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과 에서의 만남
1절. 야곱이 눈을 들어 보니 에서가 사백 명의 장정을 거느리고 오고 있는지라 그의 자식들을 나누어 레아와 라헬과 두 여종에게 맡기고 |
야곱이 눈을 들어 보니까 에서가 400명의 장정을 거느리고 옵니다. 귀에 들었던 400명이 눈으로 볼 수 있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야곱은 자식들을 나눕니다. 레아, 라헬, 두 여종에게 각각 나누어 맡깁니다.
2절. 여종들과 그들의 자식들은 앞에 두고 레아와 그의 자식들은 다음에 두고 라헬과 요셉은 뒤에 두고 |
야곱은 세 무리로 나눕니다.
여종들과 그들의 자식들 – 가장 앞에
레아와 그의 자식들 – 다음에
라헬과 요셉 – 가장 뒤에
에서에 의해 해를 당할 것을 고려하여 세 무리로 나눕니다. 자신이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을 맨 뒤에 두었습니다. 야곱이 에서를 만나는데 복잡한 감정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3절. 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그의 형 에서에게 가까이 가니 |
브니엘 이전에 야곱은 뒤에 있었는데 브니엘 이후에 이제 그들 앞으로 나아갑니다. 야곱은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그의 형 에서에게 가까이 나아갑니다. 몸을 땅에 일곱 번 굽힌 것은 복종의 표시입니다. 과거의 잘못에 대한 용서를 구하는 뜻도 있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복을 사모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럴지라도 형 에서의 장자권을 사고 아버지와 형을 속인 것은 잘못이었습니다. 그는 하란 생활 20년의 시간을 통해서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습니다. 하란 생활을 고된 삶이었지만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워지는 기간이었습니다.
4절.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이하여 안고 목을 어긋맞추어 그와 입맞추고 서로 우니라 |
에서가 야곱을 보자 달려와서 맞이합니다. 야곱은 절룩거리면서 나아갔을 것입니다. 에서는 야곱은 안고 목을 어긋 맞추고 입 맞춥니다. 입을 맞추는 것은 환영의 표시입니다. 두 사람은 서로 웁니다. 20년 만에 만난 형제입니다. 야곱이 가졌던 모든 불안, 염려는 근거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에서의 마음에 이미 작업을 해놓으셨습니다. 에서에게 야곱에 대한 복수심이 없었습니다. 동생에 대한 증오심, 적개심이 사라졌습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의 마음에 있는 두려움을 제거해 주시고, 에서의 마음에 있을 수 있는 증오심과 복수심을 제거해 주셨습니다. 두 사람의 만남에 눈물이 있었습니다.
5절. 에서가 눈을 들어 여인들과 자식들을 보고 묻되 너와 함께 한 이들은 누구냐 야곱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의 종에게 은혜로 주신 자식들이니이다 |
에서가 눈을 들어 여인들과 자식들을 보고 그들이 누구인지 묻습니다. 야곱은 자신을 ‘주의 종’이라고 낮춥니다. ‘주’는 에서입니다. 에서에게 아주 겸손한 태도를 취합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자식들”이라고 답합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은혜를 인식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6절. 그 때에 여종들이 그의 자식들과 더불어 나아와 절하고 |
그 때에 여종들과 그의 자식들이 더불어 나아와 절합니다. 그들은 맨 앞에 배치된 사람들입니다.
7절. 레아도 그의 자식들과 더불어 나아와 절하고 그 후에 요셉이 라헬과 더불어 나아와 절하니 |
그 다음 레아와 그의 자식들이 나아와 절하고, 맨 나중에 요셉과 라헬이 나아와 절합니다. 야곱이 혹시 형이 어떻게 할지 몰라서 배치해 놓은 순서대로 나아와 절을 합니다.
8절. 에서가 또 이르되 내가 만난 바 이 모든 떼는 무슨 까닭이냐 야곱이 이르되 내 주께 은혜를 입으려 함이니이다 |
에서는 또 자신이 만난바 있는 모든 떼는 무슨 이유로 보낸 것인지 묻습니다. 야곱은 “내 주께 은혜를 입으려 함”이라고 답합니다. 에서는 “내 주”라고 부릅니다.(8절. 13절. 14절에 두 번, 15절. 5번 나옴) 형을 높이고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마음입니다. 하나님께 연단 된 마음입니다. 하나님께 연단 된 마음은 겸손합니다. 그는 에서의 호의를 입고자 한다고 답을 합니다. 그것은 자신이 형에게 잘못했음을 뉘우치고 있다는 뜻입니다.
9절. 에서가 이르되 내 동생아 내게 있는 것이 족하니 네 소유는 네게 두라 |
에서는 야곱에게 “내 동생아”라고 부릅니다. 야곱은 에서에게 “내 주”라고 불렀지만 에서는 야곱에게 “동생”이라고 합니다. 야곱을 형제로 대합니다. 에서는 자신에게 있는 것이 족하다고 합니다. 에서는 세일 땅에 거했는데(32장 3절. 33장 16절) ‘족하다’고 한 것은 풍족하다는 뜻입니다. 에서도 어렵게 살고 있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10절. 야곱이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내가 형님의 눈앞에서 은혜를 입었사오면 청하건대 내 손에서 이 예물을 받으소서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 |
야곱은 그렇지 않다고 하면서 자신이 형님의 눈앞에서 은혜를 입었다면 그 뜻으로 예물을 받아 달라고 청합니다. ‘예물’은 27장 35절의 ‘복’과 동일한 단어입니다. 야곱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복을 에서에게 돌려주려고 하였습니다. 야곱은 에서의 얼굴을 보는 것이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 같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얼굴’은 브니엘을 연상하게 합니다(32장 30절). 야곱은 브니엘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지만 목숨을 보전하였습니다(32장 30절). 에서는 호의적으로 야곱을 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대하는 것과 같습니다. 기도를 하는 사람은 이것이 하나님의 얼굴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손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다, 이런 고백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인식하는 고백입니다.
11절.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베푸셨고 내 소유도 족하오니 청하건대 내가 형님께 드리는 예물을 받으소서 하고 그에게 강권하매 받으니라 |
야곱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은혜를 베푸셨고 자신의 소유도 족하니 자신이 형님에게 드리는 예물을 받아 달라고 청합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은혜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야곱은 진심으로 에서에게 예물을 드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야곱이 강권하자 에서가 예물을 받습니다. 선물을 받음은 더 이상 원한이 없다, 환영한다, 서로 화해가 이루어졌다, 그런 표가 됩니다.
12절. 에서가 이르되 우리가 떠나자 내가 너와 동행하리라 |
에서는 “우리가 떠나자”고 합니다. 야곱에게 함께 가자고 제안을 합니다. 자신이 야곱과 동행을 하겠다고 합니다. 에서가 400명의 장정을 데리고 온 것은 야곱 일행을 무사히 집까지 데려다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야곱 일행을 호위하도록 데리고 온 것입니다.
13절. 야곱이 그에게 이르되 내 주도 아시거니와 자식들은 연약하고 내게 있는 양 떼와 소가 새끼를 데리고 있은즉 하루만 지나치게 몰면 모든 떼가 죽으리니 |
야곱은 에서의 제안을 거절합니다. 에서는 “내 주”라고 합니다. 자신의 자식들이 연약하다고 합니다. 하란을 떠나서 지금까지 자식들이 아무런 문제 없이 여행을 했는데 왜 연약하다고 하는지? 아마도 핑계일 수도 있습니다. 양 떼와 소가 새끼를 데리고 있다고도 합니다. 가축들 가운데 새로 태어난 것들이 있어서 속도를 낼 수 없다고 합니다. 지나치게 몰면 모든 떼가 죽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란에서부터 지금까지 잘 몰고 왔는데 말입니다.
14절. 청하건대 내 주는 종보다 앞서 가소서 나는 앞에 가는 가축과 자식들의 걸음대로 천천히 인도하여 세일로 가서 내 주께 나아가리이다 |
야곱은 겸손하게 자신을 이해해 주기를 구합니다. 13-14절에 에서에 대해서 “내 주”라고 하면서 여기에서는 자신을 ‘종’이라고 합니다. 야곱은 자신보다 앞서 가기를 청합니다. 자신은 천천히 가축들과 자식들의 걸음에 맞춰 이동하겠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세일로 가서 에서를 만나겠다고 합니다. 실제로 세일로 가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후일에 찾아가 보았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기록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현재의 상황을 빨리 벗어나고자 하는 얘기일 것입니다.
15절. 에서가 이르되 내가 내 종 몇 사람을 네게 머물게 하리라 야곱이 이르되 어찌하여 그리하리이까 나로 내 주께 은혜를 얻게 하소서 하매 |
에서는 자신의 종 몇 사람을 머물도록 하겠다고 합니다. 에서는 야곱 일행의 안전을 염려해서 하는 얘기일 것입니다. 에서의 관대한 제안입니다. 야곱은 그 제안도 거절합니다. “내 주께” 하면서 겸손한 태도를 취합니다. “나로 내 주께 은혜를 얻게 하소서.”라고 요청합니다. 야곱은 자신의 자식들도 약하고, 가축들 가운데도 약한 것들이 있어서 빨리 움직일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의 속도에 맞게 움직여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은혜를 얻는다는 것은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뜻일 것입니다.
16절. 이 날에 에서는 세일로 돌아가고 |
에서는 세일로 돌아갑니다. 두 형제는 여기에서 헤어집니다. 그 이후 아버지 이삭의 장례식 때 다시 만납니다(35장 29절). 그 이전에 만난 여부를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17절. 야곱은 숙곳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그의 가축을 위하여 우릿간을 지었으므로 그 땅 이름을 숙곳이라 부르더라 |
에서와의 갈등 문제는 해결이 되었습니다. 야곱은 숙곳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습니다. 가축을 위하여 우릿간도 짓습니다. 그 땅 이름을 숙곳이라고 짓는데, ‘천막들’이라는 뜻입니다. 요단 동편에 있는 마을입니다. 거주할 집을 세웠음을 의미합니다. 야곱이 이제 안정감을 갖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숙곳은 야곱이 지은 네 번째 이름입니다. 벧엘, 마하나임, 브니엘에 이어 네 번째 이름입니다.
18절. 야곱이 밧단아람에서부터 평안히 가나안 땅 세겜 성읍에 이르러 그 성읍 앞에 장막을 치고 |
야곱은 밧단아람에서부터 평안히 가나안 땅 세겜 성읍에 도착합니다. ‘평안히’는 20년 전에 기도했던 내용이 성취된 것입니다(창 28장 21절). 세겜 성읍에 도착한 것은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왔을 때 도착한 곳과 같습니다(창 12장 6절). 요한복음 4장 5-6절에 야곱이 세겜에서 우물을 팠다고 합니다. 세겜은 야곱의 우물이 있는 곳입니다. 야곱은 성읍 앞에 장막을 칩니다. 자신이 거주할 곳을 마련한 것입니다.
19절. 그가 장막을 친 밭을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아들들의 손에서 백 크시타에 샀으며 |
야곱은 자신이 장막을 친 밭을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아들들의 손에서 삽니다. 백 크시타를 주고 삽니다. 금인지 은인지 알 수 없는데 은일 것입니다. 크시타는 무게 단위입니다. 정확한 무게는 알 수가 없습니다. 땅을 합법적으로 구입한 것입니다. 땅을 샀다는 것은 정착하겠다는 의도입니다. 이제 그곳에 머물러 살겠다는 뜻입니다.
20절. 거기에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 불렀더라 |
야곱은 세겜에 제단을 쌓습니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예배하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겠다는 고백입니다. 5절이나 11절에 야곱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셨음을 말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계속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제단을 쌓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고백도 있습니다. 제단을 쌓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의 표입니다. 노아가 제단을 쌓았고(창 8장 20절) 아브라함이 그러했습니다(12장 7절, 8절. 13장 18절. 22장 9절). 이삭이 제단을 쌓았습니다(창 26장 25절). 야곱도 제단을 쌓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창세기 28장 21절에 “여호와는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라는 서원을 상기시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주신 새 이름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새로운 삶을 시작하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야곱은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겠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세겜이 아니라 벧엘에서 그렇게 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가 세겜에 정착한 것은 하나님의 결정이 아닙니다. 야곱 자신의 결정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끌어 가시고자 하신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벧엘로 인도하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결정을 해서 세겜에 머물고 땅을 산 것입니다. 그는 더 이상 나아가지 아니하고 멈추어버렸습니다. 34장은 바로 야곱의 잘못된 결정에 근거를 둡니다. 신앙은 하나님께서 가시는 곳까지 가야 하고 하나님께서 멈추는 곳에서 멈추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가시고자 하시는 것까지 가지 않고 멈추어 서서 여기까지라고 자신이 선을 그으면 안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