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한다는 걸 몰랐던 것들/나짐 히트메트
나짐 히트메트(이스탄불 출신 터키 시인)
1962년 3월 28일
나는 프라하와 베를린을 잇는 기차 창가에 앉아 있다.
밤이 내린다.
한 마리 지친 새처럼
연기 자욱한 젖은 평원 위로 밤이 내리는 것을 내가 좋아한다는 걸
나는 몰랐었다.
해 질 녘을 지친 새에 비유하는 걸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대지를 사랑한다는 걸 나는 몰랐었다.
대지에서 일해 본 적이 없는 사람도 대지를 사랑할 수 있다는 걸.
나는 대지에서 일해 본 적이 없다.
그것은 분명 나의 정신적 사랑이리라.
그리고 강들을 나는 언제나 사랑했다.
꼭대기에 성들의 왕관을 쓰고 있는 유럽의 언덕들
그 언덕들을 휘감아 돌며 움직임 없이 존재하는 강이든
눈으로 훤히 볼 수 있을 만큼 멀리까지 뻗어 있는 강이든
똑같은 강에는 한 번이라도 손을 담글 수 없다는 걸 나는 안다.
강이 새로운 빛들을 가져오리라는 것도.
우리가 결코 보지 못할 빛들을.
내가 하늘을 사랑한다는 걸 나는 몰랐었다.
구름이 끼었든 맑든.
내가 감옥에서 터키어로 번역한 <전쟁과 평화>에 나오는 안드레이가
*보로디노에 누워 바라보던 그 푸른 하늘을.
목소리들이 들린다.
푸른 하늘이 아닌 교도소 마당에서 들려오는
간수들이 누군가를 또 때리고 있는 소리가.
내가 나무를 사랑한다는 걸 나는 몰랐었다.
모스크바 근처 *페레델키노에 있는 헐벗은 너도밤나무들을.
겨울에 그 나무들과 우연히 마주쳤었다, 고귀하고 겸손한 나무들.
*일가즈 숲에서는 수놓은 린넨 손수건을 소나무 가지에 묶었었다.
행운을 기대하며.
내가 길들을 사랑한다는 걸 나는 전혀 몰랐었다.
심지어 아스팔트 길도.
바퀴 뒤로 보이는 길을 사랑한다는 걸.
우리 두 사람은 닫힌 상자 안에 있었고
세상은 양쪽에서 말없이 스치며 멀어져 갔다.
나는 살면서 누구와도 그렇게 가까워진 적이 없다.
노상강도들이 *볼루와게레데 사이의 붉은 길에서 나를 멈춰세웠다.
그때 나는 열여덟 살이었고
그들이 마차에서 가져갈 수 있는 것은 내 목숨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열여덟 살 때는 가장 소중히 여기지 않는 것이 목숨이다.
전에 이것을 어딘가에 쓴 적이 있다.
어두운 진창길을 걸어 그림자극을 보러 가고 있다.
금식 기도 기간의 밤
길을 안내해 주는 종이등
어쩌면 이런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는 그것을 어디선가 읽었는지도 모른다. 여덟 살 소년이
그림자극을 보러 가고 있다고.
이스탄불의 금식 기도날 밤에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서.
할아버지는 빨간색 터키 모자를 쓰고 예복 위에
흑담비 깃이 달린 털코트를 입고 있다.
하인의 손에는 등불이 들려 있고
나는 기쁨을 감출 수 없다.
어떤 이유에선지 꽃들이 생각난다.
양귀비, 선인장, 노랑수선화
이스탄불 카디코이에 있는 노랑수선화 정원에서 마리카와 입맞췄었다.
그녀의 숨결에서는 신선한 아몬드 향이 났다.
나는 열일곱 살이었고
내 가슴은 그네를 타고 하늘에 가닿았다.
내가 꽃을 사랑한다는 걸 나는 몰랐었다.
감옥에 있을 때 친구들이 붉은색 카네이션 세 송이를 보내주었는데도.
지금 막 별들이 생각났다.
나는 별들도 사랑한다.
할 말을 잃고 별들을 올려다보든
별들이 있는 곳으로 날아가든.
나는 우주 비행사들에게 묻고 싶은 것이 몇 가지 있다.
별들이 훨씬 더 컸는지
검은 벨벳 위의 큰 보석처럼 보였는지
혹은 오렌지색 천에 놓인 살구 같았는지
별들에 더 가까이 갔을 때 자랑스러웠는지.
내가 우주를 사랑한다는 걸 나는 몰랐었다.
내 눈앞에서 반짝이며 눈이 흩날린다.
한결같이 내리는, 젖어서 무거운 눈과 소용돌이치는 마른 눈발.
내가 눈을 좋아한다는 걸 나는 몰랐었다.
지금처럼 체리 열매처럼 붉은 석양을 보면서도
내가 태양을 사랑한다는 걸 나는 몰랐었다.
이스탄불의 그림 엽서에도 가끔 저런 색깔이 있긴 하지만
아무도 저런 식으로 그림을 그릴 수 없다.
내가 바다를 사랑한다는 걸 나는 몰랐었다.
*아조프해를 빼고는.
내가 구름을 사랑한다는 걸 나는 몰랐었다.
내가 구름 아래에 있든 구름 위에 있든
구름이 거인처럼 보이든 털 수북한 흰 짐승처럼 보이든.
가장 거짓말 같고 가장 나른하고 가장 소시민적인 달빛이 나를 비춘다.
나는 달빛이 좋다.
내가 비를 좋아한다는 걸 나는 몰랐었다.
촘촘한 그물처럼 내리든 유리창을 세차게 때리든.
내 가슴은 나를 비의 그물에 뒤엉키게 하거나 빗방울 속에 가두고
미지의 나라로 떠난다. 내가 비를 사랑한다는 걸 몰랐지만
프라하와 베를린을 잇는 기차 창가에 앉아
갑자기 이 모든 열정을 발견한 것은
내가 여섯 번째 담배에 불을 붙였기 때문이다.
오직 한 사람만이 나를 죽일 수 있으리라는 건
모스크바에 두고 온 누군가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멎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녀의 머리는 담황색을 띤 금발이고 속눈썹이 파랗다.
기차가 칠흑같이 어두운 밤을 가르며 흔들린다.
내가 칠흑같이 어두운 밤을 좋아한다는 걸 나는 전혀 몰랐었다.
엔진에서 불꽃이 튄다.
불꽃을 사랑한다는 걸 나는 몰랐었다.
내가 그토록 많은 것들을 사랑한다는 걸 나는 몰랐었다.
예순 살이 되어 프라하-베를린 간 기차 창가에 앉아 그것을 깨달을 때까지
마치 돌아오지 못할 여행처럼 세상이 멀어져 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나짐 히크메트, <내가 사랑한다는 걸 몰랐던 것들> 일부
*보로디노-모스크바에서 100킬로미터 떨어진 마을. 나폴레옹의 프랑스 군과 러시아 군이 가장 치열한 전투를 벌인 장소로, 이 전투에 참가한 소설 속 인물 안드레이 볼콘스키 공작은 총상을 입고 쓰러져 푸른 하늘을 보며 죽어간다. '저 영원한 하늘 아래서 사람들은 왜 서로를 죽이는가? 하고 의문을 던지며.
*페레델키노-보리스 파스테르나크가 9년간 칩거하며 <닥터 지바고>를 쓴 모스크바 근교 도시
*일가즈-터키 북부의 국립공원
*볼루, 게레데-옛 이스탄불로 이어지는 실크로드의 중
간 기착지들
*아조프해-흑해 북동쪽, 크림 반도 남동부에 있는 내해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씌어지지 않았다.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려지지 않았다.
최고의 날들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
가장 넓은 바다는 아직 항해되지 않았고
가장 먼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무엇을 해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 비로소 진정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가 비로소 진정한 여행의 시작이다.
-나짐 히크메트, <진정한 여행>중에서
죽음을 앞둔 사람이 기차 차창으로 바깥 풍경을 내다본다. 그리고 자신이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을 잊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시인은 오랫동안 감옥에 갇혀 지냈고, 타국에 유배당해 있었으며, 고통에 짓눌려 살았었다.
'돌아오지 못할 여행처럼 세상이 멀어져 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이 시를 쓴 이듬해 히크메트는 모스크바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파란만장한 삶을 산 시인이 마지막까지 사랑에 대해 노래한다.
우리는 어떤 감옥에 갇혀 있고 어떤 삶 속에 유배당해 있길래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을 잊은 걸까? 저녁노을과 나무와 길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세상과 삶과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을.
언제 그것을 다시 기억해 낼까?
시로 납치하다/류시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