 요구되는 것이라면
2) 예수 그리스도의 일꾼은 남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5절입니다.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남을 판단하지 말라는 말에는, 판단의 행위는 하나님의 영역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바을파, 게바파 그리스도파등 여러 파벌로 나누어져 서로를 판단하고 있는 당시 고린도교화를 향한 권면이기도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역의 성공/실패 여부도 자신이 판단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오직 판단하시는 분, 심판하시는 분은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3장에 보면 에덴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는 다 먹되 오직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선악을 구별하고 선과 악을 정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역을 넘보아서는 안되었기 때문에 인간의 영역과 하나님의 영역을 구분지어놓으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영역에도 하나님이 구분해눟은 말씀의 선이 있습니다. 본문 6절 중반절입니다.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된 말씀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말게 하려 함이라
심판의 영역, 판단의 영역은 주님에게로 남겨주어야 합니다. 함부로 남을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일꾼을 부리는 이도 주님이시요. 펀단하시는 이도 주님이십니다. 종은 단지 주인의 명령을 따를뿐 주인이 종의 일을 판단하십니다. 우리가 넘지 말아야 흘 선입니다.
3) 예수 그리스도의 일꾼에게 요구되는 것은 자기 낮아짐입니다.
9절 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13절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
그리스도의 일꾼의 위치는 절대로 높은 자리가 아닙니다. 존경받는 자리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주님의 일꾼은 늘 끄트머리가 되기 마련입니다.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신세가 되기 마련입니다. 복음을 위해서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일꾼이라면 예수와 복음때뭉에 받는 모욕이나, 멸시, 천대를 당연한 것으로 여겨야 합니다. 바울의 고백을 오늘날의 언어로 옮겨본다면 ‘우리는 하수도 오물처럼, 온갖 쓰레기처럼 사람들에게 취급을 당했습니다.’ 라는 의미입니다.이것이 위대한 사도 바울의 고백이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이런 취급을 당했는데, 우리는 어떠하겠습니까? 예수님도 사형수로 취급을 당하셨고, 죄인의 우두머리로 처참하게 십자가 처형을 당하셨는데, 우리는 어떠하겠습니까?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사람들에게 우대받고, 대접받는 것을 당연시 여기는 자는 하나님의 일꾼이 아닙니다. 오늘 이 시대에 주님이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주님의 사명을 감당하며 살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우리는 오늘 바울의 고백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주님은 지금도 주님의 일꾼을 찾고 계십니다. 상황이나 환경, 조건에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최선을 다하며 신의를 지키는 충성된 사람, 남을 판단하는 몫은 주님에게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자기의 선을 지키는 사람, 스스로 당연한 듯이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가는 사람, 그런 사람을 주님은 찾고 계십니다. 오늘 하루 주님이 원하시는 복음의 일꾼으로 우리 자신을 세워 가십시다.
고린도교회는 바울이 2차 전도여행 기간 중 약 1년 6개월 동안 머물면서 세운 교회였으며 당시 로마제국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로서 거대한 상업도시였기에 인구도 많았고 도덕적으로 사회적으로 종교적으로 수많은 문제들을 내포한 교회였다고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내제된 수 많은 문제들에 대해 성경적인 가르침을 전달하면서 편지를 쓰는 이유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14절입니다.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편지를 쓰는 목적이 고린도교회의 문제를 부각시킴으로 ‘부끄럽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 함이라’고 언급했습니다.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쓰는 사도 바울의 마음은 사랑으로 가득했습니다. 베드로전서 4장 8절에서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어준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죄를 그냥 덮어버린 게 아니라 드러내어 바로 잡아주고 있습니다. 때때로 사랑은 죄를 문제 삼지 않고 덮어버리는 것일 수도 있지만, 드러내어 바로 잡아주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랑의 마음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만일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 죄를 그냥 덮어버린다거나, 죄를 만천하에 드러내는 것은 성경이 말씀하는 참된 가르침이 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잘못을 드러냄으로 교육을 할 수도 있고, 잘못을 감춰줌으로 교육을 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잘못을 드러내느냐 감추느냐가 아니라, 그 가르치는 사람의 마음이 사랑으로 충만한가에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정의를 외칩니다. 죄 지적하기를 좋아합니다. 문제의식을 가지고 잘못된 것을 바로 잡으려 합니다. 이 모든 행위들이 옳은 일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행위의 출발이 사랑하는 마음 없이 시작되었다면, 15절에서 사도 바울이 언급한 일만 스승 중 한 사람일수는 있으나 참된 아버지는 될 수 없습니다. 15절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
일만 스승은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않다고 했습니다. 스승과 아버지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스승은 철저하게 댓가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입니다. 댓가를 요구하면 자기 유익을 위해서 일한다는 말입니다. 고린도교회에는 스승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스승이 많다는 것은 자기 유익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이 많을 뿐, 아비의 심정으로 교육하는 사람은 없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누구입니까? 세상에는 자식들에게 상처를 주고 걸림돌이 되는 이도 많지만, 성경이 말씀하는 참된 아버지는 자식을 위해서 헌신하는 사람입니다. 참된 아버지는 자녀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16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는 표현은 사도 바울이 자기 스스로를 높이는 교만한 표현이 아니라, 자신이 주님을 닮기 위해 애쓰고 노력한 그 모습을 본받으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흔히 어미게가 아기게에게 걷는 법을 교육하듯이, ‘넌 왜 똑바로 걷지 못하니? 똑바로 걸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 경험으로 알고 있듯이 아무리 옳은 말일지라도 삶으로 입증되지 않은 말은 아무런 능력도 감동도 주지 못합니다. 자녀에게 공부해라 말하기 전에 공부하는 모습을 먼저 보여주어야 하고, 신앙생활 열심히 하라 말하기 전에 삶으로 실천하는 살아있는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사도들의 중요한 사역은 삶으로 주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그 말씀을 지속적으로 생각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고린도교회를 떠나온 사도 바울은 그들이 바울이 삶으로 보여준 주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려고 디모데를 그들에게 보냈습니다. 17절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으니 그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사도 바울이 삶으로 보여준 주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은 디모데였습니다. 디모데는 사도 바울의 대언자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없는 그 자리를 디모데가 대신하고 있습니다. 디모데를 보면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사도 바울을 떠올리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누구의 대언자입니까? 만일 누군가 나를 보고 예수님을 생각한다면, 나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나를 보고 엉뚱한 것만을 생각한다면 분명히 나는 잘못 살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영적으로 늘 깨어있기를 기대하며 디모데를 보냈으나, 고린도교회 성도들 가운데는 사도 바울이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기에 스스로 교만해 진 사람도 있었습니다. 18절~20절입니다.
“어떤 이들은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지 아니할 것 같이 스스로 교만하여졌으나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들의 말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보겠으니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사도 바울이 안보인다고 교만하게 행동하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언제고 주님이 허락하시면 그들에게 갈 수 있음을 기억하라고 말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이 내 앞에 계신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절대로 교만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행동은 달라질 수 밖에 없습니다. 차를 몰고 가다가 신호등이 빨간불이면 서야 합니다. 그러나 급한 일이 있을 때 신호등을 무시하고 운전합니다. 그러나 신호등 아래 경찰관이 서 있으면 아무리 급해도 빨간불에는 운전하지 않습니다. 왜? 경찰관이 지켜보고 있기에 불법을 행하지 않게 됩니다. 하물며 주님께서 내 앞에 계신다고 생각한다면 우리의 행동은 달라질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행동에 따라 주님은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신다고 말씀합니다. 21절입니다.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매를 가지고 오실 수도 있고,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오실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행동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주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매를 가지고 오시는 분이십니까?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다가오시는 분이십니까?
만일 우리가 지금 고난을 당하고 있는데, 내 죄로 인함입니까? 아니면 주님의 말씀대로 실천하기에 당하는 고난입니까? 만일 내 정욕대로 살다가 당하는 고난이라면 나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지만, 진리의 길을 걸어가기에 당하는 고난이라면 그 고난은 축복입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임한 분란은 행함 없는 말, 한 순간 공기의 진동으로 끝나버리고 마는 말 때문에 일어났습니다. 그런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는 게 아니라 능력에 있다고 선포합니다. 오늘 우리의 입술을 통해 나오는 말들이 한 순간 공기의 진동으로 끝나 버리는 것입니까? 아니면 200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능력으로 살아 역사하는 사도 바울의 말씀처럼 능력의 말씀입니까?
오늘 하루 누군가를 가르치기 원한다면, 먼저 그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충만해지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충분히 그를 사랑하는 마음이 준비되었을 때, 그제야 비로소 일만 스승이 아니라 참된 아버지로 다가갈 수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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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통하여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저와 여러분들 모두를 향하여 “그리스도의 일꾼,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관리인”이라고 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사람은 이와 같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관리인으로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세주와 주님으로 믿고 영접했다는 것은 예수님을 삶의 주님으로, 주인으로 모시겠다는 결단입니다. 그런 우리들을 성경에서는 “예수님의 제자, 그리스도의 종, 하나님의 종, 관리인, 일꾼”이라고 표현합니다. 오늘 1절에 표현된 “그리스도의 일꾼,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관리인”이라는 말은 지금 우리가 듣기에 괜챦아 보이는 말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1절에 쓰인 ‘일꾼’이라는 말의 원어의 의미는 그 당시 로마시대 전투를 하는 배 가장 밑층에서 노를 젓는 노예를 칭할 때 쓰는 말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로마 영화에서 종종 본 적이 있는 배 가장 밑층에서 노를 젓는 노예는 노예 중에 가장 천한 노예입니다. 주인의 명령, 배의 함장의 명령에 따라 일할 수 밖에 없는 일꾼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일군이요 종이 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향하여 우리는 그러한 밑층에서 노를 젓는 노예와 같은 자라고 알리고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사도 바울이 이런 말씀을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앞의 고린도전서 3장을 통해 보았지만 고린도교회 안에 심각한 파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볼로파, 바울파, 게바파, 그리스도파. 하나님의 뜻인 하나됨을 깨트리는, 하나님의 성전을 파괴하는 일을 하는데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스스로 속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런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아볼로도, 베드로도, 바울인 나 자신도, 그리고 여러분 모두도 다 같은 그리스도의 일꾼이라는 신분을 분명히 알려 주고자 한 것입니다. 편이 나누어져 다투고, 싸워서는 안되는 모두 주인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일하는 같은 일꾼이라는 것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일꾼이기에 주님의 일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일이란 1절 하반절에 말하는 하나님의 비밀을 맡는 것입니다. 1절을 다시 보십시오. “사람은 이와 같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관리인으로 보아야 합니다” 여기서 ‘맡는 관리자’라는 말의 원어는 원어로 ‘오이코노모스’라는 단어인데 큰 집을 관리하는 청지기, 관리자, 집사란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일꾼이 하는 일이란 하나님의 집의 일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집의 일을 하는 일꾼 된 성도들이 가져야 할 첫 번째 자세를 2절에 이렇게 알려 주십니다. “이런 경우에 관리인에게 요구하는 것은 신실성입니다” 개역성경에는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충성, 신실성이란 하나님이 믿을만한 사람, 신뢰할만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누구를 믿을만한 사람이라고 합니까? 책임감이 있는 사람입니다. 맡은 일을 끝까지 책임감 있게 수행하는 사람이 믿을만한 사람, 충성스런 일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일 잘 하기를 요구하기보다,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을 끝까지 감당하기를 원하십니다.
충성되고 신실한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서 기쁨이 되는 행동과 모습으로 일하는 것입니다. 회사나 가게에서 일을 하는 종업원들 가운데 주인의 마음을 힘들게 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들 안에서도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분열하게 하고, 힘들게 하는 험담과 미움, 시기와 불순종으로 어렵게 하는 자들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충성됨은 하나됨, 화목함을 이룹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충성됨은 사랑의 열매, 기쁨의 열매, 감사의 열매를 맺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충성됨은 오래참음으로 마지막에 선을 이룹니다. 그렇기에 요한계시록 2:10절에도“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라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십니다. 우리 교회 모든 성도님들이 이러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충성스런 일꾼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그리스도의 일꾼 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평가를 받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내가 여러분에게서 심판을 받든지, 세상 법정에서 심판을 받든지, 나에게는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개역성경에는“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사도 바울은 사람들의 칭찬과 비난의 평가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매우 작은 일” 이라 했습니다. 타인의 평가에 연연하지 않겠단 뜻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평가는 옳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습니다. 사람의 잣대는 부정확합니다. 잘 했다고 칭찬해도 너무 으슥해하지 말고, 잘못한다고 비난해도 너무 좌절과 분노할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일꾼 된 우리는 스스로를 평가할 때가 있습니다. 3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그뿐만 아니라, 나도 나 자신을 심판하지 않습니다”개역성경에는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바울사도는 자기 스스로 자기를 평가하는 것도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합니다. 스스로 착각하여 우쭐해지기도 쉽고 열등감에 빠져 낙심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나를 판단하고 스스로 자책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결코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평가도, 자기 스스로의 평가도 별로 중요하지 않다면, 그럼 진정한 평가는 어디에서 이루어집니까? 바로 하나님의 평가입니다. 4-5절을 보십시오. “나는 양심에 거리끼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로 내가 의롭게 된 것은 아닙니다. 나를 심판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는, 아무것도 미리 심판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는 어둠 속에 감추인 것들을 환히 나타내시며, 마음 속의 생각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 때에 사람마다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한 사람에 대해 내리는 평가는 지극히 일부분에 대한 평가입니다. 우리가 그 사람의 일상을 24시간 관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보기에 까칠해보이고, 깍쟁이처럼 보이고, 뺀질뺀질해 보여도, 다른 곳에서는 후덕하고, 사랑이 많고, 섬기는 일을 잘하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못 보는 감추인 부분들을 다 드러내어 최종적인 평가를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평가는 우리 마음의 뜻이 어떠한지 중요하게 평가하십니다. 여기 “마음의 뜻”이란 마음의 동기를 말합니다. 무슨 동기로 일하느냐는 것입니다. 사람은 행동만 보지만, 하나님은 마음의 의도를 보십니다. 고상하고 거룩한 일들을 하면서도, 이기적인 마음으로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반면에 우리가 보기에는 의심쩍고, 겉으로만 하는 것 같아 보이지만
거룩한 마음으로, 겸손한 마음으로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사람들의 속마음을 아십니다. 하나님만이 그 마음의 동기와 속을 보시고 바르게 평가하십니다.
그렇기에 진정한 평가는 하나님 앞에서 이뤄집니다.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서 판단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시는 명령이 5절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는 아무것도 미리 심판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는 어둠 속에 감추인 것들을 환히 나타내시며 마음속의 생각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 때에 사람마다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6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각각 나는 누구 편이다 라고 하며 분쟁과 분열, 다툼을 하고 있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나와 아볼로에게 적용하여 설명하였습니다. 그것은 “기록된 말씀의 범위를 벗어나지 말라”는 격언의 뜻을 여러분이 우리에게서 배워서, 어느 한 편을 편들어 다른 편을 얕보면서 뽐내지 않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개역성경으로 보면 훨씬 더 이해가 됩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들어서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말게 하려 함이라”
사도 바울이 말하는 것은 자신이나 아볼로는 권위를 가진 교회 리더의 위치에 있었으나 결코 교만하거나 거만하게 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겸손하게 자신들을 낮추어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섬겼습니다. 바울은 자신과 아볼로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이러한 ‘겸손의 본’을 보여주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과 아볼로가 떠나 있는 이 상황 속에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나는 바울편이다, 나는 아볼로 편이다”라고 파가 나뉘어져서 서로 다투고 싸우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너희가 우리가 보여준 겸손의 본을 본 받지 않고 도리어 교만함으로 서로 싸우고 대적하고 있다고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과 아볼로는 서로 자신이 더 잘났다거나 혹은 자신이 더 뛰어나다고 대적한 적도 없고 다툰 적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둘 다 자신들은 하나님의 일꾼이고 청지기라는 것을 깨달았기에 겸손함과 낮아짐으로 섬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된 우리들에게 교만한 마음으로 서로 대적하거나 싸우는 하나님의 성전을 무너트리는 죄를 짓지 말고 회개하고 회복하라고 명하시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분열과 분쟁의 문제가 있는 성도들간에 다툼과 싸움이 있는 모습과 이유를 7-8절에 다시한번 이렇게 설명합니다. “누가 그대를 별다르게 보아줍니까? 그대가 가지고 있는 것 가운데서 받아서 가지지 않은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모두가 받은 것이라면, 왜 받지 않은 것처럼 자랑합니까? 여러분은 벌써 배가 불렀습니다. 벌써 부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를 제쳐놓고 왕이나 된 듯이 행세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책망합니다. “누가 여러분을 특별대우를 받아야 하는 사람처럼 구별했느냐?” 이 말입니다. 바울은 서로 자신들, 자기 편이 옳고, 맞고, 잘났다고 다투고 싸우고 파벌을 형성하여 분열하고 있는 고린도교회 성도들, 더 나아가 자신들이 마치 교회 내에서 자신이 왕이라도 된 듯 비판과 판단, 상대방을 정죄하는 자들을 향하여 “너희가 진정 그럴 자격이 있는 자들이냐?”라고 책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교만한 사람들을 꼬집어 말하듯 8절에 “여러분은 벌써 배가 불렀습니다. 벌써 부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를 제쳐놓고 왕이나 된 듯이 행세하였습니다. 여러분이 진정 왕처럼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하여 우리도 여러분과 함께 왕 노릇 하게 되면, 좋겠습니다”거만하고 교만한 마음으로 함께 신앙생활하고 있는 형제자매들을 무시하고, 시기하고, 다투고 미워하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보며 통탄해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이기도 한 것입니다.
바울은 교회 안에서 스스로 가장 높은, 모든 것을 교만하게 판단함으로 분열을 일으키는 자들을 향하여 진정 하나님이 원하시는 복음과 하나 됨,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일꾼으로 살아가는 것은 이러한 삶이라고 9-13절에 알려줍니다.“하나님께서는 사도들인 우리를 마치 사형수처럼 세상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들로 내놓으셨습니다. 우리는 세계와 천사들과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천대를 받고 있습니다. 바로 이 시각까지도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얻어맞고, 정처 없이 떠돌아다닙니다. 우리 손으로 일을 하면서 고된 노동을 합니다. 우리는 욕을 먹으면 도리어 축복하여 주고 박해를 받으면 참고 비방을 받으면 좋은 말로 응답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쓰레기처럼 되고 이제까지 만물의 찌꺼기처럼 되었습니다”
바울이 하고 싶은 말이 무엇입니까?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나는 바울편이다, 아볼로 편이다, 베드로 편이다” 라고 하지만 자신과 사도들은 복음을 위해서 이와 같이 극심한 핍박과 고난을 지금 이 순간에도 당하고 있으나, 여전히 인내와 겸손으로 사명을 감당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통해 마음이 거만하고 교만하여 자신들이 마치 왕인 듯 교회에서 행동하고 있는 어리석은 자들을 바울은 간접적으로 책망했던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와 성도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은사들을 받은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마치 자기 자신의 탁월한 경건이나 능력으로 이러한 은사들을 받은 것처럼 교만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고 자신의 마음과 뜻에 맞지 않는 성도들을 정죄와 비난했고 반목했습니다. 그러한 모습이 저와 여러분들 가운데는 없습니까? 겸손과 낮아짐으로 하나님의 복음의 비밀과 예수님이 보여 주신 삶의 모습으로 하나됨과 화목됨을 위하여 고난과 비난, 모욕을 당하지만 좋은 말로, 넓은 마음으로 용납과 용서, 배려와 섬김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의 일꾼의 모습입니다.
본문은 사도 바울이 분열과 분쟁이 있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그 분열과 분쟁이 바로 하나님의 성전을 부수고 있는 악한 일들이며, 그러한 일들을 하는 것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육에 속해 있고, 성숙지 못한 어린아이의 신앙이며, 스스로 속이고 있는 상태라고 강하게 책망한 후에 자신이 그렇게 책망하는 이유와 고린도 교회를 위한 마음을 알리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14-15절에 이렇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합니다. “내가 이런 말을 쓰는 것은 여러분을 부끄럽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사랑하는 자녀들같이 훈계하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에게는 일만 명의 스승이 있을지 몰라도, 아버지는 여럿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 내가 여러분을 낳았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를 통해 “너희가 육에 속한 자들이다. 스스로 속이는 자들이다. 너희가 교만하여 왕처럼 서로 비난하고 싸우고 있다” 라고 신랄하고 강하게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책망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그렇게 책망한 이유는 그들을 비난하고 정죄하고 욕하기 위함이 아님을 밝힙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여 바로 잡기 위한 책망임을 알립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성도들을 향해 “나에게 너희들은 자녀와 같다. 나는 너희의 단지 교사가 아닌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을 낳은 자녀들이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듯이 고린도 교회는 사도 바울이 개척하여 세운 교회입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으로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어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복음으로 낳았다고 하며, 그 관계가 단순히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의 관계가 아니라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인 필연적인, 사랑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서로 비난과 정죄, 죽이기 위함이 아닌 하나님의 교회와 하나님의 뜻과 사명을 바로 알고 살아갈 수 있도록 잘못된 길에서 사랑으로 바로 세우기 위해 애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위해, 하나님의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서 아버지의 심정으로 가르쳤고, 책망했고, 바로 잡으려고 어떻게 보면 신랄할 정도로 책망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바울의 마음과 사랑으로 우리 또한 서로를 세우고 책망하고, 그 마음을 알고 받을 수 있기를 원합니다.
바울이 그러한 마음으로 고린도 교회를 책망했기에 본문 16절에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은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사도 바울이 자신을 본받으라고 하는 말은, 자신을 더 인정해달라는 말이 아닙니다. 자신이 옳기 때문에 자기를 본받으라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택하심, 사명과 교회를 위해 순수한 동기로 힘쓰고 애쓰는 모습을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힘쓰고 애쓰고 초점 맞춘 것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어 구원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 복음의 의미를 깨달아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성전을 세우고,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성품을 이루고, 하나됨으로 복음의 비밀을 맡아 감당하는 성도와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고린도 교회와 성도들이 다시 분열과 분쟁에서 하나되고 바로 설 수 있도록 아들과 같은 디모데를 고린도 교회에 보냅니다. 그리고 디모데를 보내는 이유를 17-18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이 일 때문에 나는 디모데를 여러분에게 보냈습니다. 그는 주님 안에서 얻은 나의 사랑하는 신실한 아들입니다. 그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행하는 나의 생활 방식을 여러분에게 되새겨 줄 것입니다. 어디에서나, 모든 교회에서 내가 가르치는 그대로 말입니다”
사도바울은 이러한 고린도 교인을 회복시키기 위해 디모데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디모데로 하여금 사도바울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다시 생각나게 했습니다. 잘못하고 있는 신앙생활을 다시 돌이키고 회복시키기 위해서 다시금 자신이 가르쳤던 복음의 핵심,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가르치게 한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 교만한 마음으로 서로 옳다 그르다 싸우고 있는 성도들에게 19-20절에 참된 복음은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그들의 삶의 열매로 안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속히 여러분에게로 가서, 그 교만해진 사람들의 말이 아니라 능력을 알아보겠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능력에 있습니다”영적인 분별력을 가지고 사람들이 유창하게 말하고 자신의 옳음을,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는 말들을 듣지 말고 그들의 삶 속에 진정 십자가의 모습, 희생과 섬김과 용서와 하나됨을 위함이 있는지를 살피고 우리는 그러한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마음은 채찍이 아닌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돌이키고, 회복시키려는 마음임을 21절에 “여러분은 무엇을 원합니까? 내가 채찍을 들고 여러분에게로 가는 것이 좋겠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사랑과 온유한 마음을 가지고 가는 것이 좋겠습니까?”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이 매를 가지고 나가랴는 말은, 자녀를 매로써 경책하여서라도 잘못된 행동에서 돌이키게 하려는 강한 의지를 표현한 말입니다. 그만큼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현재의 상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마음, 하나님의 마음은 채찍이나 강한 매로 바로 잡으려는 것이 아닌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고린도 교인들을 대하며 권하고 싶은 것입니다. 온유한 마음으로 권면하고 책망할 때 돌이키기를 원하는 마음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이키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다면 심한 매를 들어서라도 바로 잡으려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그러한 마음을 깨닫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잘못된 길에서, 교만함으로 비난과 정죄, 하나됨을 깨트리는 죄에서 돌이키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하나님의 마음으로 누군가 부족함, 연약함, 실수와 잘못된 길로 가는 성도들을 향하여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다가가 서로를 세울 수 있는 그러한 관계와 신앙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