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 속을 들여다 보지 않고는 우리는 여성의 몸을 볼 수가 없다. 여성의 몸은 언제나 거울 속에 존재해 있었고 또 거울 속에서 이야기되어 왔다. <백설공주>의 왕비는 거울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찾을 수가 없기에 결국 자기소외를 겪을 수밖에 없다. 거울은 왕비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얼굴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얼굴은 자신의 얼굴이 아니다. 그녀는 거울 속에서 자신의 얼굴을 찾기 위해 백설공주를 죽이러 숲속 집을 찾는다. 거울이야말로 남성들에 의해 마음 속 가장 깊은 곳에서 반복되어 나타나고 강요되어진 여성의 얼굴이다. 여성의 얼굴은 스스로 표현되고 드러난 것이 아니라 이 거울이라는 '표상' 또는 '재존재'의 모습으로 대체된다. 거울 속에 시선은 남성에 의해 지배되고 휘둘러지기 때문에 우리는 '순수한' 의미에서의 '여성의 얼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여성의 얼굴은 거울 속에서 남성의 기호에 의해 규정되고 표상되어온 것이므로 항상 '차연'의 자리이며 '분열'의 자리이다.
<백설공주>의 왕비가 가지고 있는 거울 속의 자신과 현실 속의 자신에서부터 여성의 분열의식은 시작된다. 즉 거울은 여성의 육체에 대한 환상의 분열증을 키워가는 매개이다(주1). 거울의 탄생은 여성 허구의 탄생과 일치하며 동시에 실제와 현상의 분열의 탄생이기도 하다. 그것은 표상과 실제의 간극에 대한 망각과 은폐를 초래함을 전제로 한다. 즉 이 세계에서 이 실재의 상실이라는 문제는 여성의 육체가 이 세상에서 한 번도 실제적으로 존재한 적이 없었거나 결핍되었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여성에게 자신을 표상하는 거울은 자신의 모습이 아닌 허구로 만들어진 어떤 상투화의 초상이다. 즉 여성의 실체는 허구의 거울 속에서 고정되고 상투화된다. 여성은 상투화된 은유 속에 갇혀 있다.
그런 점에서 여성의 몸이야말로 젠더적 문화적 문제들이 기술된 전사(轉寫)라 할만하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여성의 몸이 이 근대의 모든 욕망과 가부장제의 억압과 정치적 권력의 기획들이 기술되어 있는 텍스트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여성의 신체는 처음부터 관리의 대상이었고 통제 속에 있었으며 또한 그러면서도 그러한 정략적 독해의 과정에서 여성의 신체는 역설적이게도 한 번도 읽혀진 적이 없는 비어 있는 텍스트 혹은 빈 페이지였다. 여성의 몸은 이 땅에 아이를 낳는 재생산의 기능 혹은 관능의 대상으로서 존재해 왔다는 점에서 한 번도 그녀 자신이 주인이 아니었다.
여성의 몸이 부재한다는 이 사실은 현대사회에서 더욱 극대화된다. 지리학자 커스텐 시몬스의 말대로 현대도시는 '거울로 도배된 방' 으로 꾸며져 있다. 도시의 거대한 유리창(쇼우윈도우)은 시선을 장악하며 여성의 나르시시즘적 자기도취와 자기소외를 준비시킨다. (여성은 쇼우윈도우 속의 옷을 보며 그 옷을 입고 있는 자신을 상상하거나 아예 쇼우윈도우속에 되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끝없이 탐색한다) 대부분 그녀의 시선은 유리창 속을 관통하기보다 유리창속에서 되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무의식적으로 보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현대문화가 시각적으로 발전되어 왔다고 보았을 때 푸코가 말하는 인간 몸에 대한 통제가 이제는 '시각적 권력'을 행사하는 자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아름다움에 대한 광기가 보편화되고 만연되는 현실속에서 여성은 다시 한 번 자신의 몸의 선택권을 빼앗기게 되고 만다. 여성의 몸은 시각 속에서 집약적으로 소비되고 남성이라는 앵글에 의해 관찰된다.
그러나 한편으로 억압이 일어나는 그 억압의 자리야말로 바로 정치적으로 억압에 저항하는 투쟁의 자리가 된다. 해방의 힘은 몸이 억압되고 있는 그 지점에서 분출한다. 여성의 육체가 시대적 제도적 기억과 체험으로 이루어진 집적체라는 사실, 타자성으로서 언제나 불완전한 육체였다는 사실은 주변적 입장에서 오히려 해방적인 잠재력을 가질 수 있다.
그렇다면 이 해방적 진보의 에너지로 백설공주의 <거울>을 깨뜨릴 것인가. 여성은 오히려 불완전한 몸으로 인식되어 온 자신의 몸을 되비춤으로써 새로운 거울을 만들어 내려 한다. 거울이 문제인 것이 아니라 시선이 문제적이기 때문이다.
2. 누워있는 거울
여름 학기
여성학 종강한 뒤,
화장실 바닥에
거울 놓고
양 다리 활짝 열었다.
선분홍
꽃잎 한 점 보았다.
이럴 수가!
오, 모르게 꽃이었다니
아랫배 깊숙이
구근 한덩이
이렇게 숨겨져 있었구나
하얀 크리넥스
입입으로 피워낸 꽃잎처럼
철따라
점점이 피꽃 게우며,
울컥 불컥
목젖 헹구며,
나
물오른
한줄기 꽃대였다네.
진수미 <바기날 플라워>전문 (주2)
여성의 몸은 알 수 없는 은유라는 점에서 신비화되거나 혹은 너무나 뻔한 은유로 상투화되어 왔다. 진수미의 시는 이러한 상투성 혹은 신비화로서의 환상들을 시원하게 벗어난다. 시인은 화장실에 자신의 성기를 관찰한다. 남성의 성기가 돌출되어 스스로 내려다볼 수 있는 반면 여성의 그것은 숨겨지고 은밀하여 자신의 몸인데도 자신이 볼 수 없는 그곳에 위치해 있다. 시인은 이제까지 얼굴을 바라보며 서 있던 거울을 눕혀 자신의 밑으로 가져가 자신의 성기를 꼼꼼히 관찰한다(주3). 서있던 거울이 거꾸로 누워버린 거울이 된다. 거울은 비춰서는 안되고 금기시되어온 침묵의 영토 속으로 들어온다. 그리하여 불길하며 불온시 여겨지던 여성의 생리의 피가 '아랫배 깊숙이 구근 한덩이'에서 피어나온 '선홍 꽃잎'이었다는 사실, 그리하여 '철따라 점점이 피꽃'을 게워내며 '울컥 불컥 목젖 헹구'어 내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백설공주의 <거울>에서 자신의 자궁을 들여다보는 이 아래로 누운 <거울>로의 변화는 분명 새로운 거울의 탄생을 예고한다. 그녀는 거울을 보는 새로운 시선을 구축해냄으로써 예전의 거울 속의 남성권력적 시선을 제거한다. 응시의 대상 즉, '보이는 자'가 아닌 '보는 자'로서의 시선은 시선의 권력적 주체 이동을 의미하면서 주체의 거울을 찾는 과정과 전이를 설명해 준다. '다른 시선' '주체적 거울'과의 만남은 분명 여성을 젠더로 규정하고 고착화 재생산해 온 거울에서 새로운 거울의 각도를 시도하는 순간이다. 그녀가 '물오른 한줄기 꽃대였다'는 것은 외적 신체의 아름다움속에서 전통적으로 규정된 '꽃'이 아니라 아랫배 깊숙이 구근에서 한덩이의 붉은 꽃을 일구어낸 생명력의 '꽃'에 대한 발견이다. 지금까지 여성이 '꽃'이라는 이 상투적 비유를 오히려 내부에서 해체, 전복시키며 새로운 '한줄기 꽃대'를 일구어 내는 장면이다.
시인은 상투적 기호를 전복시키는 거꾸로 비치는 거울을 통해 남성적 욕망에 의해 중개되지 않는 여성의 얼굴과 신체를 보여준다. 그것은 식민화되지 않는 몸이며 새로운 신체 구축이라 할만하다. 자신의 성기를 한 번도 제대로 본 적이 없는 여성에게 있어서 하나의 혁명적 행위이다. 현대의 공간이 '거울'의 방이며 현대문화속의 주체가 '눈의 경험'속에서 형성된다고 보았을 때 빼앗긴 시선을 되찾는 이 시선의 회귀, 자신의 중심을 찾아가 스스로 되비추는 시선의 복원은 분명 '시선의 주체적 회복'이라 할 만한다.
3. 착색된 글씨, 문신화된 몸
그럼에도 여성들은 가부장적 담화와 또는 그 담화가 구축하도록 하는 정치적인 주변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여성이 전통적으로 신체와 육체적인 것과 동일시되고 남성을 언어와 지성적인 것과 동일시한다면 여성의 몸을 언어로써 드러내는 것은 무슨 의미를 가진단 말인가? 여성의 육체성을 기술하려고 하는 것이 남성의 횡포적 기호인 언어로 도구화할 수밖에 없다는 역설적 함의를 내포한다면 여성의 몸에 대한 기술은 어떻게 시작될 수 있을까?
소녀 시절
여러 번 같은 꿈을 꾸었다
누군가 붓에다 먹을 찍어
내 얼굴에다 자꾸 글씨를 썼다
눈을 떠보면(여전히 꿈속이었지만)
내 얼굴에 글씨를 쓰는 사람의
얼굴도 글씨도 가득했다
(그는 누구였을까)
(무슨 글씨들이었을까)
실제로 출판사에 다닐 땐 내 입 안에
글씨로 엉킨 검은 실 뭉치가 가득 찬
날도 있었다
(결핵성 늑막염으로 가래를 퉤퉤 뱉고 다녔다)
집에 돌아와 목욕탕에서 거울을 보며
딸의 붓으로 얼굴에
글씨를 써보았다 그러다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그 시절 내 얼굴에 글씨를
쓰던 사람의 얼굴을 보고 말았다
김혜순 <얼굴에 쓴 글씨>중에서
그녀의 얼굴에 글씨를 쓴 사람은 누구였을까? 여성의 몸이 자연의 세계, 도상의 세계, 미신의 세계에 속한다면 그녀의 얼굴에 글씨를 쓰던 사람은 라캉의 상징계에서 말하는 언어 혹은 아버지, 혹은 남성이라는 상징일 수 있다. 글씨란 언어가 육체에 거주하는 집이라고 했던가. 시인의 얼굴 위에 쓰여지는 글씨는 존재에게 세계가 부여해주는 주체로서의 승인절차이다. 얼굴 위의 글씨로 시인은 세계속에 등기된다. 그러나 등록되는 순간 그 글씨로 말미암아 존재는 세계에 예속되고 구속되는 자가 된다. 이것이 근대 이후 이름의 경제학이며 존재의 알리바이이다. 얼굴위의 글씨는 그 존재의 이름이며 세계속에 등록된 기호이다.
글씨를 쓰는 사람의 얼굴에도 시인의 얼굴에도 글씨들이 가득하다. 입안에도 글씨로 엉킨 검은 실 뭉치가 가득하다. 글씨는 투명하게 존재를 통과하는 것이 아니라 얼굴에 착색되어 오랫동안 남아 있다. 시인은 비로소 집에 돌아와 목욕탕 거울을 바라보며(왜 여성들은 거의 목욕탕에서 자신의 얼굴과 몸을 보지?) 자신의 얼굴위에 글씨를 써본다. 놀랍게도 어린 시절 꿈속에서 자신의 얼굴에 글씨를 쓰던 사람의 얼굴이 거울 속에 비친다. 글씨의 주체를 만나는 이 거울과의 대면. 거울 속에는 이미 세계속에 등기되어 있는 시인의 모습이 있다. 거울 속의 그녀는 온통 글씨로 가득한 얼굴을 가지고 다시 얼굴 위에 글씨를 쓰고 있는 것이다.
글씨가 육체를 거울 속으로 호명하여 불러낼 때 <백설공주>의 거울은 또다른 거울로 변화한다. 그것은 그녀와 그녀의 딸의 얼굴 위 글씨들을 불러내는 과거의 거울이자 현재의 거울이며 미래의 거울이다. 거울은 과거와 현재의 존재가 동시적으로 만나는 장소이며 시간에 의해 상속되는 거울이다. 거울은 시간이 축적되며 상속되는 허구이다. 그러나 이 허구를 통하여서 자신의 허구를 다시 확인하는, 허구 속의 허구의 확인이라는 사실이 내포되어 있다. 즉 허구를 통하여서만 허구를 반성하고 비판할 수 있다.
여성은 이 거울을 통하여 자신의 얼굴에 화석화된 문신을 본다. 그리하여 얼굴위의 글씨는 여성의 몸이야말로 글씨로 쓰여진 텍스트라는 비유를 가능케 한다. 얼굴 위에 쓰여진 글씨는 말이나 언어와 다르게 육체성을 지니며 육체 위에 착색되어 살갗이 되고 피부가 되고 옷이 된다. 여성의 몸에 쓰여진 글씨는 구술문화에서 기술문화로 전이되는 역사적 산물로 볼 수 있다. 모든 것이 기술되고 글씨화될 때 여성은 남성에 의해 쓰여지는 가장 일차적인 텍스트이다. 남성에 의해 쓰여지고 또 남성에 의해 읽혀지는 텍스트. 즉 김혜순의 시에서 여성의 얼굴위에 쓰여진 글씨의 은유는 여성 신체에 기록되는 남성텍스트에 대한 의미있는 환치라 할 만하다. 여성의 몸에 던지는 남성들의 모든 시선에 의해서 혹은 비밀스럽고 불경스러운 남성들의 독서에 의해서 여성의 몸읽기는 이루어진다. 텍스트의 해석과 기록들은 그런 점에서 그들의 소유욕을 베껴놓은 것이며 그들 욕망의 전이체이다.
발자크는 "여자와 종이는 무엇이든 참아내는 두 개의 하얀 물건이다"라고 말한다. 이 말은 여성과 종이가 그 의미가 적혀지기를 기다리는 여백의 존재태임을 이야기한다. 또한 어떤 글씨도 쓰여지는 것을 수용하고 참아내는 마조히즘의 기쁨을 간직한 존재들이라는 사실도. 그러나 이미 여성의 몸에는 너무 많은 글씨가 쓰여져 오히려 역설적으로 빈 페이지가 되고 말았다. 글씨로 가득한 얼굴을 하고 다시 '딸의 붓'으로 자신의 얼굴 위에 덧칠하여 글씨를 쓰는 시인은 자신의 진정한 얼굴이 사라진 얼굴 없는 부재의 존재이다. 얼굴 없는 부재의 존재.
?누가 네게 가르쳐주었니
?이렇게 재빠르게 남의 몸에 낙인 찍는 법을
?벙어리처럼 손가락으로 말하는 법을
?네 손가락 하나하나가 바늘이 되는 법을
?왜 네가 새긴 무늬들은 내 심장 박동마저 방해하니
김혜순 <문신>중에서
남성의 손가락은 여성의 몸에 문신을 새기는 바늘이 된다. 바늘은 그녀의 몸에 낙인을 찍고 그녀의 심장박동마저 방해한다. '너'가 새긴 무늬에서 뿌리가 자라나서는 '뿌리 끝에서 자잘한 닻을 내리'게 하며 그것은 그녀의 몸에 보초를 세운다. '너'의 손가락 끝에서 보이지 않는 잉크가 나와 밤마다 그녀는 가위에 눌린다. 무늬 새겨진 몸은 밖으로 나갈 수 없고 노예처럼 문신에 갇힌다. 그녀는 울부짖지만 문신은 날마다 깊어지기만 한다. 시인은 '레퀴엠보다 무거운 문신''젖은 외투보다 무거운 문신''그물보다 질긴 문신 '이라고 말한다. 이 시는 여성의 신체가 젠더로 차별화되면서 사회적 문화적 일련의 억압들이 얽혀 구성되어진 실체가 바로 여성의 신체임을 보여준다. 여성의 육체는 권력의 장소이며 그 관계의 장인 셈이다. 김혜순은 그리하여 '아버지, 내 몸에서 나와주세요'(<나는 나의 그림자 속에 심겨진 한 그루 나무>)라고 하며 손바닥을 맞대고 기도 드리기도 한다.
시의 행간 앞부분마다 나와 있는 '?' 기호들은 무엇일까? 그것은 '너'에게 어떤 질문을 하면서 던지는 의문부호일 수도 있지만 왠지 도상적 기호처럼 보인다. 즉 그것은 자신의 몸에 새겨진 억압의 갈고리 형상과 닮아 있다는 연상이다. 이미 자신의 몸에 감옥이 자리잡고 있다면 여성의 글쓰기는 이 몸의 감옥 안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몸으로의 글쓰기는 출발한다. '다락방에 갇힌 미친 여자'가 다락방문을 열기 위해 길다랗게 자란 손톱으로 나무문을 박박 긁어대는 모습, 그리하여 손톱에서 피가 나고 나무바닥에 눈물과 울부짖음이 흥건할 때 그 억압과 증오와 분노의 몸이 바로 글쓰기의 몸이며 몸으로의 글쓰기인 것이다.
이젠 거울 속의 자신과 거울 밖에 있는 현존 사이에서의 자기소외가 문제가 아니다. 거울은 굴절되어 있고 아니 거울속은 비어있고(얼굴이 없으므로) 거울은 투명하며 드디어 거울은 없는 그 부재의 알리바이일 뿐일진대 시인은 자신의 몸으로 글쓰기를 하려 한다. 몸의 허구적 반사로서가 아니라 몸의 재현으로서가 아니라 몸 그 자체로서의 글쓰기는 그런 점에서 재현으로 인해 객관적 지각과 기술이 불가능해진 이 표상의 세계 속에서 그 어떤 출구를 찾는 여성적 글쓰기의 방법적 모색이 된다.
어쩌면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말하기 위하여 나는 너무나 에둘러 왔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너무나 늦은 서론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것은 내가 이 글에서 김혜순의 여성적 글쓰기 혹은 몸으로 글쓰기의 문제를 말하기 위하여 거울과 여성 신체에 대한 긴밀하고도 질긴 인연을 통과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페미니즘 비평에서의 관점들은 리얼리즘이든 이미지 비평이든 실재와 지시체 간의 조응관계를 편협하게 이해하여 진보적이냐 보수적이냐, 부정적이냐 긍정적이냐 하는 단순한 이분법을 벗어나지 못해 왔다. 나는 여성의 자기인식의 문제는 분명 여성의 몸 인식에 그 물적 근간을 이룬다는 전제하에서 김혜순 시(주4)에서 나타나는 특이한 여성 몸의 반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억압 속에 있던 몸들이 어떤 방식의 강력한 신생의 글쓰기로 나아가는지 혹은 전통적 몸을 분해하며 역반영의 몸으로 나아가는지, 이 새로운 몸의 정치학 속에서 텍스트와 여성주체간의 해방의 모색지점을 만나 보고 싶다.
4. 구강기의 그녀
김혜순의 시는 읽혀지기를 거부하는 텍스트이며 신체이다. 그녀의 시는 저항하는 육체이며 저항하는 텍스트이다. 그런 점에서 김혜순의 시를 대하는 우리의 마음은 문득 두려운 낯설음에 봉착한 기분이다. 그녀의 시에 등장하는 돌출한 비유들은 너무나 생소하다. 그녀의 시에 나타나는 기표와 기의의 급격하고도 현저한 분리는 언어를 용해시키는 힘과 능력을 보여준다. 지금까지 여성적 글쓰기에서 여성의 언어는 '악쓰기' '비명지르기' 혹은 '침묵''망설이거나 더듬거리기' '주저하기' 혹은 '간헐적으로 울음울기'였다. 그런 점에서 그녀의 시는 이제까지 보여준 여성시인들 혹은 여성적 글쓰기와는 다른 새로운 전범을 보여준다. 김혜순은 유연한 감각의 낯선 상상력을 보여줌으로써 텍스트들, 행과 행들 사이, 말과 말 사이의 간격에서 텍스트를 상처내고 텍스트를 파열하면서 누워있는 텍스트를 일어나게 만든다.
이를테면 길은
스파게티처럼 포크에 감아 먹을 수도 있지
만 갈래로 쏟아진
여름 뜨거운 길들 위에
검붉은 태양이 쏟아져 꿈틀거리듯
뜨거운 스파게티 국수 위에
검붉은 소스를 끼얹어 먹는 거야
저것 봐, 그녀가 스파게티를 먹다 말고
냅킨을 접어 무언간 끄적거리고 있잖아
너무 뜨거운가봐 눈물까지 머금고 있네
그녀가 앉은 프라이데이 창문 밑으론
이 밤, 붉은 국수 가닥 같은 자동차길
누군가 그 길을 포크에 감아 먹고 있나봐
만 갈래로 쏟아진
여름 뜨거운 길들 위에
검붉은 태양이 쏟아져 꿈틀거리듯
뜨거운 스파게티 국수 위에
검붉은 소스를 끼얹어 먹는 거야
저것 봐, 그녀가 스파게티를 먹다 말고
냅킨을 접어 무언간 끄적거리고 있잖아
너무 뜨거운가봐 눈물까지 머금고 있네
그녀가 앉은 프라이데이 창문 밑으론
이 밤, 붉은 국수 가닥 같은 자동차길
누군가 그 길을 포크에 감아 먹고 있나봐
길이 자꾸만 어디론가 끌려들고 있잖아
아아, 이렇게 길이 엉켜들고 있을 땐
천천히 혼자 스파게티를 먹는 거야
높은 창문 아래 프라데이 식탁에 앉아
수많은 세기를 기다려
바람이 산등성이를 깎아먹듯
모래가 바다를 마셔버리고 드디어
붉은 소스가 칠해진 모래 접시만 남듯
그렇게 용암처럼 붉은 소스를 끼얹어 꿀꺽 삼키는거야
먼 그를 그녀가 먹듯 그렇게
<길을 주제로 한 식사1>전문
여름 뜨거운 길 위에 자동차 길을 스파게티의 국수가락으로 비유하는 상상력은 얼마나 유쾌하고 즐거운가. 뜨거운 길 위에 쏟아지는 검붉은 태양빛은 검붉은 소스이며 만갈래로 엉켜들고 있는 길들은 스파게티의 국수다발이다. 그녀는 '높은 창문 아래 프라데이 식탁에 앉아' 창문밖을 내다보며 서로 엉켜있는 길들을 스파게티처럼 포크에 감아 쓰윽하고 먹어치운다. 길들은 누군가가 먹고 있는지 포크에 감아올려져 '자꾸만 어디론가 끌려들고' 이렇게 길이 엉켜들고 있을 때 그녀는 유유히 그녀의 식사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의 시에서 시적 화자는 이렇게 길을 먹기도 하고 냉장고에서 토막친 그의 팔을 꺼내 기름에 튀겨 먹기도 한다(<왜 우리는 부처를>). 먹는 것에 대한 의미소들은 지속적인 그녀의 시적 대상으로 등장하고 있다. 그것은 때로 카니발리즘의 기괴함을 불러일으킨다. 이를테면 위의 시에서도 그녀는 길들을 쭈욱 포크로 끌고와 용암같은 붉은 소스를 끼얹어 '꿀꺽 삼키는거야'라고 노래한다. 무엇이든 먹어치우는 그녀의 식욕은 '나는 눈을 받아 입안에 처넣는다'(<서울의 저녁식사>) '나는 뚜껑을 열어 끓고 있는 /내 골을 들여다본다'(<궁창의 라면>)'길은 불에 올려 두 시간 이상 살캉하게 삶아 먹을 수도 있다//(중략)길은 어떻게든 먹어주어야만 또 자란다(중략)-할머니, 이승의 봄밤을 마음껏 드셔보세요'(<길을 주제로 한 식사>)''쥐가/ 잠에 빠진 흰 토끼를 갉아먹는다/토끼장 밖으로 검은 피가 쏟아진다'(<이 밤에>) 와 같이 나타난다. 물론 그녀의 허벅지를 흰개미가 먹거나(<눈>) '내 몸에 누군가, 아니 그들이 빨대를 꽂고 있다/그 빨대를 통해 나를 빨아마신다'(<너희들은 나의 블루스를 훔쳐 달아났지>)와 같이 식민화되어 잡아먹히는 자신의 신체를 바라보기도 하지만 그녀는 무엇이든 잘 먹어치우는 왕성한 식욕의 상황들을 능동적으로 보여준다.
여성은 오랫동안 '먹는다'라는 동사의 주체가 될 수 없었다. '먹는다'는 동사는 여성의 것이 아니었다. 에덴 동산의 타락신화 이후 여성에게 먹는다는 것은 거절되어야 할 혹은 금기시되어온 금기의 열매이다. <백설공주>에서 백설공주는 못된 왕비가 준 사과를 먹고 쓰러진다. 여성은 '먹어서는 안되는 존재'인 것이다. 전통적으로 여성들은 먹지 않아 배고프고 창백한 그녀의 허약한 몸이 그녀의 아름다움이라는 주입을 받아온다. 여성은 그리하여 거의 음식을 먹지 않거나 먹어도 조금만 먹어야 한다. 식욕을 거세한다는 것은 곧바로 성욕과 힘에 대한 욕망을 거세한다는 의미와 연루된다. 성욕이 남성굶주림을 나타내는 기호라고 보았을 때 식욕은 그러한 욕망으로 인해 음식갈구의 형태로 드러난 욕망이라고 보는 것이다.
<길을 주제로 한 식사1>에서 시인은 이제까지 '먹어치운다'의 주체였던 남성을 물러나게 하고 '먹는다'의 주체로 등장한다. 아주 천천히 아주 서서히 그녀는 음식들을 먹는데 이를테면 '수많은 세기를 기다려/바람이 산등성이를 깎아먹듯/모래가 바다를 마셔버리고 드디어/붉은 소스가 칠해진 모래 접시만 남듯' 세상을 삼켜버린다. 식사가 끝나자 그녀 식욕의 힘으로 말미암아 여성 여근의 상징처럼 모래 접시만이 달랑 남는다.
전통적으로 삼켜지는 존재였던 여성의 모습이 아니라 모든 것을 삼키는 여성이 등장한다. 이러한 태도에는 정신분석학적인 해석들이 내포된다. 이를테면 전통적으로 성장이 멈추고 그리하여 정지, 퇴화되어온 구강기를 그녀가 자유롭게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구강기의 왕성한 회복은 언어와 이성에 의해 거세된 유년의 몸기억과 몸반응을 복원시킨다. '먼 그를 그녀가 먹듯'에서 남자마저 여성의 왕성한 식욕의 힘으로 먹어버리는 과정은 분명 남성담론에 대(對)한 역담론이라 할 수 있다. 여성의 식욕은 여성신체에 강요된 아름다움 속에서 천대되고 또한 오래 전 이브에서부터 여성의 죄악과 관련되어진 것이지만 오히려 이브는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그리고 그 먹음의 주체가 됨으로써 낙원 밖으로 나와 세상을 읽어내고 세상을 기술하는 주체가 된다. 먹는 주체가 바로 세상을 텍스트로 쓰는 저자가 된다는 사실이다. 미키의 말대로 여성이 식욕의 주체가 됨으로써 그녀는 비로소 저작권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근대 계몽주의 규범이 정신이나 문자로써 몸을 잃어버린 처량한 모습으로 드러났을 때 김혜순은 구강기 원시성과 본원적 연대감을 복원시킨다. 몸으로의 체험, 몸에서의 축적은 매개자들을 배제하고 직접 우주, 세계와 호흡을 소통하려는 자의 몸접촉, 몸운동이라 할 수 있다.
5.미친 몸의 풍경
김혜순의 시에서 기괴한 신체절단은 몸운동에 대한 제도적 억압 때문에 생겨나는 것들이다.
그들이 시체를 뒤적이고 있네. 횃불을 피워 든 그들이. 우리들의 잠 밖으로 비 내려 길은 젖었는데, 그들이 잠든 우리들의 명찰을 잡아뜯네. 잡아 뜯긴 명찰이 금방 산더미처럼 쌓이네. 안경은 안경끼리, 트렁크는 트렁크끼리. 정강이뼈는 정강이뼈끼리. 먼, 먼 미래에 갖다버린 아기는 아기끼리. 내가 살아버린 시간이 거기 다 모여, 길 한켠 초록색 쇠칸막이 안에서 천천히 심판 받네. 모닥불이 타오르네. 그들 중 하나가 모닥불을 향해 내 책을 던지네. 모닥불이 책을 맞을 때마다 한 번씩 환해지고, 살찐 생쥐 부부처럼 쏘다니던 내 두 발이 빠져나간 구두는 횃불 아래 냄새도 고약하네. KKK단처럼 복면을 쓴 그들이, 야광 십자가를 등에 두른 그들이 내가 먹어버린 세 끼 밥을 꾹꾹 눌러 밟네. 터져나온 내장은 빗자루로 쓸어 담네. 발가벗겨져, 꼭꼭 접힌 내 몸이 가스실로 떠나기 전 그들의 발 아래서 한 번 더 다져지네.
<성자 청소부 아저씨 아줌마들>중에서
신체 분해의 상상력은 매우 그로테스크한 엽기성과 불길한 강박증을 불러일으킨다. 시인은 죽은 시체들, 그 시체들의 조각들, 죽어버린 아기의 시체, 정강이뼈, 뽑혀진 손톱과 어금니 등을 보여준다. 그녀는 우리가 버린 쓰레기들이 사실은 이러한 분해된 신체의 일부분들이라고 말한다. 문명의 침입에 의해 우리 신체는 철저하게 분해되어 버려지고 쓰레기처럼 접혀 매몰된다. 시체들의 나열과 절단된 신체들은 도착적이지만 여기에는 기본적으로 문명 전복의 의도가 숨어 있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화자의 신체가 불태워지고 분해되는 '중세 마녀'의 신체로 은유된다는 점이다. 시의 제목대로 청소부들은 '중세의 성자'이며 또 극우단체인 'KKK단'처럼 복면을 쓰고 야광 십자가를 등에 둘렀다. 그런 점에서 '터져나온 내장', '발에 다져지는' 화자의 몸은 절대적 권위 혹은 가부장제에 의해 불태워지고 상처입은 마녀의 신체 속으로 위치지워진다.
그러나 길버트와 구바가 말하는 '다락방의 광녀'야말로 창조적 상상력을 가진 해방의 에너지라 할 만하다. 광녀는 그 기괴한 '이성' '제도'에 의해 다락방에 갇힘으로써(주5) 오히려 이성세계를 전복시킬 상상력의 광기를 제공받는다. 근대 이성이 이룩한 문명이 인간탐욕에 의한 '지독한 광기'라면 오히려 광녀의 광기는 '혼란스러운 정상'인 셈이다. 마녀는 이 광기의 몸에서 허구를 전복시킬 상상력의 놀라운 에너지를 지니게 된다.
아마존 히바로 인디언에게서 머리를 샀다
이 머리는 길 잃은 자를 죽여 그 시신에서 목을 댕강
자른 다음 그 머릿속의 해골을 바수어내고
그 살 주머니에 뜨거운 모래를 넣어 구운 것이다
그러면 그 머리는 죽은 사람의 인상을 그대로 간직한 채
조막만하게 오그라든다
밤길을 걷다가 별빛이 입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자 금으로 씌운 어금니가 아팠다
꿈에서 이를 빼면 가까운 사람이 죽는다는데
내 입안이 동굴 입구만큼 커지고
누군가 내 해골을 두들기고 있다
잠시 후 나는 어금니 빼러 치과에 간다
내가 일렬로 늘어선 장롱 앞에서 옷을 벗고 있는데
제복 입은 아가씨가 여긴 수퍼마켓인데요
속옷을 맡기려면 목욕탕으로 가세요 한다
<태양의 축제>중에서
억압에 의한 신체의 절단들은 도리어 신체 분해의 유희와 상상력의 만끽을 맞게한다. 시인이 산 인디언의 머리는 '머릿속의 해골을 바수어내고 그 살 주머니에 뜨거운 모래를 넣어 구운 것'이다. 그러다 별빛이 들어와 어금니가 아프고 '누군가 내 해골을 두들기고' '잠시후 나는''치과를 가고' 다시 제복입은 아가씨가 '여긴 수퍼마켓'이라고 말하며 '목욕탕'에 가라고 말한다. 그리고 시인은 조금 전에 산 머리를 가방에서 꺼내려고 하는데 그것이 마치 내 머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녀가 만나는 몸들은 분열되어 있고 그녀의 몸은 마치 가위눌린 꿈속의 몸처럼 여러 가지로 변이된다. 그녀는 집에 돌아가려고 뜀박질을 하는데 움직여지지 않아 다리를 내려다보니 다리가 '잉카의 돌'이 되어 있다. 이러한 신체의 변이는 신체의 무한한 변화의 확장성을 이야기해준다. 신체의 일부분의 탈락과 신체의 변형은 몸을 얽어매고 있는 모든 규정들을 깨뜨리며 몸이 보여줄 수 있는 참을 수 없는 변신의 욕망들을 수행한다.
이 일탈된 몸 혹은 히스테리를 부리는 몸은 여성의 환상이 야기하는 '악몽'의 한 부분들을 설명한다. 모든 꿈이 그러하듯이 '악몽'도 기억과 상상의 한 문화적 형태이다. 이 사회의 강박관념들이 우리를 늪으로 빠뜨린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한번 반쯤 미쳐버리고 싶은 심사에 빠져든다. 이 광기의 몸은 그런 점에서 내 몸이 속에서 뒤집어지면서 거침없이 원초적인 몸분해와 몸확장의 기괴한 변이, 그 상상력의 극치를 체험하게 한다. 이것이 광기의 몸이 지니는 환상과 해방성이다.
잘 알다시피 여성의 미친 몸은 여성이 생물학적 성적 혹은 문화적 거세를 강력하게 체험하면서 생긴다. 또한 일그러뜨린 신체나 또 다른 신체로의 변신들은 문화적 침입을 다시 받는다. '남편'은 방에 들어와 정신은 깨어 있는데 몸은 움직여지지 않는 '그녀에게 주사를 놓아야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미친 여자의 끝없는 상상은 그녀의 몸이 이 현실속에서 움직이지 않고 광기속으로 들어가 있음을 알게 한다. 성적 사회적 억압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장롱'에 갇힌 그녀가 장롱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 하니 그곳은 바로 '잉카의 쿠스코'이다. 잉카의 태양 축제의 광장 앞. 집 방안에 누워던 몸은 장롱문을 열고 새로운 공간, 카니발의 해체공간으로 나아간다.
6. 환각의 몸
내 발 밑에서 얼음장들이 소리없이 깨어지고
나는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리곤 갑자기 지하철 문밖으로 튕겨나가 의식을 잃었다
점점 아래로 떨어지는 시간 속의 고요
얼마나 지났을까
다음 번 열차가 도착하고 사람들이 내리는 것 같았다
늙은 아저씨가 내 머리맡에다 혀를 끌끌 차고 지나갔다
나는 엉금엉금 기어 플라스틱 벤치로 가 다시 쓰러졌다
또다시 얼마나 지났을까
내 몸을 냉동실에서 꽁꽁 얼린 다음
끓는 냄비 속에 거꾸로 처박는 것처럼, 그렇게
누군가 나를 잡아 흔들었다
집이 어디에요? 집 전화번호를 말하세요.
나는 있는 힘을 다해 고함을 지르려 했다
그렇지 않으면 내 숨에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그러나 꿈 속처럼 목소리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아이고, 공기가 이렇게 무겁다니
그렇면서도 나는 내 속에 박힌 얼음을 꼭 끌어안았다
얼어붙은 연못 속에 갇혀 있는 아이 얼굴
내 어릴 적 얼굴을 도려낸 것처럼, 그렇게
나는 얼음 얼굴을 꼭 끌어안았다
집이 어디에요? 아이고 아주 의식을 놓았네
누군가, 아줌마 목소리가 내 어깨 위로 올려졌다
그러자 내 몸 속에서 겨울 창문에 피는 성에꽃다발 가득 매단
성에나무가 확 피어오르고
그 성에나무 사이로 얼음으로 밀봉된 마을이 나타나고
그 마을 속엔 오래고 오랜 나의 외갓집이 청결하게 서 있었다
<성에꽃다발>중에서
상상력의 광기적 발현은 현실 밖의 공간으로 나아간다. 시에서 시인의 몸이 나아가는 길은 현실 밖으로 난 길을 걸어가는 길이다. 현실의 길에서 비현실의 길로 나아가는 몸의 변이는 현실의 몸에 노이즈를 만들어 내고자 하기 때문이다. 지하철 문밖으로 튕겨나가 의식을 잃고 있는 시인에게 사람들은 끌끌 혀를 차기도 하고 '집이 어디에요?' '집 전화번호를 말하세요.' 라고 묻기도 하지만 있는 힘을 다해 고함을 지르는 그녀의 목소리는 밖으로 나오지를 않는다. 현실속의 몸은 이미 말을 하지도 못하고 마음대로 움직일 수도 없다. 그러자 그녀의 몸안에서 '성애꽃다발 가득 매단 성에나무'가 확 피어난다. 가슴속을 환하게 밝히며 들어오는 성에 얼음꽃과 마을은 현실을 교란시키며 들어서는 환상의 세계이다.
그런 점에서 그녀의 몸은 현실과 비현실이 만나는 접점지대이다. 몸안에서 꽃피는 성에꽃의 개화와 청결한 외갓집의 모습은 환각이 자신의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 안에서 움터고 있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현실의 몸이 의식을 잃자 비로소 환각의 몸이 열린다. 또 다른 몸이 자신의 내부 안에 숨쉬고 있었던 것이다.
시인은 이렇듯 자신의 몸 안에 봉인되어 있던 이중의 몸을 만난다. 현존하는 것들의 허구성과 허구적인 것들의 현실성을 생각한다면 허구와 현실의 끝없는 넘나듦 속에서 몸은 환각의 몸을 불러낼 수 있다. 이러한 이중 몸체험은 여성의 몸이 제도 속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타자화된 몸과 그러한 몸을 이탈하여 초현실 속에 변신된 몸이라는 해방의 몸을, 동시에 혼합적으로 가지고 있는 이중성을 이야기한다. 이중의 몸으로의 여성은 어떤 다른 몸으로서 변신할 수 있는 그 변신의 경계에서 언제든지 사라지고 또 새로운 신생으로 부활할 수 있다는 부화중의 몸이 될 수 있다.
현실과 비현실의 접속 속에서 김혜순의 몸은 순간적으로 의식이탈을 한다. 그것은 마치 기표와 기의의 만남과 헤어짐 속에서 순간적으로 존재하는 듯이 보이는 리얼리티의 진실처럼 순간적으로 드러나는 몸의 출구이다. 혹은 봉인되어 있던 내부 몸의 현현이기도 한다. 우리의 몸이 직조된 시간과 공간의 그물을 벗어나면 언제든지 현실너머의 어느 다른 세계, 두렵지만 현전하는, 부재하지만 현실인 비현실을 만날 수 있다.
결국 시인의 몸은 순간적으로 의식의 관점에서 이탈하여 자아의 경계를 허물어버리고는 환각의 몸으로 나아간다. 이것이 시인이 일구어낸 생생하면서도 새로운 내부의 몸, 자아 해체의 몸, 경계너머의 몸, 몸이 사라져 버리는 지점의 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7. 엘리스 나를 데려가 줘
김혜순 시에서 신체는 여러 모양으로 변형되고 뒤틀린 모습을 보여준다. 절단된 신체와 그 신체를 먹는 행위들, 이러한 것은 분명 자신의 몸의 분열과 함께 거울의 분열을 이루기 위함이다. 끊어진 단절된 신체들, 파편화된 몸은 독자로 하여금 자신을 억압하던 성정체성의 굴레를 벗겨낼 수 있다는 단서를 제공한다. 우리 몸에 각인되어 있는 여성의 문신을 우리는 쉽게 솎아 낼 수 없다. 이미 여성 자신 안에 깊숙히 들어와 있기에 또 어떤 점에서 그것은 바로 자기자신이기에 그것만을 솎아낸다는 것은 어렵다. 그렇다면 성정체성의 문제는 해체의 과정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 끊임없는 신체의 분해와 다른 몸으로의 환신(換身)은 이러한 탈정체성, 탈젠더로 향해 가기 위한 자기분열의 과정이다. 김혜순이 그녀의 초상이면서 동시에 거울인 그녀의 몸을 깨뜨리는 것은 가공할만한 결과를 가져올 격렬한 자기파괴 행위이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몸을 찾기 위해 스스로의 몸을 '제물화'한다. 그녀의 몸은 성에 얼음꽃(<성에꽃다발>), 행성이 돌고 있는 우주의 몸(<SPACE OPERA>)등으로 변신하며 자기분열의 과정을 밟는다.
여성의 몸이 변방에 있다는 것은 언제든지 제도 안으로나 혹은 제도 밖으로 몸을 해체하며 나갈 수 있는 무한 변형의 몸이라는 사실을 전제한다. 저항과 욕망의 몸으로 구현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변방의 몸인 여성은 그 탈중심적 일탈적 전복을 그녀의 몸 내부 자체에 이미 내장한 에이리언이다. 즉 그녀는 근대의 커다란 통일된 지배성을 파열할 수 있는 외계인적 힘을 지닌다. 여성 주체는 남성이라는 숙주를 근거로 자라난 저항체 혹은 항성체인 것이다. 이 불확실한 주체가 오히려 절대적 주체로서의 근대와 남성문화에 대한 해체적 에너지로 잠복하고 있다.
그녀가 이룩하는 전의식적 환각의 몸은 자아의 변경에 끊임없이 들어왔다 나갔다 하면서 결국 <내>가 사라지는 몸의 입구를 향한다. 그녀의 몸은 얼마든지 분해되고 변신하고 사라지는, 그런 새로운 비현실의 세계가 들어와 살수 있도록 만든 텅빈 페이지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도착하게 되는 곳은 <Alice in Wonderland>에 나오는 이상한 나라이다. 김혜순이 보여주는, 이 세상과 도통 다른 세상의 나라. '얼음 아씨들이/눈을 먹고 사는 누에가 짠 永蠶에서 실을 뽑아선/시리디시린 얼음 비단 치마저고리 만들어 입고선/내 가슴속을 환하게 밝히며 들어왔어요'(<얼음비단, 얼음 아씨>)에서처럼, 이 이상하고도 환한 환각의 나라로 들어가기 위해 우리는 하얀 토끼가 '늦었어, 늦었어'하고 중얼거리며 들어가 버리는 그 구멍 안으로 엘리스처럼 들어가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미 현대에서 여러 양상으로 몸이 해체되고 인공신체, 사이버 신체들로 다시 몸의 회귀를 이야기한다. 이러한 몸의 회귀는 역설적으로 '몸이 사라져가는 것'의 반증이라 할 수 있다. 몸의 경계가 희미해질수록 몸이 사라져갈수록 여성의 몸은 매양 새로 쓰여질 수 있는 여백의 육체와 창조의 육체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이 창조의 몸이 바로 견고한 이성의 몸을 뚫으며 세상 안으로 들어가는 구멍의 몸일 수 있다. 결국 김혜순은 거울의 어두운 뒷면을 벗겨 내어 자신의 몸이 통과할 수 있는 유리를 만들어 놓는다. 유리로 변한 <백설공주>의 거울. 그리하여 이 투명한 몸의 통과, 들락날락할 수 있는 몸의 해방이 그녀가 만든 몸의 자유이다.
(주1)
옛날 민담에 어떤 아낙이 장에 가는 서방에 거울을 하다 사다 달라고 부탁을 한다. 그런데 서방이 장에서 사 가지고 온 거울 속에 웬 예쁜 아낙이 있는 것이었다. 그녀는 서방이 장에 가서 시앗을 보고 데리고 왔다고 생각하고 거울 속의 자기에게 화를 내며 거울을 깨뜨리고 마는데 이 이야기는 그야말로 거울로 인한 여성의 자기소외와 자기분열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주2)
문학동네 97년 여름 하계공모 당선작
(주3)
영화 <처녀들의 저녁식사>에서 연이는 호정의 말을 듣고 화장실에 들어가 자신의 성기를 거울 속에 비춰보며 생전 처음으로 자신의 성기를 관찰한다. 자신의 몸을 알면서 그녀는 자신의 욕망과 현실적 지위를 인식해 간다.
(주4)
이 글에서 주로 김혜순의 최근의 시집 <불쌍한 사랑기계>(문학과 지성1997)<달력공장 공장장님 보세요>(문학과지성 2000)에서 시들을 살펴본다.
(주5)
광기는 언제나 이성에 의해서 통제되고 감금되어야 하는 보호의 대상이자 교정의 대상이다. 푸코의 말대로 그들의 자리는 사회로부터의 격리이고 감금이다. 오정희의 소설 <유년의 뜰>에서 방밖에 자물쇠가 채워진 채로 방안에 갇혀 있는 부네는 가부장제의 억압속에 갇힌 광녀의 이미지를 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