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수토이의 <바보 이반>
레오 톨스토이 *사망
본명 : Lev Nikolajewitsch Tolstoi
직업 : 소설가, 시인
출생일 : 1828년 9월 9일
사망일 : 1910년 11월 20일
학력 : 카잔대학 법학과 중퇴
데 뷔 《유년시대 Detstvo》 익명 발표 (1852년)
출 생 지 러시아 야스나야 폴랴나
레오 톨스토이 약력
1828년 9월 9일 부유한 지주귀족의 아들로 야스나야 폴랴나에서 출생
16살 때 카잔대학에 입학, 어학과 법학을 공부하다 1847년에 중퇴
1851년 카프카스로 가서 입대
1852년 처녀작 『유년시대 Detstvo』(1852) 익명으로 발표
1855년 제대, 군시절 『유년시대 Detstvo』에 이어『소년시대 Otrochestvo』(1854) 『세바스토폴 이야기 Sevastopoliskie Rasskazy』(1854∼1856) 발표
1862년 궁정 시의(侍醫)의 딸 소피아 안드레예브나 베르스와 결혼
1910년 11월 20일 빈촌의 정거장에서 폐렴으로 사망
저서
인생의 길(1910)
희곡 산송장(1900)
부활 Voskresenie(1899)
신부(神父) 세르게이(1898)
빛은 어둠 속에서 빛난다(1890)
교회와 국가(1882)
참회록 Ispoved(1882)
요약 복음서(1881)
교의신학비판(1880)
안나 카레니나 Anna Karenina(1875-77)
전쟁과 평화 Voina imir(1865-69)
세바스토폴 이야기(1855-56)
청년시대(1856)
소년시대(1854)
유년시대(1852)
톨스토이의 유명한 작품은?
전쟁과 평화 유명하죠
kms8884 님이 2003-08-16 15:54 작성
내용은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침공할 당시를 배경으로 쓰여진 것입니다.
그 중 로스토프백작가의 사람들과 볼콘스키 공작의 아들인 안드레이가 주인공 입니다.
로스토프 백작의 아들 니콜라이는 군인입니다. 그리고 그의 막내아들 페차는 어리지만 군인이 되고 싶어합니다.(정확한 이유는 당시의 황제였던 알렉산드르황제를 베알하고 싶어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백작의 딸 나타샤는 처음 무도회에서 안드레이를 만납니다. 그리고 그와 사랑을 피웠다가 안드레이가 전장에서 부상을 입고 죽자 아나톨리라는 남자와 사귀게 되지만 나중에는 안드레이의 친구인 피에르와 사귀게 됩니다.
한편, 군대에 가고 싶어하던 페차는 군에 입대하고 프랑스군이 주둔하고 있는 농장으로 쳐들어가 그곳에서 부상을 입고 전사합니다.
그리고 이 후 나타샤는 피에르와 결혼을 하고 비교적 해피엔딩(?)으로 끝납니다.
이 소설은 1805년 오스트리아 전쟁에서부터 1812년 프랑스의 러시아침입까지를 배경으로 한 작품입니다. 상류사회의 타락성을 보여주는 사실주의 문학의 걸작입니다.
바보이반
바보 이반은 우리 나라식 이름이고 원제는 Skazka ob Ivane-durake로 러시아의 민간설화를 톨스토이가 쓴 거예요.
1886년 발표. 주인공 이반은 어느 농부의 세 아들 중 하나로, 고지식하며 열심히 농사일을 하여 가족들을 부양하고 있다. 악마는 형제들의 사이를 가르려고 갖가지 이간을 붙이지만, 그런 것에는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일만 아는 이반에게, 악마도 더 이상 어찌 하지 못하고 스스로 망하고 만다는 내용의 이야기이다. 러시아에 옛날부터 전해오는 전설을 바탕으로, 만년의 톨스토이가 자기의 무저항주의, 반전주의(反戰主義) 등을 담은 민화이다. 작가는 그의 만년의 예술관에서, 이런 간소한 작품이야말로 참다운 예술이라고 하였다. 이밖에 《사람은 왜 사는가》 《사랑이 있는 곳에 신이 있다》 《세 사람의 은자(隱者)》 등 수많은 민간설화를 만년에 썼지만 《바보 이반》은 그 대표적인 것으로서 유명하다.
이 소설의 줄거리는 매우 소박하면서도 우리의 현실을 그대로 비추는 생활의 거울과도 같다. 옛날 부유한 농부가 살았는데 그에겐 아들 셋이 있었다. 그들의 이름은 세미욘, 타라스 그리고 이반이었다.그 외에 마리니야라는 청각장애인 딸이 하나 있었다. 세미욘은 군인으로 성공을 했고 타라스도 돈을 벌어 출세를 했는데 이반은 장애인인 누이와 함께 집에 남아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이후 세미욘은 귀족의 딸과 결혼을 했고 타라스 역시 그 부유함으로 남들의 부러움을 샀다. 그러나 이반은 형들처럼 돈도 명예도 없이 누이동생을 데리고 순박하게 살았다. 사람들은 그렇게 사는 이반을 바보라고 불렀다.그래서 톨스토이는 그 소설의 제목을 ‘바보 이반’이라 붙인 것이다. 이 소설은 오늘의 세태를 그대로 말해준다. 모두가 다 지배하고 주장하려고 한다. 또 남을 짓밟고 돈에만 눈이 어둡다. 묵묵히 살아가고 있는 ‘이반식’의 삶. 비록 바보 같지만 남을 배려하는 그 마음이 그리워진다
바보이반
세계적인 소설가 톨스토이가 쓴 단편 가운데 '이반의 바보'라는 글이 있습니다.
이 소설은 읽은 학생도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만 그 줄거리를 다시 소개하고자 합니다. 옛날, 어떤 곳에 세 아들을 가진 농부가 살았답니다. 그들은 세미욘과 타락시와 이반이라고 불렸습니다. 맏아들인 세미욘은 전쟁하는 군인이 되었고 타라시는 돈벌이에만 몰입하는 장사꾼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막내인 이반은 집에서 농사만 지었습니다.
세미욘은 군인으로서 출세하여 귀족의 딸과 결혼했으며 타라시도 크게 돈을 벌어 상인의 딸과 결혼했습니다. 그러나 이반은 자기 몫의 재산마저 형들에게 나누어 준 뒤 가난한 가운데 묵묵히 성실하게 일만 하였습니다. 형들은 이러한 이반을 바보라고 불렀습니다.
이반은 정직, 근면한 농부였으며 권력이나 명예에 대한 갈망도, 교만도, 아첨도 없었습니다. 형들은 허욕과 사치와 이기심의 노예가 되어 마침내 몰락하여 동생인 이반에게 와서 먹여 살려 달라고 애원하게 됩니다. 이반은 쾌히 허락합니다만 한 가지 조건을 붙였습니다. 그것은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일을 많이 해서 손에 굳은살이 박힌 사람만이 식탁에 앉을 자격이 있지만 놀기만 좋아하는 게으름뱅이들은 남이 먹다 남은 찌꺼기를 나중에 먹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소설의 줄거리입니다. '이반의 바보'는 정의와 근로가 통하는 이상적인 세계입니다. 돈과 권력이 지배할 수 없는 나라입니다.
조그만 물건 하나도 아껴 쓰며 열심히 일한 이반이 잘 살게 되고 세미욘과 타라시가 몰락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입니다.
이제 우리 사회도 옛날과는 많이 달라졌습니다. 돈과 권력이 활개치던 것은 옛날입니다.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이 대접받는 그런 사회로 바뀌어져 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가장 유능한 자는 부지런히 일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맙시다.
잠이 안 오는 사람에게는 밤이 길고 다리가 아픈 사람에게는 오 리도 멀 듯이 부지런히 일하지 않는 자에게는 인생이 고달프고 살기 힘든 법입니다.
아울러 물건 하나라도 소중하게 다룰 줄 알고 절약하는 학생이 되어야 합니다.
청소 시간 청소 용구를 다룰 때에는 참말로 청소 용구를 고맙게 생각하고 그것을 아껴 쓰는 학생, 그리고 다른 학생보다 솔선하여 일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물건을 아끼는 자에게만 물건이 모여드는 법이며 물건을 소중하게 다루는 사람만이 자기의 생명을 보호받을 자격이 있다는 말이 있듯이 물건을 아끼는 마음을 가지고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됩시다.
http://www.kimhae.ms.kr/myungsang/ms04.htm
<바보 이반>에서 악마 두목은, 첫째인 군인 세묜과 둘째인 장사꾼 타라스, 셋째인 농사꾼 이반, 그리고 넷째인 말 못하는 소녀 말라냐 형제가 저희들끼리 싸우도록 만들기 위해 작은 악마 셋을 보낸다. 첫번째 작은 악마는 세묜의 마음에 만용을 잔뜩 불어넣어 인도를 침공하게 하고는 나중에 화약을 모두 물에 적셔 전쟁에서 패하게 한다. 두번째 작은 악마는 타라스의 마음속에 터무니없는 욕심을 불어넣어 갖고 싶은 것을 모조리 사도록 해 빚에 쪼들리게 한다.
작은 악마들은 이반에게도 접근해 그가 이 일을 하지 못하도록 방해하지만 이반은 일을 중단하지 않는다. 결국 악마들의 음모는 성실한 이반에게 발각된다. 악마들은 목숨을 구걸하는 대가로 어떤 병이든 낫게 해주는 나무 뿌리와, 호밀로 병정을 만들 수 있는 기술, 나뭇잎을 손으로 비벼 금화로 만드는 비법 등을 가르쳐주고 사라진다.
착한 이반은 세묜에겐 원하는 만큼의 병정을 만들어 주고, 타라스에게는 금화를 줘 부자가 되게 한다. 두 형들은 이를 기반으로 나라를 세워 임금이 된다. 이반 자신도 아픈 공주의 병을 고쳐주어 공주와 결혼하고 임금이 된다.
한편 칼을 좋아하는 세묜은 결국 칼로 망하게 되고, 타라스는 백성들은 모두 장사꾼으로 변하게 해 백성들이 먼저 물건을 닥치는 대로 사들이는 바람에 결국 먹을 것조차 구하지 못해 굶주린다. 이에 비해 바보로 불리건 말건 이반은 군대도 만들지 않고, 일만 한다. 그의 나라에선 금화를 장난감으로 쓰고, 필요한 것은 물건끼리 바꾸어 쓴다. 악마의 술수가 통하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바보 이반을 굴복시킬 수 없음을 알게 된 악마들은 도망친다.
비록 바보로 불리긴 했지만 이반과 백성들은 편히 살고, 수많은 사람들이 이 나라로 모여 든다.
*독후감을 쓰시는 것 같아서 줄거리보다는 그 서평을 위주로 글을 뽑았습니다.
바보 이반의 산 이야기 추천
산으로 가는 길
최성현
사람의 길과 산의 길.
산에는 풀, 나무, 곤충, 새, 야생동물, 민물 생물들이 열쇠와 돈과 책과 무기를 만들지 않고 살고 있다.
그런 것을 가진 인간과 그들 중 과연 어는 족이 바보일까?
이 세상에는 신기한 것이 참 많은데, '매직 아이'도 그 가운데 하나다.
초점을 바꿔서 보면 그냥은 안 보이던 그림이 겉그림 속에서 마술처럼 나타난다.
여러 가지 색깔을 지닌 찬란한 입체 그림이다.
겉그림만 보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그림이 기적처럼 나타난다.
산을 볼 때도 '매직 아이'와 같은 관점의 전환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산에 가 보았더니 나무밖에 없더라.'는 식이 된다. 산으로 가는 몇 가지 방법을 소개한다. 인디언 돈후앙이 그 첫 번째 방법을 일러주고 있다.
인디언의 가르침
지구상에는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은 종류의 생물이 살고 있지만, 삶의 방식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인류의 삶이고, 다른 하나는 그 나머지 생물들의 삶이다. 앞의 것은 많은 것을 바꾸고 새로 건설한다는 특징,
요컨대 흔적을 남기는 반면 뒤의 것은 남기지 않는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과거를 돌이켜 보아도 그 사실을 알 수 있고, 당장 산에 가보아도 알 수 있다. 산허리를 자르고 건물을 세운 것도 사람이고, 쓰레기를 버린 것도 사람이다. 하지만 그 밖의 생물들은, 인간보다 힘이 센 호랑이조차 무엇 하나 남기는 게 없다.
지구는 인간이 남긴 흔적으로 가득하다. 산 또한 마찬가지다. 사람이 꺾고, 새기고, 버린 것을 어느 산에서나 쉽게 볼 수 있다. 그들에게 산은 흙 덩어리에 불과하고, 그곳에 사는 나무나 풀, 벌레, 야생동물들은 미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까?
한편 그들과는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땅은 어머니고, 나무와 풀, 새, 벌레, 물고기, 야생동물들은 형제이자 자매이다. 다음에 소개하는 한 인디언의 말씀을 들어 보라.
대지는 우리 모두의 어머니이고, 태양은 우리의 아버지다. 우리의 할아버지는 그의 마음을 담아 모든 것에 생명을 주는 창조주다. 동물과 나무는 우리의 형제다. 저 날개가 있는 생물은 우리의 자매다. 우리는 대지의 자손, 그러므로 대지에 상처를 입히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아침 인사를 잊어 아버지 태양을 화나게 하지 말아야지.우리는 할아버지가 창조하신 모든 것을 마음으로부터 섬긴다. 모두 함께 같은 공기를 마시고 있다. 짐승도, 나무도, 새도, 사람도. 콜로라도 고원에 사는 이 티와 인디언의 말씀에 동의한다. 그의 말씀처럼 산은 우리의 어머니이며, 그곳에 사는 모든 생물은 우리의 형제이자 자매다.
그들을 하등생물이라고 말하지 말라.
그들은 학교와 사원을 짓지 않고도 남을 소중히 여길 줄 알고, 침묵할 줄 알며, 가만히 지켜볼 줄 알고, 변함없이 사물을 대할 줄 안다. 경전을 만들지 않고도 무소유를 실천하며 살아간다. 병원 없이도 건강하게 잘 살고 있다.
인간은 그들을 깔보며 거들떠보려고도 않는다.
그들의 도움으로 살아가면서도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고마워할 줄도 모른다.
그러다가 <아낌없이 주는 나무>의 소년처럼 뭔가 필요하거나 지치고 병들었을 때야 그들을 찾아간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위로를 받는다.
비로소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삶을 눈여겨본다.
우리는 모두 이렇게 나를 중심으로 살고 있는데,
'나'란 것을 과연 무엇인가?
피부를 경계로 그 안을 나라고 해야 할까?
대개 그렇게 몸뚱어리를 나로 알고 살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보라. 나는 내 부모나 가족, 이웃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쌀이나 배추가 없어도 살기 어렵다.
이렇게 생각을 밀고 나가 보면 '나'가 있기 위해서는 이 세상 모든 것이 필요하다는 게 분명해진다.
지구는 물론 우주가 있어야 내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베트남 승려인 틱낫한은 조금 다른 방식으로 같은 말씀을 하고 있다.
단 한 장의 종이에서도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존재를 볼 수 있다.
여기 이 종이가 있는 것은 구름이 있었기 때문이고,
숲이 있었기 때문이고,
나무를 자른 사람이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한 한 장의 종이에서 구름과 숲 나무를 벤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인간을 포함하여이 세상 만물은 모두 이처럼 서로 의지하여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설득력이 있지 않은가?
그의 말씀을 조금 더 들어 보기로 하자.
전생에 우리는 나무였을지 모른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현세에서도 우리들은 계속해서 나무라고 하는 것이다.
나무가 없으면 인간은 살아갈 수 없다.
요컨대 나무와 인간은 서로 의지하여 하나의 큰 전체로서 존재하고 있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우리들은 나무다.
우리들은 나무이기도 하고,
공기이기도 하고, 수풀이기도 하고, 구름이기도 한 것이다.
나무들이 모두 죽어 버리면 우리 인간도 죽어 없어진다.
틱낫한은 사람과 나무와 공기와 수풀과 구름을 각각 나뉘어진 존재가 아니라 그 모든 것을 거대한 한 생명체로 파악하고 있다.
잠시라도 숨을 쉬지 않고서는 생명을 이어갈 수 없다는 점에서 그의 말씀은 옳다.
우리는 나무가 없어도 살아갈 수 없고,
구름이 없어도 살아갈 수 없다.
식물과 영혼으로 대화를 하는 동후앙이란 인디언이 있다.
그는 식물 공부를 위해 자신을 찾아온 한 백인 식물학자에게 이런 말을 한다.
"식물을 채취해야 하는 사람은 먼저 식물에게 그 까닭을 말하고 사과해야 하며,
또 언젠가는 자신의 몸뚱이가 그들의 양식으로 주어질 것임을 깊이 믿도록 신뢰를 주어야 한다."
평생 동안 사람은 엄청난 양의 식물과 동물을 먹으며 생명을 유지해 간다.
그것들이 있어서 사람은 살아갈 수 있다.
따라서 죽은 뒤에는 우리의 몸을 그들에게 주는 것이 당연한 자연의 도리다.
하지만 그렇게 하자면 먼저 할 일이 있다.
그것은 나무나 풀보다 인간이 낫다는 생각을 버려야만 한다.
그래야 평등한 관계가 보이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돈후앙은 백인 식물학자에게 식물 앞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 이렇게 말하게 한다.
"나는 당신보다 나를 조금도 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평등하다."
식물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자만심이 모두 없어질 때까지 큰 소리로 이 말을 반복하라.
속으로 말해서는 안 된다. 큰 목소리로 말해야 하고,
또 남들 앞에서도 그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식물의 응답을 들을 수 있다는 게 돈후앙의 가르침이다.
자연의 신비에 접속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이 세상에서 가장 잘난 것은 인간이라는 자만심을 버리고, 만물을 존중할 줄 아는 마음을 되찾아야 한다는 것을 돈후앙은 우리에게 일깨워 주고 있다.
* 글 가져온 곳 - 바보 이반의 산이야기 - 최성현 지음 (도솔 펴냄)
[2013 신년특집][신춘문예/동시 당선작/당선소감/심사평] 아빠의 공책
[동시 당선작 - 김유석]
공책 한 권 달랑 들고
들판학교 다니는 우리 아빠
빽빽이 썼다가 지우고
이듬해 봄부터 다시 쓰는
그래도 너널거리지 않는
울 아빠 파란 공책에는
찰랑찰랑 벼 포기들이 넘실거려요
맞춤법이 조금씩 틀린 벌레소리 들리고
할아버지 닮은
염소도 한 마리 묶여 있어요.
똑 똑 똑
땀방울 말줄임표를 따라가면
하늘이 내려와 밑줄을 긋는 지평선 위에
따뜻한 내 옷이랑 새 운동화가 놓여 있지요.
흰 눈 지우개로 말끔히 지워내서
아무도 모르는 줄 알지만
너무 꾹꾹 눌러 써서
뒷장에 남은 자국을
겨울이면
기러기들과 함께 나는 읽지요.
김유석
[동시 당선소감] "이성 사이 뭉클한 감성… 풋풋한 동심의 소리 적었다"“좋은 시는 동시를 닮았다.”
그렇습니까? 시를 쓰면서, 흙냄새 나는 자연 속에서 사람 사는 일들의 비유와 상징을 긷다 보면 이성의 이랑 사이로 촉을 내미는 뭉클한 감성들이 있습니다. 여리고 풋풋한 것들, 딴엔 반지레한 도깨비바늘 풀씨 같은 것들이 머리가 여럿 달린 사유의 바짓가랑이에 묻어나곤 합니다. 아슴한 유년에서부터 폐교된 들판 운동장에 이르기까지 많은 것이 이곳을 들러 갔지만 아직 더 많이 남아 자생해가는 것들, 길섶 강아지풀이나 눈밭에 찍힌 너구리 발자국을 따르다 보면 이명처럼 들려오는 노는 아이들 소리 그것을 적었습니다.
어쩌면 몇몇 남아 있는 시골 아이들보다 방학 때 한 차례씩 다녀가는 도회지 아이들에게서 더 절실할 자연, 어른들의 생각과 어른들의 느낌으로 쓰여지고 읽히기 쉬운 생물들의 모습을 동시를 닮고 싶은 욕심으로 적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마른 풀잎들이며 발목이 붉은 기러기들, 추운 모습으로 겨울 들판을 지키는 모든 것이 기뻐할 듯싶습니다. 쉬 눈에 밟히지 않는 작고 무르고 외딸은 것들의 숨소리를 들으며 하루 들길을 걸었습니다. 서툴고 어줍은 글을 심사해주신 선생님께 깊은 절 올립니다. 늘 저만치 안동해 주는 사람, 쿨럭 거리는 동인들, 그리고 “내 친구가 시인이야” 하고 어깨에 힘주는(?) 친구들에게도 감사 드립니다. 더 남은 가슴은 지금도 종종 머리 센 아들을 “아가”라 부르는 노모의 잠을 솜이불처럼 덮어 드려야겠습니다.
▲1960년 전북 김제 출생
▲전북대 문리대
▲1989년 전북일보, 199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각각 시 당선
[동시 심사평] 말줄임표를 땀방울에 비유한 동화적 상상력 돋보여국민의 문학 축제라 부를 만큼 다양한 연령층의 사람들이 많은 작품을 보내왔다. 작품마다 소박하고 진솔한 동심이 담겨 있어 기뻤다. 그러나 아쉬운 점은 전반적으로 생생한 동심의 체험이 녹아 있는 작품이나 오늘날 아이들의 현실과 애환을 담은 작품이 드물다는 것이었다. 최종적으로 심수철, 최인숙, 황경순, 하미경, 박대성, 김경련, 김유석이 남았다. 심수철의 ‘내 마음도 토란잎처럼’은 비유가 적절했지만 너무 평범했다. 최인숙의 ‘필리핀 벼룩시장’은 결말은 괜찮았으나 시상이 단조로웠다. 황경순의 ‘무당벌레’는 발상은 좋았으나 소품이었다. 하미경의 ‘밥통 속 아줌마’는 참신했지만 내용이 약했다. 박대성의 ‘나무가 말해 주는 걸’은 시적 표현과 언어 구사력이 뛰어났다. 그러나 성인의식이 두드러진 것이 흠이었다. 김경련의 ‘풍경 소리’는 동시를 오랫동안 쓰고 수련한 공력이 엿보여 미더웠다. 생활 주변의 소재를 동심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잔잔한 여운으로 그려내고 있으나 기존 동시의 틀을 벗어나지 않은 흔한 소재와 표현이어서 뚜렷한 개성이 부족했다. 그에 비하면 김유석의 ‘아빠의 공책’은 동화적 상상력과 참신한 비유의 독창성이 돋보였다. 아빠의 농사를 공책에 비유하여 벼가 자라는 들판에서 말줄임표처럼 말없이 땀방울을 흘려 아이의 옷과 운동화를 마련해 준다는 이야기를 신선한 시적 표현과 상상력으로 담아낸 역량이 미더웠다. 흔한 소재를 자신만의 이미지로 새롭게 표현해 낸 독창적인 발상과 상상력이 앞으로 개성이 뚜렷한 동시를 쓰리라는 기대감을 갖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