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더 대왕과 헬라 문화
알렉산더 대왕이 세상을 정복하면서 전 세계가 헬라의 문화에 영향을 받게 되었다. 팔레스타인 지방도 예외는 아니었다. 대표적으로 헬레비즘 문화의 꽃을 피운 곳이 아프리카의 안렉산드리아인데, 알렉산더의 수명은 아주 짧았지만 그가 전파한 헬레미즘 문화는 오래토록 지속 되었다.
에굽과 시리아가 150년 전쟁을 치루면서도 두 나라가 모두 헬레문화의 영향 아래에 있었다. 그리스 본토에서는 오히려 헬레미즘이 침체하고 있었는데 알렉산드리아와 버가모 이런 곳에서는 헬레문화가 꽃을 피우게 된 것이다.
헬레문화의 특징은 무엇인가? 헬라문화의 특색을 살펴본다면 첫째는 공회당을 비롯해서 건축을 하게 되는 건축문화가 아주 발달되어 규모있게 지어졌고 신체를 단련하기 위하여 연무장(체육관)이 곳곳에 지어져서 강한 체격을 연무하는 생활을 했다. 헬라인들은 남성의 우람하고 강한 체격의 남성미에 큰 관심을 가졌다. 그래서 남자들이 몸을 드러내고 경기를 하는 것을 즐겼다. 레슬링의 그레꼬로망형은 그 당시부터 있었던 종목이다. 그리스형과 로마형을 묶어서 선정된 경기 종목인데 그 당시 유대인에게는 아주 망칙한 행동이었다. 남자들이 몸을 모두 드러내고 경기하는 것은 경건치 못한 모습이지만 이런 문화들이 유대인 사회에도 파고 들어오게 되었다.
그리고 민중들이 함께 즐기는 노천극장 같은 것이 여러군데 있었다. 그리고 자유로운 사유를 하게 되는 계기가 되는데 생각을 종교의 틀 속에 고정되어 폐쇄되지 않고 자유로운 생각을 발표할 수 있는 문화가 되면서 자신의 생각과 철학을 남에게 발표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국민의 교양을 높혀갈 수 있었다.
그리스식의 의상을 즐겨 입게 되고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앞선 사람으로 인정이 되었고, 그리스의 어느 철학 학파에 소속되었다는 소속감이 큰 자긍심으로 작용하는 사회가 되였다.
또 여런 신들이 많아서 신화인지 민화인지 알지 못하면서 복잡한 신화를 이야기하고 이런 신화를 알게 되면 헬라문화에 젖은 사람으로 앞선 문화인이라 여겨지는 사회가 되었다. 이러한 그리스 문화는 전적으로 나쁘다고는 할 수는 없다. 다만 신학적으로 본다면 모두 나쁜 것도 아니고 옳은 것도 아니다.
이 문화는 개방적인 사고방식으로 자유시민의 기상을 기르는 계기가 되는데 이것이 오늘날 서구시민문화를 길러내었고 일반 백성들의 의식을 깨치는 데는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헬라문화가 가는 곳마다 서민대중들도 상당히 문화적으로 눈을 높였고, 이런 사상이 유대인들에게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유대인들은 바벨론 포로이전의 유혹은 우상숭배가 유대인에게는 큰 문제 였지만, 바벨론포로 이후에는 헬라문화가 유대인들의 순수한 신앙을 오염시킨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포로기한 시에 돌아온 숫자는 10만명 정도이고 나머지 유대인들은 전 세계 흩어져 버렸다. 북왕국 이스라엘이 BC 721년에 망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할라와 고산 하볼 하숫가와 메데 여러 나라에 흩어버렸다고 했는데, 그 당시에도 흩어졌고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던 유대인들 중에 돌아오지 않고 남아있던 유대인들은 바벨론이 망하고 메데 페르시아 시대를 지나고 헬라시대를 지나면서 온 세계에 유대인들은 흩어졌다.
유대인들만큼 짧은 시간에 많이 흩어져 나간 민족은 없었다. 유대인들은 흩어져 살기로 유명한 민족이다. 그래서 그 때 당시에 메데 페르시아, 바벨론, 안디옥, 다마스크스, 브리기아, 에베소, 버가모, 사르디스 파르티스, 엘람, 메소포타미아, 가파도기아, 폰투스, 아시아, 밤빌리아, 리비아, 로마, 그레데, 아라비아, 이디오피아, 고린도, 데살로니가, 베뢰아, 키프로스 전체 어디를 가도 유대인의 집단촌이 있었다. 또한 유대인들이 모이면 다섯 가정만 되어도 회당을 만들고, 회당에서는 민족교육을 하면서 현지 문화에 동화되가도 하고, 헬라문화에 유혹을 받기도 하는데 그 때 알렉산드리아에서도 상당한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다.
그 당시에 그 유명한 구약성경을 헬라어 번역본 70인역(셉투아젼트)가 완성된 것이다. 70인역은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유대인들을 위해서(이들은 유대인들이지만 헬라어를 사용하고 있으므로 모국어인 히브리어로는 읽기가 어려우니까) 히브리어 구약을 헬라어로 번역한 것이다. 오늘날 성경연구에도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모세5경은 BC 250년경에 이미 모두 번역되었다. 이어서 구약성경 전체가 번역되었고 외경들 까지도 번역되었다. 그 사본 가운데 1부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비취 되어 있었고, 이 때는 애굽왕 돌레미 필리델푸스라는 왕이 통치했던 시기인데 그는 예술 애호가로 이름을 떨친 계몽된 통치자였다. 그는 고대 왕국인데 폐쇄적이 않고 애굽 사람이면서 헬라문화의 진취적인 기상에 매료되어서 책이나 문화를 관용하는 정치를 폈다. 그의 통지기간에 세계사의 불가사의라고 하는 알렉산드리아의 대 도서관이 개관 되었다.
애굽의 왕조를 30왕조로 구분하여 정리하는데 마네토의 대역사책도 톨레마 필라델푸스를 위해 쓰여진 책이라고 한다. 마네토라는 역사가가 역사를 지필하면서 애굽역사를 30왕조로 나누면서 톨레미 필레델푸스 왕이 역사를 소중히 여기니까 역사책을 헌정하듯이 드렸다. 팔레스타인에 남아 있던 유대인들은 자기들만이 정통파 유대인들이라고 생각했지만,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도 나름대로 열심파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알렉산드리아 유대인들이 아주 진취적이면서 개화되고 경건한 유대인들이었다.
그 증거가 율법서를 헬라어로 번역한 것을 볼 수 있는데 당시의 돌레미 도서관의 사서였던 데메트리우스라는 사람이 유대인의 율법에 관해서 왕의 관심을 불러 일으킨 것이다. 왕은 예루살렘의 대제사장 엘르아살에게 사절단을 보내서 율법서를 헬라어로 번역할 장로를 보내달라고 했는데, 처음에 72명을 보내달라고 부탁을 했고 12지파에서 6명씩을 선출하니까 72명이 되었는데 72명이 번역했으므로 이것을 보통 70인 역이라고 한다. 유대교의 학자들 중에서 히브리에도 능통하고 헬라어도 능통한 12명을 보내어 애굽의 파라오섬에 보내어져서 72명이 72일동안 범역을 했다고 한다. 전설같은 이야기지만 72명이 72개의 별실에서 72일동안 번역을 하였는데 번역한 것을 대조해보니까 72명이 똑같이 번역되어졌다는 믿기가 어렵지만 그랬다는 전설이 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 때 당시에 히브리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것은 대단한 일이다. 그야말로 성경이 세계적인 책으로 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 것이다. 그것은 히브리어로 쓰여진 성경을 다른 나라 말로 최초로 번역한 효시라 할 수 있다. 번역된 70인역에 대하여도 영감설을 적용하려고 이런 전설을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시대에 번역을 시도한 것은 하나님의 섭리였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후대 연구에 의하면 70인역의 어투가 그 당시 애굽에 있었던 유대인들의 어투라는 것이 지배적이다. 그러니까 팔레스타인에서 72명을 보내준 것이 아니고 애굽에 있던 사람들이 번역했다는 학설도 있다. 번역판이 그야말로 알렉산드리아에서 영향을 끼치게 되고 이로 말미암아 선교가 쉬웠다는 것이다. 신약시대 초창기에 바울이나 사도들이 온 세계에 복음을 가지고 갈 때 히브리어 성경을 가져 간 것이 아니고 헬라어로 된 구약성경을 가지고 간 것이다. 아직은 신약성경이 완성되지 않은 사도시대 속사도시대에는 70인역의 이 구약성경을 활용하였던 것이다.
신약성경을 읽다보면 구약성경에서 인용한다고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구약성경과 정확하게 같지 않는 부분이 간혹 있어요 이것은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번역한 것을 다시 우리말로 번역하니까 전체의 뜻은 같지만 표현에 차이가 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70인 역을 가지고 신약성경에서 인용한 부분들은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구약성경은 히브리어를 바로 우리말로 번역한 것과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내용에 있어서는 큰 차이가 없습니다
이런 와중에 헬레니즘의 화려한 문화에 쉽게 동화되는 사람도 있었고 어떤 사람들은 정통을 고집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것이 그 당시 헬라문화와 히브리문화의 충돌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도 보수주의자와 개혁주의가 갈등하고 있는 것처럼 그 당시도 마찬가지 였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사상을 고수하던 사람들도 헬라어를 모르면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시대이므로 헬라어를 쓰지 않을 수 없었고 헬라어를 사용하다보니까 언어에는 문화가 베여있으므로 결국은 팔레스타인 전체와 온 세계가 헬라 문화에 물들어가는 그런 시대에 예수님께서 오실 당시의 모습이고 대부분 사람들이 헬라어를 구사할 수 있는 상태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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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라 문화가가 유대인에게 끼친영향
희랍은그리스의 한문이며 그들은 자기나라 땅을 헬라스라고 불렀고 자기들을 헬라인이라고 불렀다. 헬레니즘문화는 희랍본토의 예술과 상업과 사상을 말하며 아테네 사람에 의해서 이루어졌고 헬레니즘적인 문화는 아테네에서 시작된 희랍문화를 말한다.
*헬라
일반적으로 헬라족속을 가리키나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을 가리키는데에 사용되었던 말이다. 헬라파유대인은 헬라어을 사용하는 유대인들로 헬라지역에 흩어져 살던 사람들이다. 추리하고 질문하고 사색하는 것이 헬라인들의 습관이었다. 헬레니즘과 히브라이즘의 상속자, 곧 헬라말을 하는 바울의 논리적인 사고가 이런 사실에서 유래한다. 또한 신약성경의 헬라파 유대인들, 예를 들어 스데반과 빌립 같은 인물들이 옛개념을 개혁하고 재고하여 초대 교회사에 참신하고 힘차고 활력적인 요소를 불어넣게 된 것도 이런데서 연유된다. 바울에게는 가말리엘의 유대교가 필요했듯이 헬라 교육이 필요 했다. 아주 논리적이면서도 기독교 신학의 기초가 되는 언약에 관한 바울의 종합은 헬라적 유대인의 작품이 었다.
*초기 희랍의 역사
희랍역사는 전쟁과 정치적 음모로 점철되어 있다.이러한 문제점들을 슬기롭게 극복한 희랍 사람들의 능력을 보면 강한성품을 지녔으며 미래에 대한 희망적 비젼을 가졌음을 알수 있다.
A. 희랍 문화의 뿌리
3000년경 희랍본토에는 에게해 사람들이 거주하였다. 그레데 섬에는 미노아 사람 희랍인이라 부르는 사람은 기원전1900년 이전에는 오지않았고 지금의 불가리아로 불리어지는 발칸지역으로부터 온 것으로 생각되어진다. 북쪽으로 이주한 사람은 독일어를 상용하였고, 서편으로 이동하여 이태리에 이르고 언어는 로마인들의 언어가 되었다. 남쪽은 희랍어가 되었고 동쪽은 히말라야산맥을 넘어 인도에 이르러렀고, 언어는 산스크리트어(범어)로 보존 되었다. 인도 유럽계의 언어로 유랑민족을 근원으로 수십 가지의 문명이 발달하였고 언어의 근원은 흔적을 통하여 하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B. 왕정시대
초기 희랍역사 다음 단계는 왕정시대라고 부를 수 있다. 희랍에 밀려든 민족이 계곡과 평지들이 손쉬운 정착지의 중심이 되었다. 이러한 도시국가들을 다스리는 것이 왕들이었다. 희랍어의 도시(폴리스)라는 말은 그 도시국가의 통치권이 미치는 전지역을 말한다.(세금을 부과하고 아테네의 시민으로 등록시킴) 왕들은 장사하는 방법을 배우고 문자를 모음을 보태서 사용하였다. 문학작품으로는 호머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 등이 있다.
C. 민주주의 대두
귀족들은 농노들의 희생으로 부를 이루었지만 불의가 성행하고 후기 희랍 종교가 더 발달될 수 있는 분위기 조성이 되었고 이방세계에 복음이 받아들여지는 바탕이 되었다. 귀족은 600년경 자취를 감추고 상인들이 희랍 도시국가의 중요한지도자가 되었다. 도시국가의 부유한 전제군주의 권한을 제한하는 법률을 통과 기원전 500년경 쯤에 그리스에서는 민주주의의 강한 발판이 마련되었다. 이 기간에 희랍어 문화 여러 분야에서 많은 것을 생산하였다. 문학서사시, 건축, 조각, 종교사상 등을 이 때에 유대인들은 포로로 끌려갔고 기원전 586년에 바사(페르샤)가 바밸론을 정복하였고 바사왕 고레스가 유대인들에게 고향에 갈 것을 허락했으나 알렉산더 대왕의 뒤를 이어 그의 영토를 일부 차지한 셀루시드 왕조의 통치 때까지 유대인들의 민족주의는 소생하지 못하였다.
D. 일시적으로 통일된 희랍
스파르타 왕 레오니다스가 텔모필레로 가는 길목을 막아 영웅적으로 싸운 것이 바로 이때였다.아테네 사람들은 여러도시를 규합하여 연합군을 형성하였고 페르샤 해군을 살라미 수해전에서 쳐부수고 쫓아내니 기원전 479년의 일이었다.
E. 펠레폰네스 전쟁
BC 431∼BC 404년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각각 자기 편 동맹시(同盟市)들을 거느리고 싸운 전쟁이 스파르타의 승리로 끝났으나, 고대 그리스 쇠망의 원인(遠因)이 되었다. 델로스 동맹을 지배하는 아테네가 횡포를 부려 제시(諸市)의 자치를 범하고 위협한 때문이며, 또한 스파르타가 아테네의 번영을 시기하고 두려워한 때문이었다. 그러나 직접적인 원인은 케르키라(코르푸섬)와 코린토스의 싸움에 아테네가 끼어든 데 있었다. 상업무역으로 번영을 누리고 있던 코린토스는 아테네의 해상진출에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케르키라와 코린토스의 싸움에 아테네가 케르키라의 편을 들어(BC 433) 양자의 관계는 험악해졌다. 이 밖에도 메가라 등 아테네에 불만을 품고 있는 도시들이 있었다. 코린토스· 메가라 등은 펠로폰네소스 동맹회의를 열고 아테네와의 전쟁을 결의, 스파르타를 부추겨 개전(開戰)하게 하였다. 전쟁은 개전 후 얼마되지 않아 아테네에 페스트가 유행하여 많은 인명을 빼았고 페리클레스도 이 때 병사하였다. 이후 시칠리아 원정에서 패하고, BC 405년 아이고스포타미 전투에서도 패하였다. 또한 델로스 동맹도시들은 점차 아테네로부터 떨어져 나가 아테네는 식량난으로 시달렸다. 아테네는 갈수록 불리하게 되어 BC 404년 마침내 스파르타에 항복하고 말았다. 아테네는 함대를 스파르타에 인도하고 장성(長城)을 헐었으며, 델로스동맹을 해산하게 되었다.
*마게도니아의 등장
기원전 359년 필립2세(PhilipⅡ)라는 젊은이가 마게도니아의 새 왕으로 등글하셨다. 그가 등극하기 전 베베와의 싸움에서 포로로 잡혀 갔었다. 포로로 잡혀 있는 동안 그는 에파미논다스에게서 여러 전법들을 배웠고 이것을 응용하여 오늘날 밀집 전투대형으로 알려진 사선 전투대형을 계획하였고, 강력하고 새로운 마케도니아 군대를 창설하였다. 2000명의 기병으로 구성 8개중대와 근위병 보병대 훌륭한 포위공격용 병기를 개발 하여 중무장하고 작은 방패투구 가슴보호용 갑옷 등을 갖추었다. 정복을 위한 원정의 배후의 위험을 제거하기 위하여 필립은 기원전 358년에 아테네와 평화조약을 맺었으나 재빨리 정복하였다. 희랍반도의 대부분 지역에 대한 통치권을 확립하였다. 야만인으로만 생각했던 마케도니아는 헬라 문화를 여러 나라에 전파 시키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A. 헬라제국의 전진
얼마 지나지 않아 헬라의 도시국가들은 마케도니아 사람들에 저항하는 운동을 벌였다. 아테네인들과 케베인들은 항거하기 위해 연합하였고 두세력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마케도니아 사람들은 케로니아에서 헬라의 세력을 철저히 깨부수고 그리스를 통치하게 되었다. 이 전쟁에서 두각을 나타내면 전쟁터를 누빈 왕이 필립대제의 아들 알렉산더였다. 정복당한 헬라인들이 마케도니아 사람들을 아직도 외방 사람취급을 하였으니 이는 마케도니아 사람들이 헬라어를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헬라의 문화와 언어을 흡수 하였다. 아티크 (attud) 핼러오-고대 아테네에서 사용되었던 헬라어-는 필립에 의해서 국가의 공식 언어로 채택되었다. 그리하여 헬라 반도의 모든 주민들은 같은 언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이 언어를 코이네(koine '공통적‘이란 뜻) 헬라어라고 불렀다. 알렉산더가 진군함에 따라 이 코니네 헬라어는 함께 퍼져 나가 그가 정복한 주변 여러 나가 그가 정복한 주변 여러 나라에 영향을 주었다.
B. 알렉산더 대왕
기원전 356년 경에 출생하였다. 그리 어머니는 그의 아버지 필립2세와 마찬가지로 왕족에게서 태어났다. 14세때 아테네 철학자 아리스토 텔레스의 문화에서 수학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제자 였으면 스승이었다. 기원전 336년에 20세 되었을 때 필립은 누군가에 암살되었고 알렉산더는 새 임금으로 등극하였다. 그의 정적들은 알렉산더가 죽었다고 소문을 퍼뜨렸고 소문 때문에 발생하는 반란을 진압하는데 많은 시간을 소비하였다. 그 과정에서 그는 테베를 쳐부순 빨갱이었고 테베를 쳐부숨으로 헬라 반도 전체에 대한 그의 통치력은 확고한 기반이 세워지게 되었다.
1. 페르샤로 진격하다.
기원전 334년 봄에 알렉산더는 군대 4만명으로 달다넬레스를 건너 소아시아로 진격하여 그래니커스 강에 있는 페르샤 인들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페르샤의 전방 수비대는 경무장된 군대였고 마케도니아 전법에 익술치 않아 궤멸되고 말았다.
그래니커스 강가에서 거둔 큰 승리로 인해 사데, 에베소, 밀레도 등이 알렉산더의 통치하에 놓이게 되었다. 밀레도는 전통적으로 헬레니즘 사상의 발생지였고 사데와 에베소는 신약성서의 초대 교회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었던 곳이다. 알렉산더 대왕 이러한 정복의 결과로 서방세계 문명의 문화적 그리고 경제적 중심지가 생활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동하게 되었다. 알렉산드리아가 희랍의 도시들을 제치고 희랍의 지적 또한 예술적 생활의 중심지가 되었다.
페르샤 왕이 자기 군데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알렉산더는 아시아의 제왕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헬라인들의 설욕전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하여 페르샤 제국은 완전히 격파 되었다.
2. 알렉산더 대왕과 동방
알렉산더 대왕이 엑바타나에 있으면서 그가 새로 계획한 것은 동방을 정복해야겠다는 것이었다. 페르샤 사람들은 인도의 서부지역을 자기들의 영토였다고 오랫동안 주장해 왔다. 동양의 의복을 입어보기 시작한 알렉산더는 자기 군대들로 하여금 동양적 복식을 갖추고 땅에 엎드려서 자기 발에 예배하는 모습을 보이게 했다. 그들은 왕을 존경하였으나 보통 인간인 그를 신으로 생각지 않았다. 엑바타로 돌아온 그는 바빌론의 수도로 와서 아라비아 정보을 위한 준비에 착수하였고 제국을 정비하기 시작하였다. 술을 너무 마셔서 몸이 쇠약해진 그는 말라리아를 이기지 못하고 기원전 323년에 32세 나이로 죽었다.
3.알렉산더 통치하의 유대인
알렉산더대왕은 유대인들에게 호의적으로 대했다 한다. 물질적으로 또한 군대를 동원하여 도와주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대제사장 시몬져스트는 이를 거절하였다 페르샤의 충성하던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시몬이 꿈을 꾸었는데 백성과 함께 나가 이긴 자를 맞아들이라는 꿈이었다.
그가 꿈의 지시대로 맞아들이니 알렉산더는 제사장의 두건에 씌여진 하나님의 이름 앞에 절하였으니 dlsms 그도 꿈에 그 두건을 보았었기 때문이었다. 그후에도 성전에서 예배 드렸고 유대인들에게 자기 지역을 스스로 다스리는 어느 정도의 자치권을 허락하였다.
4.알렉산더 대왕이 끼친 영향
개인적으로는 주로 군사적인 면에 치중한 정복을 했으나 서구 문명이 문화적 발전을 이룩하는데 기초를 세운 것이 되었다. 원정을 통해 코이네(koine) 헬라어가 여러 나라 문명권의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퍼지게 되었다. 널리 알려진 공용어가 바울이 복음을 전하던 시대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쉽게 퍼질 수 있게 도움을 주었다. 사실 상 초기의 신약성서의 사본은 이 코이네 헬라어로 쓰여 졌던 것이다.
5.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후
알렉산더의 후계자가 없으므로 애굽의 톨레미 가문과 시리아의 셀루시드 가문 사이에 전쟁이 학산되었고, 이 전쟁은 로마가 기원전 197년에 이들을 지배하게 될 때까지 끝나지 않았다. 이러한 대립된 싸움은 유대인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치었다. 헬라 문화권으로 개편하는 운동을 진행하였는데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것이 유대인들이었다.
*팔레스타인에 있어서의 헬레니즘
안티오쿠스 4세가 헬라제국 중에서 셀루시드 왕조를 다스리게 되자 헬라문화를 널리 파급함으로 자기의 통치 지역을 만드는 열정을 가졌다. 가장 잔인한 독재자로 알려진 그는 예루살렘을 탄압을 심하게 하였다. 시민들을 학살했으며 성전의 보물들을 약탈하였다.
*성서 역사 에 미친 영향
유대인들은 다른 민족과는 다르게 자기들을 정복하였어도 자기들 것은 쉽사리 내주지 아니하였다. 톨레미 왕조하에서 이루어 낸 뛰어난 문학적 성과 중의 하나가 히브리어 셩경을 코이네 헬라어로 번역한 것이었다. 이 번역본을 70인역이라 부른다. 전해 내려오는 바에 의하면 72명의 유대학자들이 모여서 번역작업을 시작했고 72일만에 작업이 끝났다는 것이다라고 전해진다. 유대인들이 서기는 하나님이 유일하신 참 신이시라는 것을 전도할 때에 코이네 헬라어를 상용하였고 이방인들의 사고방식에 맞는 방법으로 전도하였다. 알렉산드리아는 초대 기독교에 있어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당당하였다.
*신약성서에 미친 영향
바울 서신 속에 헬라파 문화의 영향을 받은 구절들을 다수 찾아 볼수 있다. 바울이 헬라인들이 복음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상당량의 헬라의 지혜를 받아들였던 것 같다. 바울은 철학적 개념들을 자주 사용하였다. 그러나 단지 바울의 가르침의 표현이 있어 강하게 영향을 주었을 뿐이다.
*로마의 통치; 헬라의 문화
그리스는 더 이상 정치적 힘이 없었으나 그 문화와 정신은 로마제국의 문화적 바탕이 되었다. 로마의 저술가 호레이스는 이것을 “피정복 민족인 그리스가 자기를 정복한 자를 정복하였다” 하였다. 코이네 헬라어가 근동지역에서 공식적을 통용되는 언어로 남아있게 되었고 신약성서는 바로 이 코이네 헬라어로 기록된 것이다.
*헬레니즘
1)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의 결과로 생성됨 - 알렉산드리아. “아시아의 왕” 군림, 아리스토 텔레스의 개인 지도를 받음
2) 헬레니즘 - 신약성서를 만들어 냄
3) 하나의 단일 세계 창조 노력 - 결혼작전, 제국 전지역 연락망 구축
4) 헬레니즘화의 과정 - 로마제국(주전 27년) 에서부터 로마제국 이후까지 계속 되는데 로마인들이 그리스 문화를 영속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화적인 혁명에도 불구하고 동방의 헬레니즘화는 제한되었다.
5) 헬레니즘 문화 - 널리 유포되었던 철학중 플랕적인 이원론은 헬레니즘적인 사고에 크게 영향을 주었으며 신약 성서의 여러 곳에 반영 되어 있다.
6) 종교들과 종교 운동들 - 스토아학파 점성학 등이 성서에 영향을 줌
7) 신들과 구원자들 - 영지주의자들은 영지주의적인 구원자를 그리스도와 동일시
했다.
*신약의 세계에 있어서 신학의 바탕을 헬레니즘의 세계에 두는 학자도 있고 유다 세계에 두는 학자도 있으나, 신약 성서는 유대교 속에서 씨앗이 생성되었으나, 유다인들은 예수의 죽음 이후에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였기 때문에 이스라엘 땅을 떠나서 헬레니즘의 세계에서 신약이 싹을 텄다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신약의 생성 역사에서는 헬레니즘과 유다이즘이 모두 다 중요한 비탕이 되었다고 할 것이다.
*유대
바벨론에서 귀한한 포로민의 대부분이 유다지파에 속했기 때문에 그들을 유대인이라 불려지고 그 땅을 유대라고 불려지게 되었다. 바사 왕국 아래서 유대는 일반적으로 유대인 통치관에 의해 행정통치를 받은 지역이 있다. 이켈라오의 추방과 함께 유대는 로마 제국에 수리아령에 합병되었다. 그러나 그 통치관은 로마 황제에 의해 임명된 행정장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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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라어과 헬라 문화
알렉산더 대왕이 세상을 정복하면서 전 세계가 헬라의 문화에 영향을 받게 되었다. 팔레스타인 지방도 예외는 아니었다. 대표적으로 헬레니즘 문화의 꽃을 피운 곳이 아프리카의 안렉산드리아인데, 알렉산더의 수명은 아주 짧았지만 그가 전파한 헬레니즘 문화는 오래토록 지속 되었다.
에굽과 시리아가 150년 전쟁을 치루면서도 두 나라가 모두 헬레문화의 영향 아래에 있었다. 그리스 본토에서는 오히려 헬레미즘이 침체하고 있었는데 알렉산드리아와 버가모 이런 곳에서는 헬라문화가 꽃을 피우게 된 것이다.
헬라문화의 특징은 무엇인가? 헬라문화의 특색을 살펴본다면 첫째는 공회당을 비롯해서 건축을 하게 되는 건축문화가 아주 발달되어 규모있게 지어졌고 신체를 단련하기 위하여 연무장(체육관)이 곳곳에 지어져서 강한 체격을 연무하는 생활을 했다. 헬라인들은 남성의 우람하고 강한 체격의 남성미에 큰 관심을 가졌다. 그래서 남자들이 몸을 드러내고 경기를 하는 것을 즐겼다. 레슬링의 그레꼬로망형은 그 당시부터 있었던 종목이다. 그리스형과 로마형을 묶어서 선정된 경기 종목인데 그 당시 유대인에게는 아주 망칙한 행동이었다. 남자들이 몸을 모두 드러내고 경기하는 것은 경건치 못한 모습이지만 이런 문화들이 유대인 사회에도 파고 들어오게 되었다.
그리고 민중들이 함께 즐기는 노천극장 같은 것이 여러군데 있었다. 그리고 자유로운 사유를 하게 되는 계기가 되는데 생각을 종교의 틀 속에 고정되어 폐쇄되지 않고 자유로운 생각을 발표할 수 있는 문화가 되면서 자신의 생각과 철학을 남에게 발표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국민의 교양을 높혀갈 수 있었다.
그리스식의 의상을 즐겨 입게 되고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앞선 사람으로 인정이 되었고, 그리스의 어느 철학 학파에 소속되었다는 소속감이 큰 자긍심으로 작용하는 사회가 되였다.
또 여런 신들이 많아서 신화인지 민화인지 알지 못하면서 복잡한 신화를 이야기하고 이런 신화를 알게 되면 헬라문화에 젖은 사람으로 앞선 문화인이라 여겨지는 사회가 되었다. 이러한 그리스 문화는 전적으로 나쁘다고는 할 수는 없다. 다만 신학적으로 본다면 모두 나쁜 것도 아니고 옳은 것도 아니다.
이 문화는 개방적인 사고방식으로 자유시민의 기상을 기르는 계기가 되는데 이것이 오늘날 서구시민문화를 길러내었고 일반 백성들의 의식을 깨치는 데는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헬라문화가 가는 곳마다 서민대중들도 상당히 문화적으로 눈을 높였고, 이런 사상이 유대인들에게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유대인들은 바벨론 포로이전의 유혹은 우상숭배가 유대인에게는 큰 문제 였지만, 바벨론포로 이후에는 헬라문화가 유대인들의 순수한 신앙을 오염시킨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포로기한 시에 돌아온 숫자는 10만명 정도이고 나머지 유대인들은 전 세계 흩어져 버렸다. 북왕국 이스라엘이 BC 721년에 망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할라와 고산 하볼 하숫가와 메데 여러 나라에 흩어버렸다고 했는데, 그 당시에도 흩어졌고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던 유대인들 중에 돌아오지 않고 남아있던 유대인들은 바벨론이 망하고 메데 페르시아 시대를 지나고 헬라시대를 지나면서 온 세계에 유대인들은 흩어졌다.
유대인들만큼 짧은 시간에 많이 흩어져 나간 민족은 없었다. 유대인들은 흩어져 살기로 유명한 민족이다. 그래서 그 때 당시에 메데 페르시아, 바벨론, 안디옥, 다마스크스, 브리기아, 에베소, 버가모, 사르디스 파르티스, 엘람, 메소포타미아, 가파도기아, 폰투스, 아시아, 밤빌리아, 리비아, 로마, 그레데, 아라비아, 이디오피아, 고린도, 데살로니가, 베뢰아, 키프로스 전체 어디를 가도 유대인의 집단촌이 있었다. 또한 유대인들이 모이면 다섯 가정만 되어도 회당을 만들고, 회당에서는 민족교육을 하면서 현지 문화에 동화되가도 하고, 헬라문화에 유혹을 받기도 하는데 그 때 알렉산드리아에서도 상당한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다.
그 당시에 그 유명한 구약성경을 헬라어 번역본 70인역(셉투아젼트)가 완성된 것이다. 70인역은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유대인들을 위해서(이들은 유대인들이지만 헬라어를 사용하고 있으므로 모국어인 히브리어로는 읽기가 어려우니까) 히브리어 구약을 헬라어로 번역한 것이다. 오늘날 성경연구에도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모세5경은 BC 250년경에 이미 모두 번역되었다. 이어서 구약성경 전체가 번역되었고 외경들 까지도 번역되었다. 그 사본 가운데 1부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비취 되어 있었고, 이 때는 애굽왕 돌레미 필리델푸스라는 왕이 통치했던 시기인데 그는 예술 애호가로 이름을 떨친 계몽된 통치자였다. 그는 고대 왕국인데 폐쇄적이 않고 애굽 사람이면서 헬라문화의 진취적인 기상에 매료되어서 책이나 문화를 관용하는 정치를 폈다. 그의 통지기간에 세계사의 불가사의라고 하는 알렉산드리아의 대 도서관이 개관 되었다.
애굽의 왕조를 30왕조로 구분하여 정리하는데 마네토의 대역사책도 톨레마 필라델푸스를 위해 쓰여진 책이라고 한다. 마네토라는 역사가가 역사를 지필하면서 애굽역사를 30왕조로 나누면서 톨레미 필레델푸스 왕이 역사를 소중히 여기니까 역사책을 헌정하듯이 드렸다. 팔레스타인에 남아 있던 유대인들은 자기들만이 정통파 유대인들이라고 생각했지만,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도 나름대로 열심파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알렉산드리아 유대인들이 아주 진취적이면서 개화되고 경건한 유대인들이었다.
그 증거가 율법서를 헬라어로 번역한 것을 볼 수 있는데 당시의 돌레미 도서관의 사서였던 데메트리우스라는 사람이 유대인의 율법에 관해서 왕의 관심을 불러 일으킨 것이다. 왕은 예루살렘의 대제사장 엘르아살에게 사절단을 보내서 율법서를 헬라어로 번역할 장로를 보내달라고 했는데, 처음에 72명을 보내달라고 부탁을 했고 12지파에서 6명씩을 선출하니까 72명이 되었는데 72명이 번역했으므로 이것을 보통 70인 역이라고 한다. 유대교의 학자들 중에서 히브리에도 능통하고 헬라어도 능통한 12명을 보내어 애굽의 파라오섬에 보내어져서 72명이 72일동안 범역을 했다고 한다. 전설같은 이야기지만 72명이 72개의 별실에서 72일동안 번역을 하였는데 번역한 것을 대조해보니까 72명이 똑같이 번역되어졌다는 믿기가 어렵지만 그랬다는 전설이 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 때 당시에 히브리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것은 대단한 일이다. 그야말로 성경이 세계적인 책으로 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 것이다. 그것은 히브리어로 쓰여진 성경을 다른 나라 말로 최초로 번역한 효시라 할 수 있다. 번역된 70인역에 대하여도 영감설을 적용하려고 이런 전설을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시대에 번역을 시도한 것은 하나님의 섭리였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후대 연구에 의하면 70인역의 어투가 그 당시 애굽에 있었던 유대인들의 어투라는 것이 지배적이다. 그러니까 팔레스타인에서 72명을 보내준 것이 아니고 애굽에 있던 사람들이 번역했다는 학설도 있다. 번역판이 그야말로 알렉산드리아에서 영향을 끼치게 되고 이로 말미암아 선교가 쉬웠다는 것이다. 신약시대 초창기에 바울이나 사도들이 온 세계에 복음을 가지고 갈 때 히브리어 성경을 가져 간 것이 아니고 헬라어로 된 구약성경을 가지고 간 것이다. 아직은 신약성경이 완성되지 않은 사도시대 속사도시대에는 70인역의 이 구약성경을 활용하였던 것이다.
신약성경을 읽다보면 구약성경에서 인용한다고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구약성경과 정확하게 같지 않는 부분이 간혹 있어요 이것은 히브리어를 헬라어로 번역한 것을 다시 우리말로 번역하니까 전체의 뜻은 같지만 표현에 차이가 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70인 역을 가지고 신약성경에서 인용한 부분들은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구약성경은 히브리어를 바로 우리말로 번역한 것과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내용에 있어서는 큰 차이가 없습니다
이런 와중에 헬레니즘의 화려한 문화에 쉽게 동화되는 사람도 있었고 어떤 사람들은 정통을 고집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것이 그 당시 헬라문화와 히브리문화의 충돌이라고 할 수 있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사상을 고수하던 사람들도 헬라어를 모르면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시대이므로 헬라어를 쓰지 않을 수 없었고 헬라어를 사용하다보니까 언어에는 문화가 베여있으므로 결국은 팔레스타인 전체와 온 세계가 헬라 문화에 물들어가는 그런 시대가 예수님께서 오실 당시의 모습이고 대부분 사람들이 헬라어를 구사할 수 있는 상태에 있었다.
구약 성경은 히브리어와 약간의 아람어로 기록되어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사용하던 언어가 히브리어였기 때문에 구약 성경이 히브리어로 기록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신약 성경은 헬라어로 기록되어 있다. 신약 성경이 헬라어로 기록된 것은 당시의 세계 공용어가 헬라어였기 때문이다. 알렉산더 대왕이 세계를 정복하면서 각 나라에 헬라 문화를 퍼뜨렸다. 이로 인해 알렉산더 대왕이 정복했던 각 나라에는 헬라 문화가 침투하게 되었으며, 후에는 헬라어가 세계 공용어로 사용되게 되었다(오늘날의 영어와 같이). 그리고 그 후에 다시 로마가 세계를 정복했는 데, 헬라 문화의 영향은 계속되었다. 복음이 전파되던 사도 시대는 로마가 세계를 정복한 시대였으며, 이때에도 국제 공용어는 헬라어였다. 사도들은 이방인 세계에 사는 사람들을 위해 복음서, 서신들을 기록하면서 그들이 읽을 수 있도록 헬라어로 성경을 기록했다. 실제로 유대인들을 위해 쓰여진 책은 마태복음, 히브리서, 야고보서 정도이고, 나머지는 대부분 이방인 세계에 살고 있는 성도들을 위해 기록이 되었다. 그러므로 신약 성경이 헬라어로 기록된 것도 당시 상황에서 자연스럽고 또 효과적인 방법이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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