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입니다. 하지만 올해는 거리도 조용하고… 예전의 떠들썩한 분위기가 아닌 것이.. 모두가 미국의 ‘서브프라임 사태’ 이후로 전개된 금융위기 국면과 경기침체 우려 때문으로 보입니다. 크리스마스 캐롤이 예전만큼 거리에 울려 퍼지지 않은 것은 강화된 저작권 때문이라는 말도 있습디다. 10여년 전의 IMF외환위기 때는, 아시아 일부 국가들을 제외한 선진국들의 경기가 좋아서 금리를 올려서 외국자본을 유치하고, 환율을 올려서 수출을 증대함으로써, 빠른 시일 내에 경기가 회복될 수 있었는데, 이번 경우는 도대체 위기의 원인과 해결방안이 뚜렷하지 않다는 것이 문제랍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이 경제전반을 엄습하고 있어서, 어떤 경제 정책을 쓰더라도 효과가 없는, 백약이 무효인 상황인 것이지요. 금리가 0 수준이 되어도 기업과 개인들이 투자와 소비를 망설이니 자산가치가 지속적으로 떨어지고, 경제활동의 규모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급속히 축소되고 있습니다. 해운업의 경우, 활동지수가 과거의 1/10로 줄어들 정도로 말이죠. 서브프라임으로 대표되는 부동산 침체, 그 동안의 저금리로 인한 버블, 지나친 글로벌라이제이션, 규제완화, 파생금융상품의 기형적성장으로 인한 모순, 경제단위 들의 탐욕과 도덕적 해이, 경기변동 싸이클 상의 하강국면… 등등 여러 요인들이 한꺼번에 가장 부정적으로 작용했을 수도 있겠지요. 혹자는 지난 20여년 전 공산주의가 몰락했듯이 자본주의 또한 자체적인 모순에 의해서 심각한 시련을 겪고 있다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어찌돼었건, 이 와중에 가장 먼저 고통을 겪는 쪽은 항상 일반 백성들이지요. 자영업 하시는 분들도 많은 어려움이 있겠지만, 가진 것 없이, 그냥 학교 졸업하고 직장에 취직해서, 뭐 대단히 큰 꿈도 아니고, 나름 평범한 소시민으로 살아가고 싶어도… 그것마저 쉽지 않습니다. 예전의 ‘평생직장’ 개념은 꿈도 꾸지 못하고… 오륙도—50 넘어서 계속 직장에 다니면 도둑.. 사오정- 45세면 이미 정년.. 삼팔선-30대 후반이면 직장생활 중단 이태백- 20대의 태반이 백수.. 등등의 용어가 긴장감을 더해 주더니만, 이제는 드디어, ‘삼초땡’이라는 신조어가 생겼다네요.. ‘삼십대 초반에 이미 땡 쳤다.’ 즉, 30대 초반에 ‘짤렸다’는 것이지요. 업무가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급여수준도 높지않고, 가장 정열적으로 일할 때이고… 조직에서는 그동안 구조조정의 대상이 아니었는데, 이제는 그들까지도.. 아래의 글은 ‘삼초땡’의 한 사람이 쓴 ‘백수일기’ 입니다.. 나름, 한국에서 가장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합격한다는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인재’이며, 길지는 않은 시간이지만, 유수한 IB(investment bank. 투자은행)에서 열심히 일했는 데, ‘짤렸다’ 라는 것이지요. 뭐.. 별로 유쾌한 주제는 아니지만, 작금의 경제현실을 되 집어 보는 의미에서 소개합니다. 글쓴이의 섬세한 심리묘사가 인상적입니다. ---------- (백수일지 D-day) 내 나이 서른을 한달 앞두고 백수가 되었다. 점심시간 10여분 전, 바로 밑의 A씨가 로이터 메신저를 통해 메시지를 보낸다. “차장님, 저 잘릴 듯해요.” 엥? 하며, 나는 답변을 보낸다. “뭔 헛소리인겨…..” 다시 그녀의 메시지가 온다. “저… 대표가 이따 보재요.” 찜찜한 느낌으로 나도 내 아웃룩의 이메일 계정을 봤다. ‘inbox’에 새로 온 이메일은 다름아닌 회사대표에게서 온 것이었다. 살짝 긴장하며 이메일을 열었다. “Hi, can we have a meeting 4 PM today to a little catch up, will come and grab you. Regards” 직감이라는 게 있다. 전세계 금융위기가 어느 순간 개별 회사들의 구조조정으로 포커스를 옮겨가고, 단숨에 몸담고 있던 회사가 그 중의 하나가 되었음을 인지 했을 때…, 한국에 진출한 회사 내 그룹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던 IB그룹이 어제 30여명을 아웃 시켰다는 소식을 오늘 아침에 들었을 때, 유일하게 아는 한 명의 리서치그룹의 주니어가 아침에 담배를 태우며, 오늘 우리 그룹이 역시 레이오프를 발표할 계획이라는 이야기를 했을 때, 나도 어느 정도는 예감을 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전날 밤, 나는 진작에 가지고 있던 찜찜한 마음을 토로하고자 같이 일하는 세일즈 선배 둘에게 술자리를 권유했고, 그렇게 만들어진 자리에서 셋 모두가 만약에라도 그런 일이 발생하면 자기가 먼저 나가겠다느니 하는 마음에도 없는 말들을 하면서 결국은 얼마나 서로들 불안해 하고 있는지를 인정하고 이해했던 것이다. 새벽 1시 가까이에 끝났을 정도로 몸이 피곤해서 였을까, 나는 마치 모든 것을 경험하고 어떤 일이 발생해도 끄덕 없을 것 같은 사람인 냥 이런 이메일로 말미암아 짐작되는 사실이라는 것이 그냥 귀찮을 따름이었다. 열두시를 넘기 전, 나는 회사건물을 나와 ‘갱생병원’이라는 곳을 찾았다. 에이, 어떻게든 될대로 되라지… 하는 심정이었다. 먹고 쉬러 왔다는 내 말에 그 간호사는 나이며, 주민등록번호며 시시콜콜한 내 개인정보를 캤다. 나더러 일단 진료실로 들어가라 하더니… 진료실엔 의사 한 명이 한심하게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디가 편찮으세요?’ “음…. 저어, 어깨라고 해두죠….” “……” 잠시 후 나는, 멀쩡한 어깨를 물리치료 장비를 잔뜩 붙이고 엎드려 누워 생각했다. “일단 그만두는 것은 기정 사실인 것 같다. 이제부터 뭐하지…?”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 애썼다. 만약 내가 오늘 그만두게 되는 것이 사실이라 할지언정,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으며, 어쩌면 나는 그 상황에 놓인 나를 동정조차 하지 않을 지 모른다. 진료를 마치고 돌아온 나는 마음을 가다듬으려 했다. 노력할 필요까지는 없었다. 희한하게도… 나는 아직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짐작은 했다. 그래서 만에 하나를 대비해 클라이언트 들에게, 그리고 회사 동료들에게 굿바이 메일을 쓰기 시작했다. “send’버튼만 누르면 되겠끔 마무리를 지어 놓았다. 드디어 오후 4시, 여의도로 외근 나갔던 전무님과 이사님이 15분전에 급하게 불려 들어왔다. 모든 것은 귀결되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메일이 한 통 날아왔다. 서무대리였다. ‘혹시 대표님과 미팅 약속이 있으셨나요? 3층으로 내려 오시라는 데요 ’ 어제 다른 IB그룹의 30명이 아웃될 때, 그들은 모두 HR로부터 3층으로 내려오라는 통보를 받았다고 했다. 그 통보가 드디어 나에게 온 것이다. 나는 덤덤했다. 다행히도, 3층 데스크의 안내로 들어간 방에는 HR의 상무 한 분과 R대표가 있었다. R대표의 표정에서 그도 적잖이 곤혹스러운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더 덤덤한 척 했다. 한국말이 능통한 R대표가 우선 한국말로 설명을 시작했다. 마켓의 상황이 너무 안 좋다. 모든 그룹이 스로우한 비즈니스 상황에서 코스트를 줄여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고, 윗 선에서 한 방편으로 인력을 줄이는 것에 대한 지시가 내려왔다. 결코 개인적인 자질이나 능력의 평가로 결정된 것이 아니다, 라는 언급은 오히려 거슬렸다. 나도 마켓상황을 이해하고 있고, 자리만 차지하고 회사에 돈 한푼 벌어다 주지 못한지 2-3개월이 되었다는 것은 알고 있다. 나는 불편한 표정으로 말을 꺼내는 R대표에게 괜찮다는 표정으로 대꾸를 했다. 정말 괜찮은 것 같았다. 홍콩의 세일즈 헤드와 통화를 하고 나서, HR의 상무가 해고에 대한 반대급부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나름 나쁘지 않았다. 근무경력에 비례하는 위로금과 정기휴가 보상비, 퇴직금까지 더하면 그다지 나쁜 조건은 아니었다. “OK” 이로써 그 방에서의 협상은 끝났다. R대표가 옆방에 전무님이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HR직원의 안내로 그 방으로 들어갔다. 사무실에서 내 옆 자리에 자리한 전무님이 방에 서 있었다. 술 몇 잔만으로도 얼굴이 새빨게지시는 양반이 정말 그만치 달아오른 얼굴로 나를 맞이했다. 전무님은 무슨 말로 시작해야 하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결국 내뱉은 말이, “미안하다.” 였다. 자신도 어쩔 수 없었으리라.. 외려 내가 전무님을 위로하는 형국이었다. 눈시울이 붉어지다 못해 결국 안경 밑으로 눈물을 훔치는 모습에, 여태껏 한번도 표현한 적이 없었던, 동생처럼 여겼는데, 라는 말 한마디에 그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40대의 그는 강하게 자라온 사람이다. 결코 누구에게도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전무님과의 길지 않은 접견 후, 다시 HR직원을 또 다른 방에서 만났다. 블렉베리와 아멕스 법인카드를 반납하고, 몇가지의 서류에 사인을 했다. 그사이 혹시나 싶어 물었더니, 역시나… 최근에 외국계 IB들이 사람들을 자를 때의 절차가 업계에서 회자되곤 했었다. 대체로 미국계가 빡세다는 평이 많았는데, 가장 최악의 경우가 윗사람이 담배 한대 피우자고 건물 밖으로 나간 뒤, 미안하지만 이 시간부로 다시 들어올 수 없다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내 컴퓨터의 네트웍은 이미 끊겨 있었다. 즉, 더 이상 일년 반 동안 사용했던 내 컴퓨터를 더 이상 열어볼 수 없다는 뜻이었다. 아까 미리 써 놓은 두개의 이메일도 날아가 버렸다. 참 살벌하구나… 짐을 싸는 사람은 둘이었다. 내 밑에 A씨와 나. 그것도 서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혼자가 아닌 둘이기에 덜 쪽 팔린 건 사실이었다. 짐을 다 싸고 나니 박스 하나를 채우고, 종이 백 하나와 빵빵하게 찬 가방이 전부였다. 나름대로 일년 반 이곳에 묻혀 일을 해 왔는데, 해고 통지를 받고 싼 내 것들이란 것은 그것이 다였다. 사무실의 다른 직원들이 건물 바로 앞 택시 정류장까지 짐을 날라줬다. 대충 다른 부서 사람들과 인사를 마치고, 우리부서 몇몇이 같이 배웅을 나와줬다. 먼저 짐을 날라준 사람들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전무님이 자기도 담배 하나 달라고 했다. 일년 하고도 수개월 동안 담배를 끊었던 그였다. 괜찮다고 몇 번을 얘기 했지만, 전무님은 결국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직속 부하직원으로서의 나와 피우는 마지막 담배라고 말하면서….. 그에게 저런 센티함이 있었는 줄 몰랐다. 나는 그를 안심시키려, 몇 번이고, 나는 다 이해하고, 괜찮을 거다. 걱정하지 마라… 고 얘기했다. 오늘 같이 짤린 A씨와 나는 한 방향이었다. 전무님은 굳이 3만원을 찔러주며 모범택시를 타고 가라고 말했다. A씨가 오전에, 오후에 다시 메시지를 보냈을 때 나는 이렇게 답했었다. ‘마음 독하게 먹어.’ ‘쪽 팔리니까, 절대 울지는 마.’ 그녀는 정말 택시가 출발할 때까지 태연한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다. 하지만 택시 안에서 홍콩으로 출장 가 있는 트레이더와 내가 통화하는 소리를 듣고 난 뒤, 옆에서 조금씩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A씨를 그녀의 집 앞에서 내려 주었다. 내 밑에 있으면서 많이 도와주었고, 한없이 동생 같았던 그녀였기에 참 고마웠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더구나 그녀는 자기 휴가를 내서 네팔에 자원봉사를 이 주 동안 다녀왔을 정도로 심성이 착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에게도 세상은 이렇게 모질었다. 집에 돌아온 나에게 가장 큰 고민은 어떻게 아내에게 털어 놓을 것인가 였다. 어차피 피하거나 숨실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아내는 집에 들어오자 마자, 택시에서 건 내 전화번호가 이상했다는 말을 꺼냈다. 그럴 수 밖에.. 회사 명의로 되어 있었던 휴대폰에 저장된 전화목록 들을 그대로 옮기기 위해서 HR과의 면담이후에 곧장 대리점으로 가 신규 개통을 했던 터였다. 그리고 그 전화번호 뒤 네 자리는 우리집 현관 비밀번호 였던 것이다. 아내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은 나는 괜찮다 가 전부였다. 실상 그랬다. 아내를 데리고 나와, 동네에 있는 독도참치에 들어갔다. 참치 회와 술을 들어가면서 정말 나는 괜찮다는 것을 이해 시켜야 했다. 나는 이순간부터 백수다. 어제까지는 그래도 잘 나가는 외국계 증권사의 차장이었지만, 지금부터는 정말 아무런 대책이 없는 백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시절이 시절인데.. 두고 보시라. 이 백수의 하루하루가 어떻게 성장해 가는지를.. 그것이 비참하거나 초라할 수 있는 나의 오늘을 이렇게 길게 서술한 까닭이다. 한잔 들어간 술이 나를 취하게 만드네.. 잘 자라.. 이제 백수생활은 시작일 뿐이다. <계속> (백수일지 D+1) 어제 A씨가 택시에서 물었다. ‘내일부터 뭐하지요?’ 난 대답했다. ‘일단 주구장창 잠부터 자둬.’ 그러자 A씨가 말했다. ‘백수도 눈은 떠지잖아요.’ 난 할 말을 잃었었다. 아내가 출근을 진작에 하고 난 여덟시 반 즈음에 눈이 떠졌다. 여전히 몸은 무거웠으나, 다시 잠들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천안에 계시는 부모님께 실직에 관해 말씀 드려야 할지, 아니면 숨기고 있다가 정리가 되면 말씀 드려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천만 다행으로 국내 은행의 계약직 텔러인 아내는 어제 날짜로 재계약이 되었다. 이 망할 우연은 무엇이냐.. 내가 사직서에 사인을 하고 사무실로 돌아와 종이박스에 짐을 담고 있을 때, 아내에게서 문자가 왔다. ‘신랑, 나 연장됐어.’ 나는 내 사정을 말하지 않은 채 그냥 축하한다는 답문을 보냈었다. 둘 중 하나라도 돈을 벌 수 있다니 다행이었다. 해고 통지를 받는 순간, 머릿속을 스친 것이 전세 대출금이었기 때문이었다. 작금의 경제 현실에서, 심하게 꼬이는 사례는 이렇다. 실직한다. 고로 현금이 메마른다. 알고 보니 집을 사거나 전세를 얻었거나 해서 대출금이 잔뜩 있다. 대출금리가 부담스러워 집을 내놓으려고 한다. 하지만 집은 팔리지 않고, 전세를 구하려고 집 구경 오는 사람도 없다. 내가 그 비슷한 꼴이 되었다. 당장 퇴직금으로 두 세달 이자 분은 커버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이상은 아니다. 아내의 백만원을 조금 넘는 월급은 대출 상환에 한푼도 들어갈 여유가 없다. 자격증을 따겠다고 제법 비싼 학원수업료를 내고 있었고, 장모님 용돈 역시 아내의 몫이었다. 다시 말해, 내가 한 푼 벌지 않고 놀 수 있는 기간은 끽해야 석 달을 넘겨서는 안된다. 아내가 친절하게도(?) 고용보험을 상기시켜줬다. 매달 월급명세서의 한 칸을 차지하던 얄미운 녀석이 이제 내게 도움을 줄 타이밍이다. 보험공사에 전화를 걸어 문의했다. 나는 한달 노티스(notice)를 받았기 때문에 내년 1월부터나 실업수당을 받을 수 있었다. 당장 받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래도 조금의 여유가 더 생긴 셈이다. 천안에 내려가기 위해 지하철을 타고 신도림에 갔다. 1호선 급행을 기다리며 신문 두개를 샀다. 조선일보의 경제면에 경제위기의 서사가 실려있었다. 리먼 브러더스 사태를 시작으로 설명이 되어 있었다. 그래…, 작년 여름, 그전까진 듣도 보도 못한 ‘서브 프라임’ 이라는 단어가 글로벌 금융시장에 불안감을 조성했고, 베어스턴스의 피인수 등 여러가지 사건들로 위태로운 채 끌려오다가 결국 리만 브러더스의 파산보호 신청으로 ‘세계경제 위기’가 공식 선언 되었다. 정확히 올 해 추석 연휴 중반이었다. 그 뒤로 끔찍한 나날이 계속 되었고, 나아지나 싶으면 뒤통수를 때리고, 숨쉴 만 한가 싶으면 목을 쳤다. 경쟁사 가운데 주니어가 아웃되고, 또 다른 회사의 알고 지내던 세일즈가 아웃되더니, 지난 주 금요일엔 전세계적으로 5만 명의 직원을 감원하겠다던 모 은행의 세일즈 두 명이 퇴출 당했다. 월요일 오후, 내가 다니던 회사의 다른 그룹이, 직급을 막론하고 대규모의 레이오프를 단행했다. 그리고 화요일이던 어제는 내가 그 중의 하나가 되었다. 이런 잡념에 빠져 있는 동안, 급행은 어느덧 성환역에 도착했다. 짖궂게도 비가 오는 아침이다. 우산도 없이 신문으로 비를 가리는 내 모습이 스스로 생각해도 처량했다. 인근 대학으로 향하는 학생들 틈을 벗어나, 부모님 댁으로 향했다. 문을 열어준 어머니는 이해를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왜 추리한 모습의 아들이, 이 아침 근무시간에 여기까지 내려와 있을까. 나는 ‘근무시간이 아니니까 왔죠.’ 라고 대꾸했다. 어머니는 방에 들어가 이불을 덮고 진지한 표정으로 이렇게 됐다고 말할 때 까지 농담인 줄 아셨나 보다. 진작 오늘 아침에 아버지께서, 왜 우리집 새끼들은 다 금융회사에 있냐. ( 나-증권사. 내 아내-은행. 내 동생-카드회사)며, 뉴스에 맨 날 안 좋은 얘기가 나오는데 이것들 괜찮은 거냐고 푸념하시며 술 한잔 하고 계셨다고 한다. 참고로 아버지는 경비를 격일로 서신다. 그런데 장남인 내가 신문 방송에 터지던 그 뉴스가 우리 집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을 여실히 증명한 것이다. 크게 놀랄 것으로 예상했던 어머니는 의외로 그럴 수도 있다는 식의 반응을 보이셨다. 아마 아들의 상심이 더 클까 봐 애써 그러셨으리라. ‘괜찮아’를 몇 번이나 반복하시던 아버지가 ‘국밥 한 그룻 할래?’ 하고 말씀하셨다. 열 두시가 조금 안된 시간이었지만, 아침도 안 먹은 상태였다. 이미 술 기운이 오르신 아버지를 선두로 우산들을 쓰고, 셋은 국밥집에 가, 순대국밥 세 그릇을 시켰다. 아버지는 굳이 소주 두병을 시키셨다. 국밥집을 나올 때까지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나는 소주 네병을 마셨다. 중간에 화장실에 같이 갔던 아버지는 또 굳이 담배를 권하시며, 괜찮다는 말씀만 반복하셨다. 다시 집으로 돌아 와서도 소주 한 병, 백세주 한 병을 마시고 나서야 나는 서울로 올라갈 채비를 하였다. 내일 출근을 위해 잠을 주무셔야하는 아버지를 뒤로하고, 어머니와 역으로 향했다. 길거리에 내리던 비는 그쳤지만, 내 마음의 비는 더 굵어 지기만 했다. <끝> 원래 이 글은 글쓴이가, 자신이 실업을 극복해 가는 과정을 일기체 형식으로 인터넷에 두어번 올린 것인데…, 다니던 회사로부터의 부정적인 평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네티즌들의 악플 때문에 모두 취소되고 중단되었습니다. 아직 취직도 못해본 청춘들이 많은 데, 잘 나가는 IB에서 돈 많이 받고 잘 지내다가 무슨 배부른 타령이냐 등등….., 이해 못할 댓글과 압력 때문에 중단된 것이죠… 하여간, 올해는 정말 예상치 못했던 위기가 도래함으로써 모두들 힘들었고, 내년에는 더욱 힘든 시절이 예상된다는 데… 아무쪼록, 큰 탈 없이 위기가 수습되고, 정상적인 경제시스템으로 되돌아 가길 간절이 바라는 마음입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첫댓글 참 가슴이 답답하게 느껴집니다....기개가 꺽이지 않으면, 새로이 일어설수있겠죠...노력하고 노력해서 우리 아버지세대가 이룬 성과를 다시 일구어냅시다...
그놈의 악풀들 언제나 좀 사그러 들려나? 성공한 사람,실패한 사람 들의 삶에서 배워 피와 살이 되는것을 배워야지.10년전의 악몽 이떠올라 가슴이 이 깤 막히네요. 그때는 우리잘못 때문에 지금은 그잘난 미국 때문에 금융 에 관한한 절대로 흔들리지 않을것 같던 금융 시스템이 그렇 케 허무하게 무너 지다니 자본 주의에 대한 절대 신봉은 여지없이 무너 지는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