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금함의 정량
이인원
호두알이 동글동글한 여유를 손안에 굴려보는 모처럼의 호사, 문득 반질반질 길든 호두알 속에 궁금해지는 딱 그만큼이 오늘 내 궁금함의 정량 그렇다고 정말 망치를 찾아 깨어본다면 바로 입이 궁금하다고 라면에 밥까지 말아먹지 않듯이 아름다운 소식을 위해서는 그저 앞에 놓인 튀밥이나 집어먹으며 호두알만 계속 굴리면 된다 바싹 바싹 귓전을 간질이는 뻥튀기소리를 즐기면서 호두알 표면이 얼마나 더 반들거리나 잠시 살펴보면 된다 그러다가 보면 세상 궁금해진 어린 싹이 스스로 빼끔 고개를 내밀 듯 어느 날 불쑥 저 문을 밀치고 반가운 얼굴 들이닥칠 것이므로 그때까지, 한 티스푼 정도의 느긋함만 보태면 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심도 너하고 나하고의 그리움의 정량도 딱 이만큼이라면 견딜만하겠다
- {궁금함의 정량}(작가세계, 2013년) 에서
존재에 대한 예의
- 이인원의『궁금함의 정량}의 시세계
신진숙
이인원 시인은 그녀의 네 번째 시집 『궁금함의 정량』에서도 삶에 대한 그녀만의 고유한 인식을 유지하고 있다.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의 의미를 탐구하며, 육체와 정신의 위계와 경계들을 넘어 에로스적 관점에서 세계 자체를 재사유한다. 이러한 탐색은 본질을 추구하되, 세속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 삶의 태도로 견지된다. 본디 몸적 사랑은 진실에 대한 추구와 다르지 않다. 몸은 그 자체로 물화된 마음이며, 마음의 생성은 몸이 있기에 가능하다. 따라서 에로스는 몸과 마음을 일치시키는 행위로서, 우주를 살아 움직이게 하는 에너지의 ‘근원’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에로스는 삶과 죽음, 나와 너 사이를 구분하지 않는다. 에로스를 육체적 결합으로 한정하는 것은 금욕적 형이상학의 시선이다. 물론 몸을 배제한 금욕주의적 이념만으로는 우주의 원리에 근접할 수 없다.
이 점에서 이인원 시인은 에로스를,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생과 사, 몸과 영혼, 존재와 비존재 사이를 이어주는 힘의 근원으로 탐색하려 한다. 에로스적 가능성은 현대문명이 부여하는 기계론적 관계성에 대한 부정의 토대이다. 이인원 시인은 오래도록 에로스에 대한 상상을 통해, 불모에 가까워지는 현대문명이 진정으로 살아 있는 생으로 전환되기를 꿈꿔 왔다.
이 때문에 이인원 시인은 세계를 관계론적 관점에서 해석한다. 나와 너 사이에는 수많은 경계에도 불구하고 이어질 수밖에 없는 연결선들이 존재한다. 나라는 존재는 너라는 존재의 토대 위에서 출발한다. 만일 존재론적인 이 연결선들이 없다면, 어떤 존재도 자신의 의미를 발견할 수 없으리라. 이인원 시인에게 에로스가 생에 대한 철학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주체와 타자 사이의 관계성에 대한 깨달음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삶의 토대는 어떻게 발견되는가. 우리는 어떻게 존재의 바탕에 타인(타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까. 물론 이인원 시인은 이 부분에서 막힘없이 말한다. 삶의 본질을 깨닫게 하는 것은 삶의 ‘채움’이 아니라 삶의 ‘비움’이라고. 진정으로 자기 자신을 비울 때 세계는 그 본래적 의미를 회복할 수 있다. 그녀의 이러한 생각은 「피정」이라는 시에서 구체화된다. 이 시에서 주목해서 보아야 할 것은 세계에 대한 시선, 시인이 세계를 관계론적으로 재사유하는 과정이다.
조금 먼저 내린 눈송이가
조금 뒤에 내리는 눈송이에게
말없이 어깨 내밀어주는 아침부터
조금 늦게 당도한 어둠이
조금 일찍 도착한 어둠의 어깨에
말없이 머리를 기대는 저녁
꽁꽁 잘 뭉쳐진 고요 한 덩이만으로
조금도 목마르지 않은 날
내일은
조금 빨리 왔던 내가
조금 천천히 오고 있는 네게
말없이 자리 비워주는 날
- 「피정」 전문
이인원 시인이 생각하는 ‘비움’이란 어떤 의미인가. 그것은 누군가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는 행위를 의미한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에로스적 실천을 위한 하나의 윤리적 배려라고 말할 수 있다. “조금 먼저 내린 눈송이가// 조금 뒤에 내리는 눈송이에게”, “조금 늦게 당도한 어둠이// 조금 일찍 도착한 어둠의 어깨에”, “조금 빨리 왔던 내가// 조금 천천히 오고 있는 네게” “말없이 자리 비워주는 날”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 모두는 오로지 소유와 이기심만 가득한 자기애(愛)에 사로잡히고 말 것이다. 그 점에서 세계에 대한 관계론적 깨달음은 단지 한 존재의 삶을 다시 이해하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관계를 통해 세계와 나, 나와 타인(타자), 우주와 인간을 근원으로 돌아가 다시 재고(再考)하게 만든다.
그래서 시인이 다음과 같이 풍경을 노래할 때,
진종일 세상 것 다 녹여버릴 듯 찬란한 진통의 막바지
아랫배를 움켜쥐며 질펀하게 쏟아내는 저 비릿한 피, 바다,
양수에 젖은 새까만 밤의 머리통이 産道를 마악 빠져나오려 하는
- 「수중분만-강화도 노을」 부분
그것은 에로스가 어떤 고통을 담보로 출발하는지를 알게 해 준다. 자신의 일부를 내어주는 용기가 없다면, 새로운 삶은 잉태되지 않는다. 우주는 날마다 노을을 만듦으로써 우리에게 이 평범한 사실을 깨우쳐주고 있지 않은가. 시인이 자주 여인의 몸을 자신의 시적 주체로 내세우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여성의 몸은 영겁의 세월 동안, 타자를 위해 자신의 내부에 빈 곳을 내어주고, 자신의 몸을 열어 그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고통 속에서도 타자를 출산하며 또 키워낸다. 이것이 이인원 시인이 생각하는 바, 에로스가 하나의 정념을 넘어 윤리에 도달하는 과정이다.
때문에 시인은 성(聖)과 속(俗)의 구분 자체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모든 성역(聖域)은 결국 성역(性域)이다. 성(聖)과 성(性)을 구분하는 것은 인간의 굳어진 관념에 의한 것일 뿐이다. 생명 가진 모든 것 가운데 그러한 구분에 얽매인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무량수전”에 대한 그녀의 상상은 이렇게 탄생한다.
무량수전 뒤
뒤늦게 발정 난 응달이 댓잎자리를 펴놓고
눈이 퀭한 별빛과 매일 밤 달디 달게 살을 섞고 있었네
- 「겨울은 왜 긴가?」 부분
그러나 에로스는 어떻게 철학과 다르지 않게 된 것일까. 그것은 이인원 시인이 생각하는 생과 사의 의미 속에서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다. 생에 대한 에로스적 관점은 그 관계론적 사유의 장을, 있음과 없음을 구분하지 않는 존재론적 사유에까지 가 닿도록 만든다. 기실 모든 에로스를 생의 충만함으로 표현하는 것은 일면적인 이해라는 한계를 벗어날 수 없다. 에로스란 그 자신인 동시에 그 자신 너머의 어떤 것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다면, 나라는 존재는 너라는 존재에게 가 닿을 수 없다. 즉, 에로스는 생의 다양한 모습, 이를테면 죽음과 고통까지도 충일한 삶의 조건으로 받아들인다. 에로스와 타나토스는 다르지만 분리된 것은 아니다. 삶이란 이 둘이 혼재되어 있는 어떤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의 에로스는 그 안에 내재된 타나토스의 울림을 이해할 때, 다른 존재와 그 존재로부터 울려나오는 고통의 목소리를 포옹할 때 존재한다. 같은 의미에서 이질적인 것이 아닌 동일한 것에 대한 사랑은 에로스가 아니다. 다른 것, 이해할 수 없는 것, 그래서 고통스러운 이질성에 대한 포옹이 사랑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귀청」을 읽어 보련다.
허물이 저를 닮은 게 아니라
제가 허물을 닮았다는 걸
깜깜 모르는 매미여
맴, 맴, 맴, 맴, 맴,
한 시절 목이 쉬게 읽어도
마음, 이라고 똑바로 못 읽고 가는 마음이여
허물과 몸
서로 너무 바툰 곳에 있어
허물로 밖에는 감싸줄 게 없는 몸이여
맴, 맴, 맴, 맴, 맴,
한평생 애가 터지게 불러도
두 번 다시는 벗어버릴 수 없는 깜깜함이여
그 보다 더 깜깜절벽인
내 귀청이여
- 「귀청」 전문
“깜깜함”은 단지 밝음에 대한 대칭적 의미에 불과한 것일까. 어둠은 언제부터, 밝음을 비추기 위해 존재하고 또 밝음에 의해 사라질 어떤 것으로 계산되어 왔던 것일까. 이 산술적인 믿음의 뿌리 속에는 어떤 아집이 들어 있는 것일까. 만일 생과 생 아닌 것을 구분한다면, 그것은 선악, 진위, 미추, 남녀와 같은 중요한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어떤 근거나 원인도 없는 불완전한 대칭들로부터 한 발자국도 더 나아가지 못한 것이리라. 많은 시인들이 좇았던 것은 바로 이 언저리가 아니었을까. 의미의 대칭과 그 기계적인 균형을 깨뜨리고 생의 진정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지점. 하여 이인원 시인은 “깜깜함”을 타인(타자)의 것이 아닌 자신의 것으로 삼는다. “깜깜절벽”은 자신의 “귀청”이었다고 말한다. 허물이 곧 생명의 본질이듯, 어둠과 고통 역시 삶의 내부라는 깨달음에 다가선다. “허물과 몸// 서로 너무 바툰 곳에 있어” 구분할 수 없다. 그럼에도 나는 이 단순한 진실을, 매미가 “한평생 애가 터지게 불러도” 알지 못했으니. “마음, 이라고 똑바로 못 읽고 가는 마음”만 지니고 있었으니. 시인의 이러한 자기반성은 에로스적 윤리의 한 출발점이라고도 말할 수 있으리라.
이인원 시인이 자연의 흐름에 관심을 갖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자연은 언제나 이미 에로스를 원초적으로 실현하고 있다. 삶의 욕동과 죽음의 충동들을 나누는 것은 단지 인간의 생각 속에서나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생각의 끝에서 시 「풀잎마다 총총」을 읽어 본다.
난간도 없는 풀잎은
이슬의 무게를 어떻게 견디나
등골이 휘도록
총, 총
들러붙어 있는 이슬들
보다 못한 속눈썹이 그만
총, 총
방아쇠를 당기고 만다
눈꺼풀도 없는 풀잎은
이슬의 무게를 어떻게 버리나
부질없는 생각만
풀밭보다 넓은 난간을 가지고 있다
- 「풀잎마다 총총」 전문
“난간도 없는 풀잎”.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이 말은, 추락할 것도 추슬러 소유할 것도 따라서 경계할 것도 없는 자연의 본성을 잘 표현해 준다. 자연(풀잎)이 고통(이슬)의 무게를 견디는 법은 고통 자체를 인식하지 않는 것이리라. 풀잎은 이슬 자체를 잊음으로써 이슬을 견딘다. 고(苦)를 고(苦)라고 느끼지 못할 때 생은 그 본질을 드러낸다. 등골에 휘도록 들러붙어 있는 이슬들에게 온 몸을 내어주고 있을 때, 진정으로 생은 자기애를 벗어나 삶의 본래적 의미에 도달한다.
그러나 과연 인간은 가진 것도 버려야 할 것도 구분하지 않는 무욕(無慾) 상태에 도달할 수 있을까. 그것은 어쩌면 불가능하다. 자연의 일부이지만 자연의 일부이길 거부하는 인간이 무념 상태에 도달하는 것은 애초에 가능하지 않다. 불가능성은 인간의 한계를 뚜렷하게 보여주는 것인 동시에 인간의 이성, 문명, 도덕이 지닌 한계까지도 반추하게 한다. 그러므로 풀잎 앞에서 인간이 지닐 수 있는 유일한 윤리란, 존재에 대한 ‘예의’를 갖추는 것이다. 예의란, 한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는 것이다. 대상을 내 의식 안에 가두지 않는 것. 자유롭게 놓아두는 것. 그것은 그 어떤 도덕이나 기율보다 중요하다. 소박하지만 간명한 삶의 진실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호두알이 동글동글한 여유를 손안에 굴려보는 모처럼의 호사, 문득 반질반질 길든 호두알 속에 궁금해지는 딱 그만큼이 오늘 내 궁금함의 정량 그렇다고 정말 망치를 찾아 깨어본다면 바로 입이 궁금하다고 라면에 밥까지 말아먹지 않듯이 아름다운 소식을 위해서는 그저 앞에 놓인 튀밥이나 집어먹으며 호두알만 계속 굴리면 된다 바싹 바싹 귓전을 간질이는 뻥튀기소리를 즐기면서 호두알 표면이 얼마나 더 반들거리나 잠시 살펴보면 된다 그러다가 보면 세상 궁금해진 어린 싹이 스스로 빼끔 고개를 내밀 듯 어느 날 불쑥 저 문을 밀치고 반가운 얼굴 들이닥칠 것이므로 그때까지, 한 티스푼 정도의 느긋함만 보태면 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심도 너하고 나하고의 그리움의 정량도 딱 이만큼이라면 견딜만하겠다
- 「궁금함의 정량」 전문
무지(無知)는 때로 진실을 발견하는 조건이다. 가령 “호두알이 동글동글한 여유”를 즐기는 것은 “호두알 속”을 아는 것보다 중요하지 않다. “궁금함의 정량”을 정하지 않는다면, 그래서 “망치를 찾아” 호두알을 깨어본다면 “아름다운 소식”을 들을 수 없다. 그러니까 “호두알만 계속 굴리면” 호두의 진실을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는 논리. 인간이 지닌 인식의 한계를 인정할 때, 나는 너를 비로소 이해할 수도 사랑할 수도 있다는 역설. 이것은 어쩌면 이인원 시인이 말하는 에로스적 윤리가 타자에 대한 예의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사랑하는 대상은 주체 안에 가두고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의 바깥에서 자유롭게 스스로 존재할 수 있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 “너하고 나” 사이도 그러할 것이다. 이인원 시인은, 무지(無知)는 무지대로, 삶은 삶대로, 소멸은 소멸대로, 자연스럽게 오고 가는 만물의 흐름을 닮으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래서일까. 그녀의 시는 간결하고 군더더기가 적다. 많은 생각들이 한 단어로 응축되기도 한다. 인위적인 꾸밈과 수사를 싫어하는 시인의 일상이 엿보이는 것도 같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 가볍게 자신을 덜어내리라는 의지도 읽어 본다. 그녀가 전(全) 생을 두고 사유했던 에로스란 어쩌면 그녀가 이 무작위를 꿈꾸는 진짜 이유, 즉 자유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신진숙 : 문학평론가. 2005년 『유심』 등단. 평론집 『윤리적인 유혹, 아름다움의 윤리』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