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음 글은 cafe.daum.net에 사랑하는교회에서 “종북좌파들은 극혐하지만 세계가 극찬하는 박정희의 19가지 업적” 글을 “폄”
박정희 대통령 그가 어떤 과오가 있었던 것은 분명 사실이나, 결과론적으로 경제발전과 안보, 국가 성장, 가난 극복의 공헌이 수백배 이상 되며(북한에 일제가 남긴 많은 공장들에도 불구하고 ) 북한을 세계 최빈국수준으로 떨어뜨리고, 50년대 중반부터 북한국민 300만명을 학살한 김일성과 또한 300만명 이상 굶겨죽인 김정일의 사악한 독재에 비하면 박정희는 몇 만 배 더 잘한 것이다.
이러한 객관적인 사실들을 공산 좌파들은 인정하지 않는 현실이 안타깝다. 또한 기독교에 대단히 우호적이었으며, 박정희 정권 기간에 개신교는 폭발적으로 성장했었다.
1. 최초로 의료보험제도 실시
불완전한 시작이었으나, 이것도 후진국 치고는 대단히 앞서간 시스템이었다. 미국 같은 나라들은 의료보험제도가 안되고 민간 보험에 의존하는 까닭에 병원비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나와서 돈 없는 이들은 끙끙 앓다 죽는 케이스가 많았다. 지금도 미국은 공공의료보험을 생각하지도 못하고 있다.
군사정권시절에 의료보험체계를 완성시켰다. 우선 모든 병의원들은 강제로 의료보험정책에 귀속시켰다. 즉 서구처럼 국가보험환자 안받는 병원은 애시당초 존재할 수가 없었다.
반면 의사들의 불만을 잠재우기위해 '행위당 수당제' 즉 자율수입을 보장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절묘한 결합을 통해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보험시스템을 만든 것이다. 군사정부가 아니었으면 탄생할 수 없는 시스템이다.
그 결과 한국의 의사들은 죽기살기로 일했다. 하루진료 60명은 기본이요, 100명이상 처리하는 경우도 수두룩하다. 가장 효율적인 시스템인 것이다.
미국이나 캐나다에서 CT한번 찍으려면 대기가 석달이다. 기다리다가 저절로 낫거나 죽을판이다. 교포들이 한국와서 치료받는건 다 이유가 있다.
2. 대대적인 산림 육성으로 세계4대 조림성공국 반열에 오름
우리나라는 옛날부터 나무를 베어 연료로 사용하였다. 그 결과 조선 중기 이후로 거의 모든 산이 민둥산이 되어 홍수, 가뭄 등 많은 재난의 원인이 되었다.
박정희는 식목일을 제정하고 전국적인 식목행사를 실시하여 광야와 같던 국가를 푸르른 숲의 나라로 바꾸어 4대 조림 성공국이라는 세계의 극찬을 들었다. 석탄, 원자력 등의 자원개발로 저렴한 에너지원을 공급함으로써 국민들이 나무를 베지 않게 만들었다는 이유도 크다. 그러나, 북한은 아직도 민둥산이다.
현재 대한민국은 세계가 인정하는 산림강국이다. 1969년 한국의 산림 황폐화는 고질적이라서 치유불가능하다는 평가를 내린 바 있는 UN에서도 1982년 FAO보고서를 통해 "한국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산림복구에 성공한 유일한 국가“라고 했으며, 전 세계 환경정책의 대부라 불리는 레스터 브라운은 자신의 저서 [플랜B 2.0]을 통해 "한국의 산림녹화는 세계적 성공작"이라며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산림녹화는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평가받았던 나라, 대한민국이 어떻게 산림강국으로 우뚝 설 수 있게 된 것일까? 치산녹화 10개년 계획 수립 이후 새마을운동을 통해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산림녹화를 추진한 당시 박정희 정부의 결단력과 현신규 박사를 비롯한 대한민국 산림녹화의 선각자들, 그리고 산림녹화는 곧 내 고장 살리기라는 것을 공감하고 녹화조림에 열과 성의를 다한 국민 등 민둥산의 가난한 나라가 세계가 부러워하는 산림강국으로 성장하는 과정은 인간승리의 역사였다.
3. 경부고속도로 등 대대적인 고속도로 사업으로 전국을 일일 생활권으로 만들었다.
경부고속도로 착공에 김영삼 김대중이 경부고속도로 건설 반대로 도로공사장에 들어누워 중기 토목공사 작업을 방해하하였다.
다른 후진국들도 마찬가지겠으나 한국은 교통이 극악할 정도로 불편한 나라였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도로로 15~20시간 정도가 소요되었다. 이렇게 열악한 도로여건은 물류이동과 경제발전에 심각한 악영향을 주었다.
한일협정에서 일본으로부터 3억달러(1달러를 1300원으로 계산시 약 3900억원 => 2023년 현재가치로 19조원 이상 )의 큰돈을 받았는데, 그 중 일부로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일부 박정희를 부정하고 군사독제라며 박정희를 부정하는 일부 정치 모리배들은 36년간의 압제를 생각하면 보상금액 너무 적다고 비난하고 이에 항의하여 연일 시위농성만 저질렀다.
정작 이들은 한일간 국교 정성화도 생각하지 않고 그저 반일 감정만 축적하며 원수로 지내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며 배상액이 적다는 비난도 있으나, 배상을 못받은 것에 비하면 잘한 것이다. 실제로 중국, 대만, 베트남 등은 우리와 같이 일본에 배상요구도 하지 않았고 배상받지 못했다가 우리나라에 배상해준 것을 기준으로 귀신 떡 갈라주듯이 조금씩 나눠 준 것이 전부다.
그래서 일본이 더 적게 준대도 우리가 거부할 입장은 아니었 것을 고려하면 엄청난 많은 액수를 보상받은 것이다..
일본에서 배상금은 받오오니 김영삼, 김대중 등 모든 야당정치꾼들은 돈있으면 가난한 사람이나 줄 것이지, 차도 없는 나라에서 부자들이 놀러 갈 도로나 만든다고 비판하며 고속도로 착공식 현장에 드러누워 방해시위를 한 것은 잘 알려진 사건이다.
그러니까 김영삼은 집권중에 경제는 잘 모르고 갱제는 잘한다고 한 것이 IMF를 가져왔고 김대중은 IMF를 빌미로 국가의 주요 재산은 해외에 매각하여 한주머니 챙기고 결국 박정희 대통령과 선거판에서 선거자금 모금을 전라도 할머니들 손가락에 금반지를 빼주는 운동은 전개한 것을 재현하여 금모으기운동으로 자신의 배만 불리는 결과를 초래 하였다.
다시 말하면 정치인은 국가와 국민을 위해 청렴하게 국가를 경영하고 국정을 살피지만 정치꾼은 권력을 이용하여 자신의 주머니만 채우고 나라 곳간만 허물어트리는 것으로 정말 박정희와 김영삼, 김대중이 대비된다.
실례로 문재인 정권 5년동안 나라 빚 1000조를 윤석열 정권에 안겨주고 문재인은 양산에 아방궁을 지어 퇴임하여 탱자탕자하며 잘 살고 있다.
이것은 경제성장의 비전이 전혀 없었던, 민주화 세력들의 근시안과 어리석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아무튼 경부고속도로는 전국을 1일 생활권으로 만들었으며 급속한 경제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4. 소양강댐 등 여러 댐으로 홍수 방지 및 가뭄 극복하여 한국사 최초로 치수에 성공
조선중기 이후로 수백년 동안 한국은 최빈국 수준의 가난한 나라에 불과했다. 그 이유 중에는 자급자족형 농업정책이 있었는데, 농사만 짓는데도 불구하고, 봄, 가을 가뭄과 여름 홍수로 농작물이 흉년이 들 때가 많아 풍요롭기는 커녕 하루 세끼 먹기도 힘든 때가 많았다.
박정희 대통령은 요임금의 치수 정책을 익히 잘 알고 있었다. 모든 인간사에는 늘 재난이 있다. 국가는 그 재난에 잘 대처하여 국민이 피해가 없도록 하여야 하며 혹 국민이 피해를 당했을 때 구제를 신속하게 하여야 한다.
재난은 전쟁이나 기근, 무질서와 부주의에 의한 인재도 있지만, 자연 재난도 엄청나다. 자연 재난은 태풍, 홍수, 폭설, 가뭄, 등 다양하다. 재난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왕은 쫓겨나는 경우가 있었으며 현대에도 그런 지도자는 쫓겨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박정희는 치수에 남다른 관심과 최선의 결행을 하였다.
고대부터 이어온 전통 농경사회에서 큰 재난 중 하나는 가뭄과 홍수였다. 가뭄과 홍수가 닥치면 농사는 지을 수 없으며 농사를 짓지 못하면 백성은 살 수가 없다. 나아가 나라의 재정이 바닥이 나서 정권을 지탱할 수 없다. 따라서 그에 대한 대책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그래서 현명한 군주는 치수(治水)에 집중하였다. 우리나라의 경우 치수 사업은 근대화 과정에서 대대적으로 진행되었으며 지금도 중요하게 진행되어 오고 있다. 지금의 치수 사업은 단순히 홍수 피해를 줄이고 농사에 필요한 물을 이용하는 것을 넘어, 모든 산업의 근간을 이룬다.
이는 물부족 국가에서 일부 저수지를 제외하곤 치수가 거의 되지 않았던 까닭이 크다. 박정희는 소양강댐 · 안동댐 등 전국에서 10개 이상의 댐을 만들어 단군 이래 최초로 치수에 성공한 지도자가 되었는데, 완벽하진 않으나 농업용수 확보와 홍수조절, 전기 발전 등으로 많은 기여를 하였다.
그렇게 많은 댐을 만들 수 있었던 이유는 개발독재시대였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더 이상 댐들을 만들지 못하고 있는데, 현재는 민주주의를 강조하므로 주민들이 결사반대하면서 땅값을 크게 부르면 강제수용을 통하여 땅을 매입하기 힘든다.
5. 제주도를 종단하는 516도로 개통 및 국제관광지 프로젝트 시작하였다.
6. 농촌 진흥과 국민의 근면 자조 정신을 일깨운 새마을운동 실시
당시는 서울도 가난했으나. 농촌은 초가집으로 도배된 빈민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세계 최빈국의 가난한 현실과 도박과 알콜중독 등으로 인한 패배주의에 빠져있던 국민들에게 적극적인 마인드를 세뇌하여 하면된다 우리도 할 수 있다 잘살아보세 등의 긍정적 자신감을 심어주었으며, 새마을운동을 통한 마을 개조와 초가집, 판잣집 등의 주거여건을 개혁하였고, 건축자재 대량생산으로 많은 건설회사들을 성장시켰다.
이때부터 생겨난 건설회사가 지금세계 최고의 기술개발로 전세계에서 가장 높은 1,2,3위의 고층 건물은 우리나라 건설사삼성에서 건설하였고 지금 전세계의 최고난위도 토목공사나 해저터절공사는 우리나라기술이 최고로수주의 대부분을 우리나라 건설사가 맡고 있다.
이를 두고, 민주세력들은 새마을 운동의 공동체 작업을 시켜 놓고 월급도 주지 않는 강제동원이었다고 비난하지만, 중요한 점은 국민들의 생활을 크게 업그레이드시켰다.는 것이다.
만약 댓가를 지급하려고 했으면 국가에 돈이 없어 결국 실패했을 것이다.
“새마을운동은 우리나라가 가난을 극복하고 전 세계에서 유례없는 경제 발전을 이루는 데 밑거름이 됐다. 단순히 농촌 삶의 변화만 가져온 것이 아닌, 국민에게 ‘할 수 있다’ ‘하면 된다’는 자신감과 도전정신을 심어준 것이 가장 큰 성과라고 생각한다.”
우리보다 잘 살던 라오스, 캄보디아, 필리핀 등은 아직도 옛날 판잣집에서 사는 이들이 엄청나게 많다.
김영삼 정부 때부터 박정희 업적 지우기로 군사독재정부로 매도하여오다 문재인 정부들어 일부 종북좌파 세력들이 새마을 운동은 박정희 관제 관변운동이었다고 폄해하고 새마을운동 자체를 부정하며 각급 관광서 게양대에 태극기를 가운데 양쪽에 기관기, 그리고 새마을 기를 계양하던 것을 새마을기 게양을 자제하라고 하여 지금은 새마을기 조차 찾아 볼 수 없다.
7. 자동차산업 육성
모든 전문가들 조차 반대하던 자동차산업이 이토록 크게 성장한데는 박정희의 육성정책이 큰 영향을 미쳤다. <현대>의 노력이 제일 크지만, 만약 박정희가, 나름 경제를 위한답시고 반대했다면 자동차산업은 시작도 못하고 파산했을 것이다.
박정의 대통령의 중공업 정책과 정주영 회장의 뚝심으로 국내 자동차 산업이 효자산업으로 우리 국민들 먹여 살리는 산업으로 발전시켰다.
8. 통일벼 등의 녹색혁명으로 보리고개 극복 및 식량자급 성공
한국은 조선중기 이후로 매년 보리고개 때마다 30~50만명 이상 굶어죽던 대단한 식량난의 국가였다. 오죽했으면 "진지드셨습니까"가 인사말로 쓰일 정도였다.
박정희는 통일벼 등을 적극 개발하여 세종대왕도 못했던 식량의 자급에 성공하였으며 단군이래 최초로 보리고개를 완전 극복했다.
9. 화교 상인 억압하여 국가 부의 유출을 방지
한국경제는 1950년대까지 화교(중국인)들이 상당 부분을 장악한 상태였다. 50년대의 한국은, 현재 원화 가치로 10억원정도만 있어도 수천평 정도는 우습게 살 수가 있었는데, 그 정도의 자금력을 동원할 수 있는 사람들은 중국인들이 많았고, 그들이 땅을 사고 투자를 하여 다시 지역과 경제를 장악하는 악순환(?)이 계속 반복되었으며, 그러한 와중에서 한국인들은 그들에 종속되어 갔다.
이것을 걱정한 박정희는 화교들의 재산권과 투자를 철저히 억압한 결과 화교들의 남한경제 장악을 막았으며, 한국인에 의한 자본 축적을 가능케 했던 것이다.
(현재도, 캄보디아, 태국,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 많은 국가들이 화교들에 의해 경제가 장악돼 있다)
그런데 문재인과그 일파 즉 반일, 친중, 종북 운동권 출신들은 정권을 잡자말자 50년 정권을 유지해야 한다고 지랄하면서 국내에 중국동포들을 해외근로자 수입에 우선채용하는 등으로 대거 입국을 추진하여 이들에 선거권을 주고 의료보험 혜택까지 주면서 각종 선거에 이용하면서 지금은 골치아픈 조선족세력화가 되었다.
이제 이들을 단순조직이 아닌 정치 조직화 하고있어 쉽게 내보낼 수도 없게 되었다. 총선이후 여소야대가 해소되면 중국 조선족에대한 특단의 대책이 요구되고 있는 실정이다.
10. 한일협정 체결에 성공하여 댓가로 얻어낸 막대한 청구비로 1960년대 경제발전의 토대를 닦았다.
당시 받았던 3억달러는 현재가치의 19조원에 해당한다. 또한 2억달러의 차관을 빌렸다 . 5억달러를 현재돈의 가치로 환산하면 31조원 정도 된다.. 이것으로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루었다.
좌파 민주세력들은 처음엔 한일협정에 반대하더니 나중에는 댓가로 받은 돈이 너무 적다고 비난하였다.
( 물론 이명박처럼 당시 한일협정에 반대하다가 나중에 우파로 변신한 사람도 있음) 더 받으면 좋겠지만, 일본이 더준다는 보장도 없고, 그 정도 받은 것도 잘 한 것이다.
11. 철강산업을 육성시켜 세계적 규모의 철강업체의 기반을 닦았다.
포항제철도 많은 민주세력들의 근시안적 반대 속에 박정희의 의지와 박태준의 끈기로 관철되었다.
12. 선박 불모지에서 선박 육성 계획을 통해 세계적 조선산업의 기반을 구축했다.
13. 농업이 아닌 경공업과 중화학공업을 육성하여 경제개발의 기틀을 다졌다.
전세계에서 자원 없는 수많은 국가들이 실패하는 공업화를 박정희는 성공했다.
오늘날 좌파세력들은 박정희의 공로 보다 노동자들의 노력이 더 컸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수출드라이브와 공업화정책을 통해 대기업을 육성하고, 그 대기업들이 노동자들에게 기술을 전수하여 숙련공을 만들었다고 보는 게 더 타당하다.
가령, 기업들이 용접공을 뽑지 않는데 사람들이 용접 기술을 배우겠는가? 차라리 농사기술이나 익히려 할 것이다.
이는 부자집 도련님이 아무 일도 해보지 않고 책상머리에서 공부만 하다 교수나 언론 등에 있는 좌파들이 경험측이 아닌 짧은 상식에 무식이 묻어나는 소리로 시쳇말로 서민을 위한 발언이랍시고 박정희의 산업화정책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근로자의 근로가 중요했다며 박정희를 폄훼하는 무식힌 부류의 탄식의 목소리라 생각하면 된다. 노동자 타령은, 박정희를 깎아내리기 위한 억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14. 원전과 수력발전으로 막대한 전력을 저렴하게 공급하여 한국기업들의 경쟁력 강화와 원가 절감에 기여했다.
한국이 고도성장을 하는데 커다란 기여를 한 것이 저렴한 전기값이었다. 박정희 전에는 한국보다 잘 살던 라오스, 캄보디아, 필리핀, 많은 아프리카 국가들이 아직도 빈번한 정전에 시달리고 있다.
박정희는 원전 등으로 전기를 대량생산하여 안정적으로 공급함으로써 기업들의 생산성에 크게 공헌했다.
15. 안팎의 극심한 반대에도 효자산업인 반도체 전자공업의 기초를 놓았다.
한국을 먹여 살리는 반도체는 삼성 이병철 회장의 결단으로 시작되었지만, 역시 많은 전문가들의 반대에 부딛혔다. 그때 만약, 박정희 대통령이 전문가라는 사람의 말을 믿고 반대했다면 시작도 못하고 좌초했을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는 이병철과 독대 후 반도체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적극 지원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오늘늘 우리가 먹고사는 반도체산업이 육성된 것이다.
16. 북한에 비해 열세인 국방력에도 전국가적인 노력으로 이를 극복하여 철통같은 국가안보를 실현시켰다.
70년대까지 대체로 남한은 소련에 적극 지원을받는 북한에 비해 군사력이 열세였다. 그러나, 박정희는 전방위적인 국방정책으로 국가안보를 유지했다.
70년 대선에 나와서 박정희와 피말리는 경쟁을 했던 김대중 후보는 대선에서 국가안보에는 관심도 없었고 국방에 대한 기초적인 상식도 없어 600만 예비군 철폐를 공약으로 내세우기도 했다.
만약, 그가 대통령이 되었으면, 남한의 국방은 크게 흔들렸을 것이다. 하지만, 박정희는 적극적인 예비군 정책을 유지했으며 월남전쟁으로 미국이 약해진 시기에도 북한의 오판을 막았다.
17. 오일쇼크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전략적 중동진출로 토목, 항만, 건설 분야에서 상당한 외화를 획득하였다.
변변한 기술도 없는 나라가 외국에서 대규모공사를 따낸다는 것은 사실 기적에 가까운 업적이다.
18. 경제개발5개년의 계속된 성공으로 유럽의 100년에 걸친 성장에 버금가는 발전을 19년만에 실현 시킴으로서 한강의 기적을 만들었다.
박정희는 본인이 경제에 일자무식함에도 불구하고 전문가들의 의견을 적극 수용하여 농업에서 공업으로의 전환을 추구했으며, 강력한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수출드라이브로 세계가 극찬하는 급성장을 이루어냈다.
1960년까지 1인당 GNP가 1년에 79달러에 불과하던 세계 최빈국 수준이었던 남한은, 1979년에는 1인당 GNP가 1693달러로, 19년 동안 무려 2140%의 고도성장을 실현시켰다. (이는 자원없는 국가로는 기적의 성장률로써, 중공이 80년에 자본주의를 적극 수용하여 급성장 하기 전에는 세계 최고의 성장률이었다)
거지국가가 이렇게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외국에서 돈과 기술을 빌려오고, 공장들과 도로와 항구를 만들었으며, 동시에 저렴한 전기를 공급하고 저렴한 노동력을 유지하는 등의 다차원적인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김영삼과 김대중을 비롯한 거의 모든 민주세력들은 산업화와 수출정책을 강하게 비판했었다. 그들은 공장과 고속도로 지을 돈이 있으면 국민에게 나눠주고, 수출 대신 농업 발전에 투자하라고 비난했다.
1970년 대선에서 김대중은 "수출형 산업화에서 수입대체형 산업화로 바꿀 것"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한마디로 말해, 수출하지 말고, 수입품이나 자체 생산하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수출을 해야 외화를 벌어오는 것이며, 수입품도 필요하니까 수입하는 것인데, 자전거도 못만드는 나라가 무슨 기술로 수입품을 대체하겠는가. 황당한 어불성설이다.
물론, 김대중이 나중에는 IMF를 극복하는데 공헌이 있다는 점은 높이 평가하지만, 70년에 대통령이 되었다면, 우물안개구리 같은 마인드로 나라를 쫄딱 말아먹었을 가능성이 높다. 경제발전은, 좌파들의 주장처럼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19. 전국적인 조직폭력배 소탕
1950년대 한국은 수많은 조폭들이 활개를 치며 국민들을 괴롭히는 국가였다. 인권을 강조한 419 민주정부에서도 거의 솜방망이 처벌을 집행하여 대부분의 조직들은 건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박정희는 516후에 혁명위원회를 발족시켜 전국적인 조폭소탕전을 벌였으며, 서울에서만 무려 2천명 이상, 전국에서 수천명의 조폭을 검거하여 두목들에 사형을 집행하는 등 엄벌을 집행하고, 많은 조폭들을 도로건설과 탄광개발 등에 투입해서 국가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으며, 치안을 확립하였다. 지금은 세계 최고의 치안질서와 사회안정 국가로 세계의 자랑꺼리다.
이는 독재가 다 나쁜 게 아니라, 어떤 경우에는 인권팔이 민주주의 보다 공익에 도움이 된다는 간접증거가 될 수 있다.
아무튼 박정희가, 매년 30만명씩 굶어죽던 보리고개를 극복하고 경제발전 시키지 못했더라면, 지금도 많은 나라처럼 거지 국가로 남아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산좌파들과 그들에 세뇌당한 국민들은, 김일성 김정일의 학정은 일체 모른체 하면서도, 민족을 절대 가난에서 구원한 박정희의 업적을 깎아내리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지금의 난국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정치판을 완전 물갈이 하고 국민정신 개조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래서 지금부터 차근차근 쓰레기를 치우고 썩은 곳을 도려내고 구멍난 곳을 수리 하자면 한代(30년)는 흘러야 한다.
공산좌파들의 똥은 똥파리들이 들끓어 항상 구더기가 득실 그리기 때문애 아무리 쓸고 딱아도 구더기를 驅除하지 못하면 소용이 없기 때문에 오랜 세월이 걸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