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4장은 하나님 나라의 비유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씨 뿌리는 비유(3~20), 씨의 성장에 대한 비유(26~29) 그리고 겨자씨에 대한 비유입니다(30~32). 주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는, 마음을 닫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불신의 사람들에게는 의미를 감추시고, 깨닫고자 하는 자들에게는 의미가 드러나게 하기 위함이라고 설명하십니다(12,33).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그 뜻을 알고자 하는 자들에게만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설명해주셨습니다(11,34).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는 것은 절대적으로 중요합니다. 주님은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심으로써(23),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마음의 자세의 중요성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는 말씀은 듣는 것이 무거운 책임을 동반한다는 것을 가르치시는 말씀입니다(24). 사람은 그 들은 말씀으로 심판을 받게 됩니다. 말씀을 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떤 말씀을 듣는가도 중요합니다. 바른 말씀을 들을 때에, 깨닫는 자는 더 깨닫게 되고 은혜를 받는 자는 더 은혜를 받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깨닫지 못하는 자는 점점 더 우매해지고 은혜를 받지 못하는 자의 마음은 점점 더 강퍅해질 것입니다(25).
2.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네 가지 밭의 비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고, 밭은 사람의 마음입니다. 말씀은 계속 뿌려지지만, 같은 씨라고 해서 어디서나 똑같이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닙니다. 밭의 상태에 따라서 결과가 다릅니다. 길가에 떨어지면 즉시 새가 먹어버리고,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면 곧 싹이 나오지만 해가 돋으면 뿌리가 없어 죽고 맙니다. 가시떨기에서는 가시가 기운을 막아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합니다. 열매를 맺는 밭은 좋은 땅뿐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도 네 종류의 마음 밭이 다 있습니다.
3. 잠시 기쁨으로 받는다고 해서, 좋은 땅의 증거는 아닙니다(16). 환난이 오고 핍박이 올 때 곧 넘어지고 마는 것은 참된 신앙이 아닙니다. 세상 염려나 돈의 유혹과 욕심들로 하나님의 말씀이 질식되어 죽게 된다면 그것도 참된 신앙이 아닙니다. 참된 신앙은 필연적으로 30배, 60배, 100배 결실합니다. 일시적이고 부분적인 것을 참 믿음으로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4. 그러므로 말씀을 전하는 사람은 말씀을 빼앗아가는 사탄의 역사를 분별해야 합니다. 사람들 중에는 은혜를 받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아무 것도 받아들이지 않는 돌밭 같은 마음이 있기 마련입니다. 참된 신앙은 씨앗이 자라 나무가 될 때까지 시간이 많이 필요하듯이 신앙에도 세월이 필요하며, 단면적이고 부분적으로 판단할 것이 아니라, 매우 종합적으로 살펴야 합니다. 긴 세월을 통해 말씀의 열매가 맺히는 줄을 살펴야 합니다. 당신에게는 열매가 맺히고 있습니까? 열매가 맺히기 위해서는 밭에 씨가 뿌려져야 하듯, 말씀이 그 마음에 뿌려져야 하며, 그 말씀이 그 사람의 마음에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사랑합니까? 말씀을 묵상합니까? 말씀 따라 살고자 하는 선한 열망으로 가득합니까?
5. 씨의 성장에 대한 비유가 이어집니다(26~29). 이 본문을 존 맥아더 목사는 "잠의 신학(Theology of Sleep)이라는 주제로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T4G 2010). 농부는 씨를 뿌리고 잠을 자지만, 그가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자라므로 정작 어떻게 자라는지를 모릅니다.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을 설명해줍니다(28). 바른 씨를 잘 뿌렸으면 농부는 노심초사 염려할 것이 아니라 자도 됩니다. 씨를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복음의 사역을 감당하는 모든 주의 종들에게 얼마나 큰 위로입니까? 말씀을 전하는 자의 몫은 씨를 잘 뿌리는 일, 말씀을 잘 전하는 일입니다. 그 다음은 주께서 하십니다.
6. 겨자씨의 비유가 이어집니다(30~32). 겨자씨는 작아서 잘 보이지도 않지만, 결국 큰 가지를 내는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도 잘 보이지 않을 만큼 미미하지만, 결국 세상을 차지할 것입니다. 오직 믿음의 눈으로만 하나님 나라의 징조를 볼 수 있습니다.
7. 마지막으로 주님이 광풍을 잠잠케 하신 이적 사건이 기록됩니다(35~41). 예수님은 배에서 주무시는데 큰 광풍이 일어 제자들은 죽게 되었다고 소란합니다. 주님은 풍랑을 잠재우시면서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책망하십니다. 배 안에 주님이 함께 계시는데도 불구하고, 주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신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주변에 일어나는 광풍 같은 것에 두려워 소란을 피우고 있다면 그것은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우리 삶에서 크고 작은 풍랑이 그치지 않지만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주 예수님을 신뢰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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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 있는 자에게 가르치시는 말씀(1~9)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가 신앙을 가짐으로 인해 박해와 고난을 받는 시대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생활을 유지한다는 것이 마냥 쉬운 시대도 아닙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에 대하여 세상이 가지고 있는 인식은 매우 상스럽고, 세상보다 더 세상적으로 변해버린 듯한 대형교회와 종교지도자들의 태도에, 같은 그리스도인으로서도 실망과 부끄러움을 느낀 것은 특별한 이들만의 경험은 아닐 것입니다. 아직 믿지 않고 있는 부모님이나 자녀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지만, 이 기도가 해를 거듭할수록 강하고 견고해지기보다는 무력하고 나약해지고 있습니다. 힘든 현실과 상황에 매몰되지 않으려고 기도의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여전히 세상은 큰 산처럼 보이고 그 앞에 선 나는 힘없는 작은 사람일 뿐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복음의 진보는 매우 더디기만 하고, 화려하게 변해가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야함은 제 몸보다 무거운 짐을 지는 것 같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무엇이 희망일 수 있겠습니까? 내 안에서는 아무런 소망도 발견할 수 없기에 주님이 우리를 불러 모아 주십니다.
(1)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서 가르치시니 큰 무리가 모여들거늘 예수께서 바다에 떠 있는 배에 올라 앉으시고 온 무리는 바닷가 육지에 있더라
우리를 보면 아무런 희망도 발견할 수 없으나, 우리의 희망은 예수께서 다시 시작하셨다는 것입니다. 실패한 우리의 이름을 예수께서 다시 부르시고, 쓰러진 우리를 예수께서 다시 일으켜 세우시는 것이 ‘복음’입니다. 몇 번을 쓰러지고 실패해도 주님은 다시 시작하시고, 다시 불러주십니다.
주님께서 가르치신 바닷가는 당시 모여든 무리들이 살아가는 삶의 터전이기도 합니다. 갈릴리 호수의 서북쪽은 매우 비옥한 지역입니다. 바닷가에서 어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바닷가 근처에서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상당수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바닷가에서 배 위에 올라가 앉으사 해변 쪽으로 바라보시니, 자신에게 집중하는 무리들은 물론, 저 멀리 밭에서 씨를 뿌리는 농부들도 보이셨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바닷가는 오늘 우리로 말하자면 매일 출근하는 사무실이며, 매일 만나야 하는 사람들의 얼굴입니다. 수고의 땀을 흘리는 노동 현장이며, 산적한 문제들과 씨름해야 하는 모래판입니다. 선임들과 후임들, 동기들과도 암묵적인 경쟁 속에서 치열하게 싸워야 하는 전쟁터이며, 내 인생은 물론 사랑하는 가족들을 위해 하루에도 몇 번을 욕먹고 무시당해도 자존심 죽여가며 툭툭 털고 일어나야 하는 외로운 자리입니다.
삶의 피 튀기는 현장 속에서 우리 주님은 모여든 큰 무리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쳐주십니다. 그런 삶일지라도 우리 삶의 중심은 말씀이어야 함을 알려주시는 것이며, 사람을 낚는 어부로서의 본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당시 유명한 랍비들은 권위적으로 회당과 성전을 중심으로 제자들을 모아 가르쳤다면, 예수님은 직접 사람들에게 찾아가셔서 사람들의 삶의 현장, 생업의 한 가운데에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복음은 성육신이 되지 않으면 그 의미도, 역사도 나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예수님의 가르침은 비유였습니다.
(2) 이에 예수께서 여러 가지를 비유로 가르치시니 그 가르치시는 중에 그들에게 이르시되
비유는 은유적으로 의사소통하는 방법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풀어내기에 비유만큼 적절한 방법도 없을 것입니다. 누군가는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소망하고 갈망할 수 있지만 누군가는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비난할 수 있는 나라이기에, 비유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심으로 계시와 은폐의 이중 효과를 거두었습니다. 비유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의 나라가 지닌 확장성은 마치 뿌려진 씨앗과 같습니다. 결실한 씨앗처럼 상상할 수 없는 많은 열매를 거둡니다. 또한 하나님의 나라는 공평하여 씨앗을 받아들일 밭의 상태와는 상관없이 모두에게 뿌려집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신앙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물론, 공동체 너머의 외부인들에게도 선포된다는 의미입니다.
본문에는 크게 4개의 밭이 등장합니다. 먼저 길 가입니다.
(4)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씨는 말씀이며 밭은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마음이라고 한다면, ‘길 가’는 굳어진 인간의 마음일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무심코 밟은 길, 여러 번 밟힘으로 굳어져 버린 심령, 많은 상처와 아픔이 잠재하는 마음입니다. 길의 희생으로 편안히 다니면서도 고마운 줄 모르고 당연한 듯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무심한 뭇 발길질로 멍울이 생긴 그 마음은 무감각해지고 굳어져 버렸습니다. 이에 뿌려진 말씀이 들어갈 틈이 없어 사단의 공격에 말씀을 속수무책으로 빼앗겨버립니다.
(15) 말씀이 길 가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탄이 즉시 와서 그들에게 뿌려진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
다음은 흙이 얕은 돌밭입니다.
(5~6)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씨앗은 농부의 손에서 떠나 땅에 떨어진 순간 땅의 품으로 들어가 씨앗의 틀을 깨고 변화됩니다. 씨앗 본연의 모습이 죽어야 삽니다. 땅도 역시 자신의 몸에 씨앗이 뿌리내리도록 자리를 내어주는 자기희생으로 씨앗과 함께 공존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땅도 죽게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흙이 얕은 돌밭은 반드시 있어야 하는 햇빛도 감당하지 못하는 연약하고 얕은 마음을 의미합니다. 이 마음은 말씀을 들을 때 기쁨으로 받기는 하나, 깊이가 없기에 생명을 키우기 위한 작은 시험도 견딜 능력이 없습니다.
(17)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깐 견디다가 말씀으로 인하여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다음은 가시떨기입니다.
(7) 더러는 가시떨기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 기운을 막으므로 결실하지 못하였고
말씀이 우리 마음에 뿌려진 순간 우리 마음은 영적인 전쟁터가 됩니다. 말씀은 우리를 다듬고 만들어가려 하는 반면, 내 육신은 원하는 대로 살아가려고 고집하기 때문입니다. 가시로 인해 자라지 못한 상태라는 것은 말씀을 들으면서도 염려, 유혹, 욕심이 함께 들어옴으로 말씀이 아니라 유혹에 사로잡힌 것을 의미합니다.
(19)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자요
마지막으로 좋은 땅입니다.
(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가 되었느니라 하시고
좋은 땅은 무성한 결실을 맺습니다. 들려주신 말씀의 절대성을 인정하고 굴복함으로 오직 말씀을 기준 삼아 사는 마음이 좋은 땅입니다. 말씀이 우리 심령을 갈아엎을 때 겸손하게 순종한 결과 말씀이 우리에게 많은 결실을 허락합니다.
(20)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
본문의 ‘받아’의 원어적 의미는 ‘환영하다’입니다. 들려주시는 말씀을 하늘의 은혜로 알고 마음으로 환영하여 말씀 안에서 살아가면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얻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 됩니다. 앞서 다른 밭에 뿌려짐으로 열매를 맺지 못한 잃어버린 씨앗, 자라지 못하고 중간에 죽어버린 씨앗들을 보상하고도 남음이 있는 은혜요 은총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의 씨앗을 뿌리시는 분이시며 열매로 보상을 해주시는 분이십니다.
(렘31:27-28)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내가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를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뿌릴 날이 이르리니 깨어서 그들을 뿌리 뽑으며 무너뜨리며 전복하며 멸망시키며 괴롭게 하던 것과 같이 내가 깨어서 그들을 세우며 심으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씨를 뿌리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고 그 씨가 말씀이요 복음이라면, 씨가 자라 열매를 맺느냐 맺지 못하느냐의 결정은 밭에 의해 결정됩니다. 그렇다면 많은 결실을 맺는 좋은 밭이란 어떤 밭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좋은 밭이란 농부에 의해 밭이 갈아엎어진 땅을 의미합니다. 농부가 밭을 갈면서 밭에 감추어졌던 돌이나 가시떨기를 제거하며 딱딱하게 굳어졌던 흙을 부드럽게 만듭니다. 이 과정이 밭에게는 매우 고통스럽고 아픈 일일 수 있으나, 그것이 있어야 밭도 사는 길입니다.
농부가 씨를 뿌린다는 예수님의 비유를 들을 때, 청중들은 기대를 품었지만, 첫 시작은 분명 실망스러웠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씨를 뿌린 자의 의도대로 좋은 밭에 의해 풍성한 결과를 얻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의 신앙이 마치 아무 의미없는 낭비처럼 보이고, 거대한 세상에 내어놓기도 부끄럽다고 여김으로 절망속에 빠져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과는 상관없이 확신을 가지고 뿌리시는 농부이신 하나님으로 인해 그의 나라는 확장되고 풍성해집니다.
너희에게 주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10~20)
제자들은 주님께서 홀로 계실 때에 들려주신 비유에 대해 질문했습니다. 제자들도 이해하지 못한 이 비유를 무리들이라고 알아들었을 리 만무합니다. 그럼에도 특별히 제자들에게만 하나님 나라의 비유를 풀어주심에는 그 나라가 무리들에게는 감추어졌으나 제자들에게는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수는 이해하지 못해도, 바르게 이해한 소수에 의해 시작되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아직은 감추어진 하나님의 나라이지만, 그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풍성한 가르침 속에 이미 드러나고 있습니다.
정녕 예수님은 무리들에게 진리를 감추시려는 계획이시겠습니까? 비유는 분명 깨닫지 못하게 하는 장치입니다. 그러나 기본적인 이해만 있으면 다른 어떤 설명 보다 훨씬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며, 말씀 안에서 살기로 다짐하며 행할 때 확장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졌고, 십자가 위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이름을 부르사 내 죄를 사하시는 메시아 이심을 믿는 이들로 인해 열매가 맺어지는 나라입니다. 같은 말씀을 들어도 깊은 깨달음이 없이 주님을 떠나버리는 무리와 같은 자들은, 눈을 현혹시키는 기적을 바라고 따라왔다가 그것이 없자 곧 돌아서버린 자들입니다. 그릇된 목적으로 개인의 욕망만을 위해 신앙생활하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감추신 것입니다.
(이사야6:9-10)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말씀의 씨가 뿌려지자, 그 씨의 결말에 따라 길 가, 흙이 얕은 돌밭, 가시떨기, 좋은 땅이 자연스럽게 구분되었다는 것입니다. 밭은 우리가 직면한 상황과 그에 따른 영적인 상태임을 말씀드렸습니다. 당시 마가복음을 읽는 독자들은 환난과 핍박의 상황에서 정치/종교 지도자들 앞에 넘겨져 심문을 받고 미움을 받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들 모두에게 하나님은 공평하게 말씀의 씨를 뿌려주셨습니다. 그러나 메시지를 듣고 즉시 배척하는 자들도 있고, 기쁨으로 받지만 끝까지 견디지 못하는 자들도 있었으며, 잘 믿다가도 세상의 유혹과 염려에 쌓여 결국은 쓰러지는 이들도 있고, 복음을 듣고 받아들이고 올바르게 살아감으로 풍성한 열매가 기대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뿌려진 말씀과 복음의 씨앗이 허무하게 소비되는 것 같고, 지금 당장 눈앞에 아무런 성과도 없는 듯 보이나, 결국은 씨를 뿌리시는 하나님의 의도대로 말씀을 받아들인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 그러므로 가정과 직장, 삶의 자리에서 홀로 믿는다며 절망할 것이 아닙니다. 결국 하나님의 역사는 신실한 소수의 그리스도인에 의해 기록되고 있으며,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은 열매를 거두십니다.
이제 예수님은 세 가지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등불 비유(21~25)와 자라나는 씨 비유(26~29) 그리고 겨자씨 비유(30~32)입니다. 이 세 가지 비유는 각각 다른 것 같지만, 공통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말씀입니다.
등불의 비유 (21~25)
등불 비유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그리고 누가복음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의 등불 비유는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의 등불 비유와는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의 등불 비유는 진리의 등불을 갖고 있는 그리스도인이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할지를 강조했다면,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진리의 등불에 대적하는 악의 세력이 있지만, 이 세력은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보답을 받게 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21) ...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에나 평상 아래에 두려 함이냐 등경 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
등은 속에 감람유가 채워진 납작한 형태의 등잔이며, 사용하지 않을 때는 등잔을 덮는 그릇으로 덮어두거나, 침상 아래에 내려놓았습니다. 어두워지면 등잔 심지에 불을 붙여서, 기다란 등대 위에 올려서 주위를 밝혔습니다.
(22, 새번역) 숨겨 둔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 둔 것은 나타나기 마련이다
등불이 밝혀지면, 어두움 속에 숨어있던 그리고 감추어져 있던 모든 사물은 그대로 드러납니다. 본문에서 등불은 예수님 자신을 의미합니다. 죄악의 어두움이 관영하고 있는 이 땅에 참 빛이신 예수님께서 오셔서 진리의 빛을 밝히셨습니다. 진리의 빛으로 인해 어두움 속에 자신의 실체를 숨기고 있던 거짓과 죄악은 다 드러나게 됩니다. 그런데 등불의 빛으로 인해 자신의 추악하고 더러운 실체가 다 드러난 거짓과 죄악은 자신의 잘못을 은폐하고, 오히려 진리가 거짓이라고 호도하고 핍박합니다.
2018년 서지현 검사의 성추행 폭로로 촉발된 미투(MeToo) 운동으로 인해 문화예술계, 정치계, 교육계, 체육계, 종교계 등 사회 각 분야에서 존경받던 인사들의 왜곡된 성에 대한 의식과 그들의 추악한 모습이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미투로 지목된 당사자들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며, 오히려 상대 여성을 비난했습니다.
참 빛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의 상황을 요한복음은 다음과 같이 증거 합니다.
(요 1:9-11)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예수님의 탄생은 어두운 세상을 비추는 참 빛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둠이 빛을 깨닫지 못하듯이, 세상은 아기 예수를 알지 못했습니다. 참 빛으로 이 땅에 오신 아기 예수의 탄생 소식을 들은 당시 유대 땅을 다스리던 헤롯 대왕은 메시아로 오신 주님을 영접하기는커녕, 아기 예수를 살해하려했습니다. 그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두 살 이하의 어린 아이를 전부 죽이라고 명령했습니다.
참 빛이신 예수님은 진리를 외면하고 핍박하고 있는 세상을 향해,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23)고 말씀하셨습니다. ‘들으라’고 해석된 헬라어 ‘아쿠오(akuo)’는 ‘흘려듣는 것’이 아니라 ‘주의를 기울여 듣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으로도 부족하다고 생각하셨는지 예수님은 재차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24)고 하셨습니다. ‘삼가다’로 해석된 헬라어는 ‘블레포(blepo)’로 “~을 보다“, ”~에 주의를 기울이다“라는 뜻입니다. 이 문장을 우리말성경은 ”너희는 듣는 말을 새겨들으라“고 해석했습니다. 예수님이 한 번도 아니고 두 번, 세 번에 걸쳐, 세상을 향해 자신의 말을 들으라고 강조하시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셨습니다.
(24-25)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며. 더 받으리니,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
헤아린다는 것은 어떤 사물이나 사람을 판단하거나 평가하는 것을 뜻합니다. 자신이 평가한 그대로 평가받게 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쉽게 설명한 비유가 바로 ‘달란트 비유’(마 25:14~30)입니다.
주인이 다른 나라로 떠나면서 세 명의 종에게 각자의 재능대로 각각 금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받은 종은 각각 장사를 해서,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남겼습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종은 땅을 파고 달란트를 묻어두었습니다.
후에 돌아온 주인이 종들과 결산하였습니다.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받은 종들은 주인이 맡긴 달란트를 사용해서, 각각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벌었다고 보고합니다. 주인은 이들을 칭찬하며 나누어준 달란트 외에도 그들이 번 달란트를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은 자신이 번 달란트를 주인이 다 빼앗아 갈 것이라고 생각하고, 달란트를 땅속에 묻어두었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그에게 준 한 달란트를 빼앗아, 이미 열 달란트를 소유한 종에게 주고, 무익한 종을 내쫓아버렸습니다.
주인에게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이 무익한 종이 되어 쫓겨난 이유는 자신이 섬기는 주인을 잘못 헤아렸기 때문입니다. 같은 주인을 모시고 있는 두 명의 다른 종들과는 달리 그 종은 주인을 자신을 착취하고, 자신의 소유를 빼앗는 매정한 수전노로 판단했습니다. 그는 결국 자신이 주인을 판단한 그대로 평가받아, 집에서 쫓겨나게 되는 가련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미투운동에 지목된 인사들은 자신의 잘못을 감추고 결백을 주장하고 피해 여성을 매도했지만, 결국 사법당국을 통해 그들의 추악한 모습이 사실이었음이 밝혀졌습니다.
유대의 왕이라는 권력을 지키기 위해 수많은 어린아이들을 살해하도록 지시한 헤롯대왕은 그가 최고의 가치를 두었던 왕좌에 영원히 앉아있지 못했습니다. 그가 건축했던 당대 최고의 건축물이라고 칭송받았던 예루살렘 성전은 완공된 지 불과 7년 후인 AD. 70년에 그가 그토록 신봉하고 섬겼던 로마군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어 버렸습니다. 자신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서 아내는 물론 자식들까지도 살해한 비정한 인물인 그를 인류의 역사는 폭군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진리를 거스르는 거짓은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자라나는 씨 비유 (26-29)
어제 살펴보았던 “씨가 떨어진 네 종류의 땅” 비유의 초점은 복음을 의미하는 씨앗이 아니라, 복음을 접한 사람들의 마음 밭입니다. 반면에 오늘 본문인 ‘자라나는 씨’ 비유는 농부나 땅이 아니라 씨 자체, 즉 하나님의 나라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26-28) “또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라”
땅에 뿌려진 씨앗은 싹이 나고, 이삭이 되고, 이삭이 충실한 곡식이 되었습니다. 농부는 자신이 뿌린 씨가 싹이 올라오고, 성장한다는 가시적인 사실만을 인지할 뿐, 씨 자체가 어떻게 땅속에서 발아되고, 성장하고 곡식을 맺는지 전혀 모릅니다. 이 비유에서 씨를 뿌린 사람이 ‘씨가 어떻게 자라는지 알지 못한다’는 말씀은 ‘인간은 하나님의 섭리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고, 간섭할 수도 없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베들레헴이 아닌 나사렛에서 태어나실 수 있었습니다. 가이사 아구스도가 인구조사를 하기 위해 호적령을 내리자, 요셉은 호적하기 위해 나사렛에서 베들레헴으로 정혼한 마리아를 데리고 갔고, 베들레헴에서 예수를 출산했습니다.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 직선거리는 약 170Km로 도보로 약 10일 정도 걸리는 거리에 해당됩니다. 호적령은 남자에게 해당된 것이기 때문에, 요셉은 굳이 그 먼 길을 만삭인 마리아를 데리고 가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만삭 상태인 마리아는 그대로 나사렛에 있고, 요셉만 베들레헴에 가서 호적 신고를 하고 돌아오면 되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만삭인 마리아와 함께 베들레헴에 가서 호적 신고를 했습니다.
요셉이 만삭인 아내를 데리고 간 이유로는 ‘처녀의 몸으로 임신한 마리아를 동네 사람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라는 의견도 있고, ‘남자 아이가 태어났을 때 8일 안에 할례의식을 해야 하는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의견이 있지만 모두 추측입니다.
호적등록을 하기 위해 갑자기 몰려든 사람들로 인해 몇 개 되지 않는 숙소는 곧 만원이 되었습니다. 제대로 아이를 해산할 장소가 없어 구유 옆에서 해산했고, 첫 아들을 구유에 뉘어야 했던 당시 상황은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무척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큰 그림 안에서 퍼즐 조각처럼 맞춰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숨은 계획은 진행되고 있습니다.
나사렛에 살던 요셉이 베들레헴에 만삭인 아내와 함께 가서, 그곳에서 출산하게 된 배후에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가시는 하나님의 섭리하심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오래 전에 미가 선지자를 통해 다음과 같이 예언하셨습니다.
(미가 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만약 가이사의 호적령이 없었다면, 요셉이 베들레헴에 올 이유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통치자를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시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만삭인 아내와 동행하지 않아도 될 상황이었음에도 요셉이 마리아와 함께 베들레헴에 온 것 역시 하나님의 섭리하심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섭리하심에 의해 통치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십자가 죽음, 그리고 부활을 믿는 우리의 삶속에 이미 존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의 삶속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우리의 삶 속에 하나님의 섭리하심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는 주님의 섭리하심에 온전히 자신을 의탁해야함을 의미합니다.
겨자씨 비유 (30-32)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겨자씨의 성장에 비유하셨습니다.
(31-32)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나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
땅위에서 가장 작은 씨앗에 불과한 겨자씨가 성장하면 모든 풀보다 커지고. 큰 가지를 내어서 공중의 새들이 가지의 그늘에 깃들만큼 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삶속에 임한 하나님의 나라가 현재 어떻게 확장되고 있고, 앞으로 어떻게 확장될지 우리는 인지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싹이 나고,.이삭이 나고 풍성한 곡식을 거두게 되고, 겨자씨처럼 모든 풀보다 크게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우리를 향하신 계획, 섭리는 지금 당장은 알 수 없지만. 때가 되면 깨닫게 됩니다.
요셉은 자신을 애굽의 노예로 팔아넘긴 형들을 애굽 총리의 신분으로 만났을 때, 자신을 애굽의 노예로 판 장본인은 형들이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가뭄으로 인해 양식을 구하러 온 형들을 만나보니, 형들이 자신을 애굽의 노예로 판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가문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자신을 애굽으로 인도하셨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으로부터 여러 비유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배운 제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제대로 이해했을까요?
그가 누구이기에 (35-41)
날이 저물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35)고 하시면서 타고 있던 배를 건너편 거라사인의 지방을 향하여 떠나게 하셨습니다. 다른 배들도 함께 예수님이 타고 계신 배를 뒤 따라 갔습니다. 예수님은 하루 종일 바닷가에 있는 군중들에게 가르치셔서 너무 피곤하셨는지, 곧 깊은 잠이 드셨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큰 광풍이 몰아쳤습니다. 작은 배는 큰바람과 파도에 사정없이 흔들렸고, 배에는 물이 차기 시작하였습니다. 사태가 얼마나 급박했는지 당시의 상황을 본문은 다음과 같이 증거합니다.
(38)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예수님의 제자 12명 중 최소한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적어도 이 네 사람은 갈릴리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어부 출신입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산전수전 다 겪었던 베테랑 어부인 그들이 겁에 질려 깊이 잠이든 예수님을 흔들어 깨울 정도였으니, 얼마나 큰 규모의 광풍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일어나서 바람과 물결을 향해 "잠잠하라 고요하라"(39) 꾸짖으셨습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 거칠게 몰아쳤던 바람과 물결이 잔잔해졌습니다. 예수님께 겁에 질려 있는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40) 말씀하셨습니다. 잔뜩 주눅 든 제자들이 고개를 숙이고 나직이 속삭였습니다.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41)
본문을 읽으면서 한 가지 의문이 듭니다. 천지를 주관하시는 주님은 그날 저녁에 광풍이 몰아올지 모르시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왜 하필이면 광풍이 몰아칠 야심한 밤에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셨을까요? 예수님께서 무리한 여정을 추진한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바닷가에 있는 무리들을 향해 씨가 떨어진 네 종류의 땅에 대해 말씀하신 예수님은 세 가지 비유를 드시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 가르쳐주셨습니다. 이후 제자들에게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고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갔습니다. 즉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론 교육을 한 후에, 갈릴리 바다에서 현장 실습을 통해 제자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깨닫는 바가 있기를 바라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으로부터 말미암았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는 모든 곳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동행한다고 해서 핑크빛이 가득하고, 고통이나 역경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본문의 제자들처럼 예수님과 동행하면서부터 오히려 지금껏 처해보지 못했던 더 큰 시련과 고통에 처할 수 있습니다. 베테랑 어부들인 제자들처럼 우리 역시 역경 속에서 당황하고, 힘들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다윗도 질곡(桎梏)의 삶을 살았습니다. 다윗은 조국 이스라엘을 위해 충성했는데, 돌아온 것은 죽음의 공포였습니다.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 왕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미친 사람으로 위장하기도 했고, 굶주림 속에서 광야로 피해 도망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오히려 예수님과의 인격적 만남 이후, 그에게 돌아온 것은 동족 이스라엘의 멸시와 탄압이었습니다.
우리의 인생 여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 믿었다고 우리의 삶속에 고난과 고통이 없지 않습니다. 여전합니다. 어떤 때는 과거보다 더 심한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배는 풍랑으로 점점 침몰되어 가고 있는데, 하나님은 묵묵부답이심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이 때 우리의 시선은 광풍이 아닌 우리 배에 함께 계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등경 위의 등불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예수님이 어둠을 밝히는 등불이라고 밝히셨습니다. 요한복음은 참 빛이 어둠을 비추었지,만 어둠은 빛을 깨닫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세상은 빛이 없어서 어두운 것이 아닙니다. 빛은 이미 존재하고 있는데, 어둠의 세력은 끊임없이 우리의 시야를 가립니다. 절망 속에도 이미 희망은 존재하고 있습니다. 빛이 이미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배 안에는 등불로 어둠을 밝히는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풍랑을 보면 절망스럽지만, 예수님을 보면 희망이 생깁니다. 광풍으로 돛이 찢어지고, 돛대가 끊어지고, 배에 물이 들어와 곧 침몰할 것 같을 지라도, 주님과 함께 가고 있는 여정이라면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일어나시자 모든 일이 해결되었습니다.
절망과 낙담의 순간, 주님을 깨우자 모든 것이 해결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본문을 문제 해결을 중심으로 본다면 우리의 신앙은 성숙해질 수 없습니다. 즉 주님을 우리 문제의 해결사로 믿는 믿음은 절대로 성숙하지 못하고 오히려 퇴보하게 됩니다. 본문에서 강조하는 점은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예수님은 천하 만물을 주관하시는 주님이시라는 점입니다. 문제의 해결보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향한 믿음입니다.
바람이 멎고 바다가 잔잔해진 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4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은 상대방에 대한 신뢰입니다. 상대방을 신뢰한다는 것은 상대방의 말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다를 건너기 전에, 여러 비유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이 함께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다에서 죽게 될 것을 무서워했습니다. 풍랑이 모두 잠잠해진 후 제자들은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41) 하였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제자들의 상태를 “심히 두려워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두려움은 예수님을 향한 경외심입니다. 바람과 파도를 말씀으로만 잠잠하게 하신 주님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입니다. 제자들은 아직 미완성의 단계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어찌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고 한탄하실 정도로 부족합니다. 이들의 모습이 우리의 실상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과 동행하는 제자들과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나라에 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우리의 연결 고리는 예수님을 향한 믿음입니다. 믿음은 어떠한 상황에 처할지라도 주님의 섭리하심을 믿고, 주님의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임을 믿는 것입니다. 거지 나사로의 이름을 생명책에 기록해주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름을 부르셔서 생명의 길, 진리의 길로 걸어가게 해주셨음을 믿으십시다. 진리와 생명의 빛으로 임하신 하나님을 우리의 힘으로 삼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를 통해 우리가 발을 디디고 있는 모든 곳이 하나님 나라가 되는 놀라운 역사가 펼쳐질 것임을 믿으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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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라는 제목으로 흔히 알려져 있습니다. 3절부터 8절을 보게 되면 네 가지의 씨앗이 네 종류의 땅에 떨어진 것처럼 보여집니다. 먼저 4절을 보면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라고 말씀하며, 5절을 보면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7절을 보면 “더러는 가시떨기에 떨어지매”, 8절을 보면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결실한 씨앗은 좋은 땅에 떨어진 씨앗이기에 네 가지의 씨앗 중 하나만 결실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말 성경을 보면 씨앗을 모두 똑같이 “더러는” 이라는 말로 번역을 했지만, 헬라어 원문 성경을 보면 4절과 5절과 7절의 “더러는” 하나의 씨앗을 뜻하는 단수이고 8절의 “더러는” 여러 개의 씨앗을 뜻하는 복수입니다. 즉 8절의 좋은 땅에는 3개의 씨앗이 뿌려져 각각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결실을 맺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4개가 아니라 6개의 씨앗의 뿌려져 그 절반이 열매를 맺는 데, 그것도 엄청난 결실을 맺는 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복음의 씨앗에 담겨진 하나님의 은총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엄청나게 풍성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14절부터 20절까지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잘 설명해 주시고 있습니다. 14절을 보면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고 하셨으니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 됩니다. 뿌려진 땅은 그 말씀을 들은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15절을 보면 “말씀이 길 가에 뿌려졌다는 것은” 그 말씀을 들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사탄이 즉시 와서 그들에게 뿌려진 말씀을 빼앗는 것이라고 예수님은 설명해 주십니다. 따라서 길 가와 같은 사람들은 완전히 닫힌 마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16절과 17절을 보면 흙이 얕은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나중에 말씀으로 인하여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라고 합니다. 이들은 얕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물론 말씀에 대한 반응은 빠릅니다. 씨를 뿌리자마자 싹이 나오는 것처럼 즉시 기쁨으로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러나 싹이 나오기 전에 그 뿌리가 먼저 땅속 깊이 먼저 내려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겁니다. 따라서 이런 분들의 특징은 주로 감정적인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 마음과 기분에 따라 그때그때 달라집니다. 부흥 집회나 수련회에 참석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기쁨과 감격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하면 걸리고 부딪히는 게 얼마나 많습니까? 신앙이 없는 사람들도 자신들의 소신과 신념에 따라 살려면 손해를 볼 수밖에 없는데,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말씀대로 바르게 살려고 할 때 겪는 손해는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18절과 19절입니다. “또 어떤 이는 가시떨기에 뿌려진 자니 이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자요”
하나님의 말씀이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그들의 마음속에 염려와 욕심이라는 가시가 박혀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염려는 대부분이 생활에 대한 염려, 건강에 대한 염려, 자녀와 부모에 대한 염려입니다. 이러한 염려는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을 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흔히 사람들은 염려하지 않는 삶을 살려면 돈이 필요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돈이 많으면 염려꺼리도 줄어든다는 것이지요. 염려를 돈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마치 염려하는 마음과 돈에 대한 욕심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염려하는 마음이 커지면 돈에 대한 욕심도 커집니다. 그러나 있으면 있는 대로 걱정, 없으면 없는 대로 걱정하는 것이 돈 아닙니까? 우리의 모든 염려를 하나님께 내어 맡기지 않는 한 염려와 재물의 노예가 될 뿐입니다.
20절입니다.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
좋은 땅과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 속에 자신을 던지는 가운데 인격이 변화되고 삶의 열매를 맺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뿌리를 둔 신앙생활은 지금 내가 어떤 일을 얼마만큼 하느냐가 더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보다 지금 내가 어떤 됨됨이가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느냐가 훨씬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흔히 신앙인격이라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우리가 얼마나 소유하고 있고 무엇을 하는 것으로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됨됨이로 평가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성격이 다혈질이고 불같이 화를 내는 사람이 말씀을 듣고 깨달아 자신을 그 말씀에 온전히 던져서 온유한 사람으로 바뀌어 갈 때, 그것이야말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씨 뿌리는 자 비유의 설명을 다 들은 제자들과, 또 함께 한 사람들은 과연 무슨 생각을 먼저 했겠습니까? 또한 우리도 이 비유에 대한 예수님의 설명을 들은 후 무슨 생각이 먼저 듭니까? 아마도 제자들뿐만 아니라 우리 역시도 먼저 드는 생각은 ‘그렇다면 나는 지금 어떤 땅일까?’라는 생각일 것입니다.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 하고 있기에 설마 자기들이 길 가는 아닐 테고, 흙이 얕은 돌밭일까? 아니면 가시떨기일까? 아니면 좋은 땅일까? 라고 속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어떤 제자들은 자기들은 주님과 함께 있고 제자로 삼아 주셨으니 좋은 땅과 같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제자들이 좋은 땅이었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신약성경 복음서가 신랄하게 보여주는 제자들의 모습은 분명 흙이 얕은 돌밭이나 가시떨기였습니다. 열두 제자들은 순간적인 열정은 있었지만 쉽게 식어버렸고, 그 마음속에는 시기와 질투라는 가시떨기가 있어서, 서로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욕심으로 타투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주님이 붙잡히시는 날 밤에는 다 도망을 가버렸습니다. 이러한 제자들의 모습은 다른 사람의 모습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비추어주는 거울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그런 모습이 끝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형편없는 제자들이 사도행전을 보면 초대교회를 세워가는 지도자와 일꾼들이 되었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변함없이 우리의 마음 밭에 말씀의 씨를 뿌리시고 계십니다. 비록 지금 우리 마음 밭이 돌밭과 가시떨기 밭 같을지라도 주님은 우리마음 밭의 돌짝을 쪼개시고 가시떨기를 뽑아 내시는 분이십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한낱 돌 밭과 가시떨기밭에 불과한 우리들을 끝까지 기다려 주시고, 참아주시며, 좋은 땅으로 바꾸어 가시는 분이 주님이십니다. 그러하기에 우리 마음속에 뿌리신 말씀의 씨를 통해 반드시 열매를 거두게 하시는 주님과 함께, 오늘 이 하루도 말씀의 길을 걸어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본문 4:21-25까지 말씀은 등불에 대한 비유입니다.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등불은 조그마한 질그릇 같은 것에 기름 붓고 심지를 놓아 그 심지에 불을 붙여 어둠을 밝히는 정도의 등불로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안에는 항상 이 등불이 켜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등불을 붙여 밝히는 일은 제사장의 책임이었며 이 일을 위해서는 자주 등잔을 살펴보아 기름을 채워 불이 꺼지는 일이 없게 성전을 관리해야 했습니다. 따라서 이 등불은 곧 빛을 말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빛이 된다는 그러한 상징으로 쓰인 등불을 일컷고 있습니다.
곧 이 등불은 복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복음이 어떻게 전파되는 것인가를 등불을 비유로 하여 매우 세밀하게 설명해 주고 계십니다.
등불은 반드시 비춰져야 한다는 점입니다. 어디까지나 빛의 존재는 빛을 비추는데 그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빛을 발하는 등불은 주위를 두루 밝힐 수 있게 언제나 높이 두어야지 말 아래에나 침상 밑에 둘 수는 없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빛이 있음으로 방향감각을 찾고 사물을 보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가치규정이 됩니다. 빛이 없으면 아무리 훌륭한 것이라 하더라도 가치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 됩니다. 우리가 새벽에 교회에 나오기 전에 불빛아래에서 최소한 거울을 한 번 보고 신경을 쓰고 나옵니다만 한순간 불이 꺼지면 아무것도 볼 수 없습니다. 빛 이 없다면 거울을 본다는 것 자체가 헛된 일이 됩니다. 이와 같이 빛은 가치의 기준이 됩니다.
나아가서 빛은 곧 생명입니다. 빛이 있음으로 생명이 존재합니다. 따라서 빛이 없다면 세상의 모든 생명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이와 같이 빛은 소중한 것입니다. 이러한 빛을 두고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하셨고 본문에서는 이 빛이 복음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빛이 있어서 생명이 있고 가치 기준이 되며 삶의 방향을 정해주는 것이란 말씀입니다.
따라서 이 빛은 반드시 전해져야 합니다. 이 말은 빛 자체가 본질적으로 전파되어지도록 되어 있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복음의 의미를 바로 깨달은 사람은 복음을 전할 수 밖에 없습니다. 복음은 빛과 같아서 반드시 많은 사람을 향해 빛을 발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빛의 본질임과 동시에 빛에 대한 우리의 사명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또한 이 빛은 숨겨질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본문에 기록된 대로 등불을 가져왔으면 높이 등경 위에 두는 것이지 곡식을 되는 말속이나 평상 아래에 두어 주위를 여전히 어둡게 하려는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말속에 등불을 넣어둔다면, 등불을 말로 덮어 버린다면 어떻게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또한 "평상 아래에 두려 함이냐?"는 것인데 여기에서 이 평상이란 사실은 침상, 곧 침대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래에 둘 수는 없지 않느냐고 하시는 것은 반드시 높이 두어야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여 무엇으로도 숨겨질 수 없다고 하는 뜻입니다. 이는 복음은 반드시 전파되어져야하며 또한 그럴 수밖에 없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빛이 그러하듯이 복음은 자유로운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곳에서, 모든 사람에게 가리지 않고 복음은 계속 전파되어져야 하고 그렇게 되게 되어있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말'과 '평상'이라는 것에 상징적 의미를 부여한다면
먼저, '말'이라고 하는 것은 거래, 곧 장사를 할 때 사용하는 도구입니다. 그 때문에 한말 두말하면서 말로 되어 헤아린다는 것은 서로 정확하게 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장사를 의미하는 사업의 상징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어떠한 물질적인 사업행위에 의해서도 복음 전파가 방해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는 사업 때문에, 혹은 장사하느라, 농사일 때문에 전도를 못한다는 말은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절대로 숨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말로 덮어 숨겨둘 수는 없는 것이란 말입니다. 어디까지나 높은 데 있으면서 멀리, 넓게, 두루 비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평상'이란 다름 아닌 침상, 혹은 침대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침상은 휴식을 말하는 것이요, 동시에 향락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향락을 두고 이야기하자면 여러 가지로 말할 것이 많을 것입니다. 아무튼 복음은 어떤 향락적인 것으로도 결코 방해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는 어떤 경우에도 이 복음의 등불은 보다 높은 곳에 있어서 언제나 만물을 밝힐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어서 자라나는 씨 비유와, 겨자씨 비유를 통해서 복음의 속성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자라고 확장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현재적으로 지금 여기에서 계속 나타납니다. 생명의 빛은 항상 밝게 비춰지고 있습니다. 이 복음의 빛을 받은 사람은 자라나는 씨 비유와, 겨자 씨 비유를 통해서 보여주신 것처럼 자라고 열매를 맺고 새가 와서 깃들일 만큼 자란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임으로 생각이 달라지고 생각한 것을 실행하고 목적이 달라지고 커지고 자라서 하나님나라를 위하여 이제는 죽어도 좋고 수치를 당해도 좋다 할 만큼 자라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내 마음의 문이 이 빛을 향하여 열려지지 않는다면 아무리 찬란한 빛도 나와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나의 눈을 감고, 나의 귀를 막고 있는 이상 하나님의 음성이나 그 은총이 나에게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마음의 문이 닫혀지지 않게 함은 물론 언제나 활짝 열린 상태에서 받아들임으로 주시고자 하시는 모든 은혜를 크게 누릴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어서 35절부터 41절 말씀은
이제 바닷가에서 말씀을 마치시고 날이 저물어 저편으로 가자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배에 몸을 실었습니다. 광풍이 일어 죽게 되었는데 예수님은 고물에 들어가서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이 급히 깨워 상황을 알리고 돌보아주시기를 간청합니다. 예수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고 잔잔케하셨다고 기록합니다.
예수님께서 풍랑을 잔잔케 하신 이 사건을 통하여 성경이 말씀하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요?
이 사건을 보는 공관복음서의 결론은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하는 것입니다.
그는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이십니다.
그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는 우리와 함께하시는 성령님이십니다.
그분이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광풍이 클수록 고요도 클 것입니다.
고난이 클수록 위로도 클 것입니다.
아픔이 클수록 더욱 큰 능력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반드시 죄가 있어 고통이 있고 아픔이 있는 것만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되 고난을 당하고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주님을 통해 하시고자하시는 위대한 사명이 있었기 때문에 허락하신 것이요. 은혜인 것 입니다.
우리에게도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 있지 않겠습니까?
물론 죄가 있어 고통이 있다면 반드시 회개하고 돌이켜야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풍랑가운데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것을 은혜로 수용하고 감사함으로 받아들이고 견뎌나가고 헤쳐나가고 승리해야 할 것입니다. 반드시 이길 수 있는 힘도 주시고 능력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