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끝자락에 서 있다. 돌이켜 보니 감개무량하다. 생업 현장과 일상의 잡다한 일을 정리하고 사실상 제2의 인생을 시작한 해가 올해다. 지난 2월 학교에 입학하여 먹고 사는 일에 벗어나 오직 학업에만 전념한 한 해였다. 인생 100세 시대를 맞이한 제 2의 준비 기간인지도 모르겠다.
이 길은 내가 20대 때부터 꿈꾸어 왔던 길이도 했다. 가난한 집 둘째로 태어난 나는 초등학교만 졸업한 1968년 2월, 14살 어린 나이로 공장을 다녔다. 공돌이로 이곳저곳 영세한 공장을 저임금으로 떠돌아 다니던 내가 미래를 위해 공부를 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고 이를 악물고 죽을 각오로 공부를 시작했던 때가 1975년, 내 나이 21살이었다. 단칸방에서는 밤늦게 공부할 수 없어서, 동네의 폐쇄된 야학의 건물을 지켜주면서 공부했다. 낮에는 공장을 갔고, 저녁에는 이곳 교무실에서 새벽 두어 시까지 혼자서 책과 씨름을 했다. 겨울이면 교무실에 있던 난로에 연탄을 피워 놓고 공부를 하면 발이 시려 잠자리에 제대로 들 수가 없었다. 책 속에 진리가 있음을 깨달았다. 그래, 언젠가 내가 먹고 사는 일이 해결된다면 영원히 풀리지 않는 난제인 불합리한 삶, 삶의 존재 이유에 대해서 공부를 해보리라 마음을 먹었다. 밤 늦도록 책과 씨름을 하다 명상에 잠기면 무척 행복했다. 단칸방에 책상 하나, 서재에 책들, 그리고 침대 하나만 있으면 무척 행복할 것 같았다. 어렵게 주경야독으로 중고등학교 과정을 검정고시로 통과했다. 천신만고 끝에 대학입학자격을 획득하고 나니 진리 탐구의 장인 대학을 가고 싶었다. 그러나 내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던 내 동생, 가족들을 나는 차마 외면할 수 없었다. 조선소에서의 내 수입이 가족 생계에 큰 도움이 됐기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많은 세월이 흘렀다. 결혼을 해서 한 가정을 꾸리기도 했고, 내가 속한 이 나라의 발전을 위해 어줍잖게 민주화 투쟁에 앞장 서기도 했다. 처음으로 공동체 사회를 위해서 개인을 내어던지는 일에 참여했고 잠시 구속되기도 했다. 돌이켜 보면 무척 힘들고 어려운 순간이기도 했지만, 나름 자랑스럽기도 했다. 다시 먹고 사는 일에 매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내게 딸린 가족의 문제였다. 서른 중반에는 힘들게 야간에 수원에 있는 대학에서 산업공학을 전공했다. 그룹에서 운영했던 사내대학 과정이었다. 힘들게 생업과 학업을 위해 허우적대다가 50을 넘겼다. 사업에서의 성공이 나를 압박했다. 50대에 큰 돈을 벌어, 생업에 종사하는 일을 끝내고 젊은 시절 다짐했던 학자의 길을 가고자 했으나, 사는 것이 그렇게 만만했던가? 결국 60대를 넘겼다. 먹고 사는 문제, 생업의 문제는 쉽게 해결되는 것이 아니었다. 결국 회사의 경영권에서 손을 놓게 되는 일이 일어났다. 14살 초졸 공돌이가 대기업에서 살아남았고 대기업 협력사이지만 대표이사의 자리에까지 올랐다는 것이 나를 방심하게 한 것이었을까? 작은 회사의 대표이사 자리도 권력의 자리였을까? 그렇게 쥐꼬리만한 권력과 명예에 취해 10여 년을 방종했는지 모르겠다. 초졸의 공돌이 출신이 사장 자리까지 올랐다는 입지전적인 성공 스토리에, 주변의 칭송에 내가 매몰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젊은 시절, 한 때는 민주화를 위해, 가난한 자, 노동자의 입장에서 이를 대변하고자 싸웠고, 그래서 우리나라가 민주화 되는데 나름 기여했다는 공명심, 말단의 노동자가 회사의 최고 경영자가 되었다는 어줍잖은 자부심이, 나 자신을 과거에 묶어놓았고 미래에 대한 투자 실패가 아마도 나의 성장을 멈추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불과 몇 년 전, 어쩔 수 없이 회사 지분을 정리하는 시간이 닥쳐왔다. 그 길은 형극의 길이기도 했다. 그것은 얼키고 설킨 이해 관계를 정리해야 하는 길이었다. 무엇보다 힘든 것은 직원의 고용 승계 문제였다. 직원의 고용 승계를 위해 많은 것을 내려놓다시피 하니, 나는 사실상 빈털털이가 되었다. 지난 13년간 회사에 쏟아부은 피땀어린 노력이 한낮 일장춘몽이 된 기분이었다. 허망했다. 젊은 시절 배고품과 학식에 목말랐던 나의 꿈인 사업에서의 성공, 학자로서의 성공이 일순 물거품이 된 기분이었다.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일까 고민도 했다. 건강도 허락하지 않았다. 나이는 이미 65세였다.
기업의 경영자 자리, 언젠가는 내려놔야 하는 자리 아니었던가? 내가 속했던 D그룹이 IMF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부도가 나고 해체됐다. 이후 힘든 시기에 나는 퇴출의 기로에 서 있었던 회사를 이끌어야 했다. 매우 어려운, 열악한 환경에서 직원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자리에 있었다. 그럼에도 그동안 잘 이끌어왔다는 생각이 들었고, 좋은 투자자를 만나 더 나은 환경에서 직원들이 근무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자 마음이 한결 편했다. 이만하면 이것도 큰 성공이 아니겠나 하고 나 자신을 합리화했다. 그렇게라도 나 자신을 합리화시키지 않고서는 그 상실감을 이길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내 재산을 살펴보았다. 노년에 공부를 하려면 먹고 사는 일에 걱정이 없어야 했다. 기대에는 못 미치지만 죽을 때까지 먹고 사는 문제는 나도 모르게 이미 해결되어 있었다. 국민연금, 퇴직연금 등 덕분이었다. 그동안 더 벌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과거 사회적 지위에 대한 미련, 그리고 가진 것에 내가 만족하지 못했던 것뿐이었다.
모든 것이 다 정리되었던 지난해 말, 나는 만 65세를 이미 넘어섰다. 20대 때 다짐했던 젊은 시절의 꿈을 찾아 늦었지만 학업의 길에, 올해 제 2의 인생길에 나선 것이다. 회사의 경영에서 손을 뗄 계기가 오지 않았다면, 아직도 나는 생업의 현장에서 작은 권력에 만족하며, 만족할 줄 모르는 부와 헛된 명예를 쫓아 헉헉거리며 살고 있을 것이다.
젊은 시절의 다짐대로 은퇴 후 학업에 정진하기 위해 나는 지난날 바쁜 회사의 일상 속에서도 나름의 공부는 계속해 왔다. 대략 10~15여년 전부터 회사에 일찍 출근해서 새벽 시간을 이용해서 하루 두어 시간 기초 학문을 ebs를 통해 공부했다. 수학, 물리, 국문법을 중학교 과정에서 다시 공부했다. 독학할 때 가장 나를 괴롭혔던 것이 수학이었다. 과거 대학의 이공계 공부에서 수학, 물리학의 기초지식 부족은 나를 무척 힘들게 했던 기억이 있었다. 그래서 수학은 방정식, 도형부터 기초에 충실한 공부를 꾸준히 해서 작년에 미적분까지 끝냈다. 물리, 생물학을 다시 접했을 때는 그동안 세상의 과학계는 엄청난 발전이 있었음을 뒤늦게 알았다. 나의 세계관, 우주관에 큰 충격을 준 빅뱅이론이 그랬고, 유전자 이론이 그랬다. 그 덕분에 다 큰 손자들한테 중학교 수준의 어려운 수학 학습 문제를 충분히 풀어서 설명해 줄 수도 있었다. 국문법은 카페에 글을 쓴다고 일주일에 한 번 정도로 중학교 문법을 대략 3~4년 정도익혔다. 한문은 고사성어를 중심으로 가끔씩 취미 삼아 익혔고 영문법도 잊지 않기 위해 영어 성경을 주로 읽었다.
지난 방통대 일학년 두 학기 성적을 살펴보니 다행히 낙제는 아니었다. 아마도 평소에 꾸준히 익혀왔던 기초 국문법, 한문, 영어의 기초가 큰 도움이 됐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지만 공부하는 과정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나이 들어 공부에 다시 도전한다는 것이 매우 힘겨웠다.. 너무 늦은 것이 아닐까 하고. 그것은 점차 떨어지는 기억력 때문이다. 돌아서면 잊어버리고... 공부도 젊은 시절, 때가 있다는 생각이 언뜻언뜻 들 때마다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극복해야 한다고, 그리고 새로운 도전을 위해 소 걸음처럼 느리더라도 한 걸음씩 정진하자고.
첫댓글 기초가 탄탄하시니 방송대 국어국문과도 거뜬히 졸업하시고 더 넓은 학문의 세계로 가실것 같습니다.
방송대에는 戰後세대인 60.70대의 많은學友들이 배움의 기회를 잃고 생활전선에서 젊음을 바치고 늦게나마 못 다한 學業을 시작하여 기역코 學士帽를 씁니다.
2022년 인천지역대의 수 많은 검정고시 출신학우들이 4년간 열심히 공부하여 졸업하고 국어국문과에도 여러학우들이 졸업을 합니다.
배움의 끈만 놓지않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1학년2학기가 가장 어려운데 통과했으니 2학년부터는 누워서 떡먹기 입니다.
퐈이팅입니다!!!
격려에 감사드립니다. 연말이 되니 갑자기 글을 쓰고 싶었습니다. 글을 써 놓고 보니 부끄럽고 창피했습니다. 과거를 꼭 이렇게 써야 하나 하고 생각하다가 이제 들어와 삭제를 하려 했는데 댓글들이 달려 차마 지우지 못했습니다. 선배님의 격려에 큰 힘을 얻습니다.
우리 함께한 새로운 도전을 응원합니다. 대단한 우리 대표님 최고입니다.
지난해 함께 해서 너무 감사했고 큰 힘이 되었습니다.
프랑스 성인 교육학자 렝그랑(Lengrand)이 주창한 평생교육(lifelong education)을 몸소 실천하고 계시는
대표님께 수고하셨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나이가 너무 많다고 생각마시고, 생을 마치는 순간까지 배움을 놓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천천히 한 걸음씩 정진해 가시기를 응원드립니다. 그리고 혼자서 앞장서 가시지 마시고
동기들과 함께, 선, 후배님들과 함께 하시면 학문의 즐거움도 배가 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이제 임인년 새 해를 맞이하여 우선적으로 건강을 지키시고, 가정에 행복이 깃들기를 바랍니다. 파이팅!!!!!!!
감사합니다. 뒤늦게 학문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선배님들의 많은 조언과 지도를 부탁드립니다.
수많은 역경 속에서도 뜻을 굽히지 않고 살아오신 파노라마 같은 글에 감동입니다...인생이라는 숫자에 한살이 더 얹어졌지만 삶의 무게는 더 가벼운 2022년 되시기를 바랍니다...^^
선배님의 말씀 감사합니다. 선배님의 힘찬 2022년 새해를 응원합니다.
훌륭하신 구영명 후배님의 글을 읽고 댓글 없이 나갈 수 없다. 라는 생각에 응원과 함께 박수를 드립니다. 형설지공의 큰 결과를 얻으셨고 장차 대학의 졸업장을 거머쥐실 영광의 날을 위하여 계속 전진하시리라 확신합니다.
가난했던 동시대를 경험했던 한 사람으로써 사연 속에 깊은 감동의 물결을 느낍니다. 영광의 그날을 위하여 힘찬 행보에 우뢰와 같은 응원의 박수를 드립니다.
선배님 감사합니다. 글을 써 놓고 잠시 후회를 했습니다. 괜시리 글을 올렸나 하고요. 2022년, 선배님께도 올해가 알차고 영광된 한 해 되시길 기원합니다.
대표님 존경합니다.
과찬이십니다. 일, 가사를 병행하시면서 공부도 열심히 하시는 학우님이 제일 존경스럽죠.
글을 읽으며 많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끝까지 화이팅입니다!!
문장에서 땀냄새가 나서 좋습니다. 학자로서 살아가시기를. 사실 지금 학자로 살고 계십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