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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했던 대로 님의 반응은 미지근하군요. 그럴 수 있죠. 이 이야기는 우리가 찾는 단서와는 차원이 다를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시작해 보겠습니다. 시작은 3년 전 여름이었습니다. 오전 일찍 친구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죠. 민희가 거처를 찾고 있다고 하더군요. 물론 저 역시 그녀를 알고 있었죠. 어릴 적 서울 살 때 친구를 통해서 알고 지내던 사이 정도죠. 친구로부터 그녀에 대한 언급이 있던 순간, 글쎄요.. 미묘한 감정이 일었던 것 같네요. 왜 하필 민희일까, 혹은 거처를 찾고 있다니, 이 우발적인 균열은 무엇일까 하는 불길함이 다가온 것이죠. 그럼에도 저는 친구와의 통화 맥락을 순식간에 이해했습니다. 그 섣부른 이해는 경솔한 판단으로 이어지기 마련이었죠. 그녀를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제 집에 말이죠. 이 지점부터 집중력을 가지고 따라오셔야 합니다. 어느 불길한 여름 오전에 벌어진 일이라는 거, 민희는 서울에서 저에게 오겠다고 하더군요. 문경까지, 버스를 타고 그 허허로운 존재를 이끌고 말입니다. 시간 상, 두시간 반 정도 소요되는 일정이었죠. 물론 그녀가 다른 자질구레한 행동을 자제한 채 이곳으로 직행한다면 말이죠. 저는 친구에게 일의 진행을 보고한 뒤, 비교적 깔끔한 집안을 다시 정리하기 시작하고 있는 저 자신을 의식하며 쓴 웃음을 지었겠죠. 계산 상 이제 서른 중반 정도의 여자가 이 집에 살기 위해 버스를 타고 처음인 여정에 오르고 있다. 그녀는 어째서 긴 시간 동안 서로의 생활에서 벗어나 있던 남자의 집에 찾아오겠다는 결정을 했을까, 그것도 그 짧은 순간에, 그 의심스런 여름 오전에.. 정확히 두시간 이십분 후 그녀로부터 문자가 도착합니다. 이제 상주를 지나고 있다는, 십분 정도면 문경 터미널에 도착한다더군요. 너무도 자연스럽게 저는 차를 몰고 터미널 주변으로 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마치 초현실주의 작가의 그림에서나 어울릴 것같은 왠지 불균형한 몸에 연한 하늘색 원피스를 입은 그녀와 마주치곤, 오전의 그 두루뭉실한 불길함이 어떤 구체성의 외피를 두르고 자신을 전시한다는 강한 느낌을 받고 들큰한 한숨을 쉬었습니다. 그녀는 다소 당돌한 표정으로 회가 먹고 싶다고 하더군요. 그 황폐한 여름 오전 회라, 뱃 속으로부터 스믈거리는 정체모를 역겨움과 함께 역시 비현실적으로 덩그러니 놓여있던 횟집 안으로 둘은 그렇게 들어갑니다. 모듬 한 접시를 시켜 먹은 후 바로 집으로 향했죠. 단순한 동선입니다. 물론 소주 한 병을 나눠 마신 후 입니다. 제 집에 도착한 그녀는 허술해 보이는 짐가방을 풀어 간단한 옷가지와 화장품 등속을 작은 방에 부려놓더군요. 이채로운 점이라면 그 짐에 곰인형이 두개나 딸려나왔다는 것이죠. 큰 것과 작은 것, 앞으로 이 곰인형 특히 작은 인형은 그녀의 아이덴티티를 설명하는 키워드로 여겨질 겁니다. 물론 그 의미가 있다면 말이죠. 그녀와의 첫날은 그렇게 별 일없이 저물어 갔습니다. 유독 더웠던 여름밤이었다고 기억됩니다. 서로 방 하나씩을 차지하고 그 미묘한 밤을 견뎌낸 것이죠. 아무 일 없이 말입니다. 여기서 아무 일 없었다는 표현은 말 그대로 해석하셔야 합니다. 중요한 알리바이가 되기 때문이죠. 날이 새고 둘은 오전 일곱 시 정도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일어났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런데 그녀는 누군가와 카톡을 주고 받고 있더군요. 그 이른 오전에 말입니다. 물론 그럴 순 있죠. 사생활이니까요. 저는 별 느낌없이 물었습니다. "이른 시간에 누구와 카톡을 하지? 혹시 민호 아냐." 여기서 민호는 그녀를 이곳으로 유도했던 제 친구를 말합니다. "맞아요. 아침부터 귀찮게 별 쓸데없는 말을 해요." 쓸데없는 말? "무슨, 혹시 너와 내가 섹스라도 했냐고 묻는 거 아니냐." "맞아요, 그런 추궁을 하네요. 미친 놈이죠." 들큰한 아침 이런 대화를 어떻게 해석하십니까. 어쨌든 이 지점도 잘 기억해 두셔야합니다. 두번째 날 아침 섹스에 관해 묻는 민호.. 둘은 오전부터 차를 몰고 바다로 향하게 됩니다. 그녀의 제안이었죠. 유독 바다를 좋아한다더군요. 한 이십 여 년 만에 함께한 그녀의 제안을 뿌리치기가 쉽진 않더군요. 저 역시 돌발적인 바다행에 흥미를 느꼈고요. 둘에겐 자연스러웠죠. 이곳에서 바다라 함은 흔히 영덕 쪽입니다. 그 익숙한 코스로 우리는 출발하게 됩니다. 도중 노인 부부의 차와 차선 다툼으로 잠깐 차를 세우고 신갱이를 했던 것 외에 별 일 없이 영덕에 도착한 둘은 넓은 방파제 사잇길을 별 감흥 없이 걸었습니다. 주말인데도 비교적 한산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여기서 또 한 장면, 그녀는 바다를 좋아한다고 했던 말과는 다르게 푸른 펼쳐진 바다엔 별 관심이 없고, 출발할 때 챙겨온 곰인형만 손에 들고 마치 대화라도하듯 거닐더군요. 서른 중반 여자 손에 들려있는 곰인형과 마치 그녀 몸의 연장이라 보아도 이상치 않은 연대는, 적어도 저에게는 불미스러운 풍경이었죠. 세상에, 바다를 보러 온 것이 아니라, 낯선 공간 곰인형과 놓여진 상태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는 그녀의 일상성을 본 것입니다. 너무도 자연스러워서 감히 불만을 표할 수도 없더군요. '너 바다 보러 온 거 아니니!' 발음되어지지 못했던 이 문장은 삼년 후 제 집에서 겨우 발화되긴 합니다. 어쨌든 그렇게 이상스런 해변 산책을 끝으로 다시 제 집에 도착한 시각이 오후 네시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둘은 이후로 역시 별일 없이 남은 하루의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이 둘째날의 다른 점이라면 민호가 제 집에 오기로 돼있다는 점이죠. 여기서 님게 환기시켜드릴 점이라면, 민희가 제 집에 오게 된 근본적인 이유가 낯선 곳에서 일자리를 구해 눌러 산다는 점이었죠. 그 임시 거처로 선택된 곳이 제 집이며 문경이란 지역인 셈이죠. 그렇기에 저와 민호는 이 동네에서 주로 이용하던 주점 여사장과 민희를 자연스레 연결 시키게 되죠. 그 이유 때문에 민호는 둘째 날 제 집에 와야했고, 오게 된다면 셋이 여사장네 가게를 방문해야 했습니다. 때문에 민희와 저는 이후 그를 기다리는 포지션에 놓여 있던 것이죠. 참고로 민희를 주점 사장과 연결시켜주려는 우리의 선택은 순전히 민희의 부탁 때문이었습니다. 그녀가 일관되게 종사했던 업종이 그렇다더군요. 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일찍 온다던 민호가 늦어졌습니다. 하던 일이 늦어지고 있다는 핑계를 대고 말이죠. 그러려니 했습니다. 그럴 수 있으니까요. 그럼에도 민호가 나타날 시간은 점점 늦어지고 민희와 저는 슬슬 짜증이 났겠죠. 근데 여기서 하나의 변곡점이 발생합니다. 밤 열시 반 쯤 민희는 외출복을 갈아입고(핸드백까지 들고) 밖에 나가 전화를 하고 오겠다는 겁니다. 아니, 이틀 내내 자유롭게 카톡과 통화를 하던 그녀가 왜 성복을 하고 밖으로 나가 전화를 하고 오겠다고 하는 거죠! 이상하죠. 당시에도 이 지점은 저의 흥미를 끌었던 부분입니다. 수상했죠. 그렇죠. 누군가를 만나러 나가는 상황, 추론할 수 있습니다. 미심쩍은 제 태도에 그녀는 엄마와 통화를 해야한다고 응수하더군요. 민호가 곧 도착할 시간인데 핸드백까지 들고 아파트를 나가 엄마와 통화를 하고 오겠다, 뭔가 구리죠. 그럼에도 저는 그러라고 동의 했고 그녀는 아파트를 나갔죠. 한 십분 정도 후였던 것 같네요. 그녀에게서 카톡이 왔습니다. "오빠 집에 들어가려는데 동 호수를 모르겠어요. 찍어줘요." 당시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럴 수 있죠. 처음 방문한 아파트니까요. 저는 동호수를 찍어 보냈습니다. 곧 그녀의 신경질적인 하이힐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열리더군요. 십 여 분 후 민호가 아파트 주변에 도착했다는 전화가 걸려 옵니다. 이상하죠. 이상해도 할 수 없겠죠. 일단 여사장과 약속한 만남이 있으니 셋은 그렇게 제 차를 타고 주점을 방문합니다. 여기서 또 이상한 점, 민호의 차를 보지 못했다는 겁니다. 제가 물으니 옆 도로가에 세워 뒀다더군요. 차 안에 짐이 한가득이라 부득이 제 차를 타야한다는 말과 함께요. 이상하죠. 그래도 셋은 별 무리 없이 주점을 방문해 여사장과 민희의 미래를 걱정했죠. 그렇게 한 시간 정도 대화 후 셋은 다시 제 아파트로 향했죠. 바로 이 지점에서 전대미문의 해프닝이 벌어집니다. 15 층 제 아파트 현관 앞에 경관 한 명과 웬 육십 대 남자가 서있는 겁니다. 그 혼란스런 찰나 민희는 그 육십 대의 손목 춤을 움켜잡고 엘리베이터 안으로 급히 태운 후 사라졌습니다. 남겨진 건, 민호와 저 그리고 혼탁한 눈빛의 경관 한명 뿐이었죠. "신고가 들어와서요. 이 집에서 남자 두명에게 감금 성폭행, 그리고 나쁜 곳으로 팔려갈 위기에 처했다는..." 이제야 제가 원했던 님의 표정이 나오는군요. 그렇습니다. 그렇게 저는 첫번째 신고를 당했던 겁니다. 물론 그 대상에 제 친구 역시 엮여 있었죠. "신고를 누가 했다는 거죠?" 당연하게도 저는 경관에게 물었습니다. 그 물음은 마치 우주의 시작은 정말 빅뱅 때문이었을까요라고 묻는 영특한 눈빛의 학생이 로져 팬로즈 박사 앞에서 조금의 흔들림 없는 태도를 보이는 차원과 비슷한 맥을 같이 하고 있었습니다. "아까 저와 함께 있던 그 남자 분이 신고했어요." 적어도 민희가 신고하지 않았다는 첫번째 사실 하나가 드러난 거죠. 자, 그렇다면 정리해 보죠. 그 육십 대 남자가 신고한 거라면 그 남자에게 이곳에 대한 정도를 준 것은 민희가 되겠죠. 지역, 아파트 동 호수, 왜, 무엇 때문에 남자에게 그런 어마어마한 신고 내용과 한밤의 해프닝을 가능케 한 것일까. 제 삼자의 입장으로 이 사건을 해석한다면 백이면 백, 뭔가 불순한 의도로 엮인 시나리오일 것이라 답하더라고요. 그렇죠. 그 의혹을 거두기란 쉽지 않습니다. 여기서 그 불순함이 그나마 가능할 수 있는 정보 하나를 드리죠. 민호라는 제 친구는 그 해프닝이 벌어질 즈음 저와 일종의 투자 건으로 엮여 있었습니다. 말이 투자지, 제 육천 만원이 민호에게로 흘러들어간 일이죠. 제 돈을 민호가 관리하고 있었죠. 느낌이 오시나요. 때문에 민호는 불순한 생각을 할 수 있고, 그 어처구니 없는 시나리오를 실연할 배우들이 필요했겠고, 그 주인공이 민희와 육십 대 남자였겠죠. 그렇습니다. 저 역시 그 시나리오를 염두해 믿기 힘드시겠지만, 한 반년 동안을 미제 사건에 매달린 형사처럼 지낸 기억이 있네요. 온갓 가능성 으로 엮을 수 있는 시나리오를 검토하고 추론했었죠. 역시 이 사건은 크게 두가지 가능성으로 설명되어질 수 있습니다. 첫째, 누구나 쉽게 의심해 볼 수 있는 불순한 의도로서의 시나리오가 그것입니다. 민호는 돈 육천 만원 때문에 친구인 저를 나락으로 밀어넣어야 했을 가능성, 물론입니다. 가능성이야 있죠. 아무리 그가 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불알 친구라 해도 세상 일이란 모르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나락이라.. 보시다시피 저는 나락이라할만한 지경에 빠지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그 당시에는 무척 옹졸해지고 무기력에 빠졌던 건 사실입니다만, 말그대로 나락은 아니죠. 어쨌든 저와 민호는 신고를 당한 입장이었기에 일련의 경찰 조사를 받아야 했었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경찰서에 소환되거나 하진 않았습니다. 경찰과의 통화로만 진행됐습니다. 일단 신고자들이 사라진 상태였고, 그 후로도 신고자들은 경찰 연락을 의도적으로 피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니 경찰로서도 저나 친구를 함부로 소환하진 못했겠죠. 이를테면 아파트 내부, 혹은 주변 CCTV나 주점에 녹화된 CCTV 역시 저희에게 아무런 혐의점이 없다는 정황으로 받아들이기에 충분했죠. 그래요. 아무 일도 없었으니 당연하죠. 경찰로선 더 이상 진전된 사건을 구성할 수 없었겠죠. 아쉽게도 말입니다. 이런 촌구석 경찰 입장에선 구미가 당기는 사건일 수 있었으니까요. 아이러니하게도 이 사건은 신고자들의 부재로 인해 끊임없이 무화되고 마는 신기루 같은 무엇이었죠. 그래요, 친구에겐 어느 정도 사건을 일으킬 동기가 있다고 보여집니다. 하지만 나름 똑똑한 놈이라 자부하던 녀석의 의도적 시나리오라고 보기엔 허술하죠. 무척이나요. 그렇다면 남은 한가지 가능성, 사건은 민호하곤 무관하게 전적으로 민희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해 발생한 우발적인 해프닝이라는 건데.. 그렇죠. 이상하죠. 일단 첫번째, 네 맞습니다. 역시 선생님은 예민한 감각을 가지셨군요. 말씀하신 대로 민희는 서울에서 출발해 제 집까지 오지 않았죠. 서울에서 출발한 고속버스가 상주를 거쳐 문경으로 오진 못하죠. 버스터미널에 확인한 결과입니다. 이 지점은 너무 명확한 거짓이라, 삼 년이 지난 최근 민희에게서 직접 실토를 받은 대목이죠. 웃긴 게 뭔 줄 아십니까, 당시에도 예상했지만 민희는 민호와 함께 대구 민호 집에 있었다더군요. 웃기는 커플입니다. 이곳 문경 터미널까지 민호 차를 함께 타고 왔다더군요. 기가 찹니다. 놈은 민희를 터미널에 내려주고 부푼 가슴을 주체하지 못해 풋풋한 표정으로 민희와의 재회를 연출하고 있었던 저의 경솔함을 비웃고 있었겠죠. 익명의 건물 사각 구석에서 말이죠. 뭐 지금은 아무렇지 않아요. 세상은 모든 일들이 연출될 수 있는 미완의 지대이니까요. 어쨌든 그 둘은 치졸한 거짓을 통해서 저의 집으로 틈입합니다.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일련의 사정이 있었겠죠. 이를테면 둘의 동거가 지겨워 졌다거나, 제 삼자로선 예상하기 어려운 사건이 있었거나, 아니면 생각보다 깊은 철학적 이유였겠죠. 웃음이 나긴 하지만 말이죠. 두번째 수상한 점이 등장 하네요. 두째 날 아침 일찍 둘이 나눴던 카톡 내용의 요상함이 그것입니다. 섹스 유무를 물었다.. 수상하죠. 왜 민호는 그 점이 궁금했을까요, 그 이른 시각에 말입니다. 자, 것도 우연이었겠군요. 자신의 여자를 친구한테 보내 논 질투의 화신이 행할 수 있는 최소한의 확인 의무와 같은.. 글쎄요, 그 이른 시각에 말입니다. 허허, 그걸 수도 있겠죠. 사람의 아이덴티티란 넓고도 험할 수 있을 테니 말이죠. 여기서 세번째 이상한 점이 등장합니다. 민호의 제 집 방문은 왜 그리 늦어 졌을까요. 녀석은 밤 열 한 시가 다 되어서야 제 집 앞에 도착했습니다. 그리 늦어질 이유가 없는 데 말입니다. 핵심은 이제 등장합니다. 녀석이 도착하기 삼십 분 전 민희의 특이한 행동 말입니다. 외출복을 갈아 입고 핸드백까지 든 채 말입니다. 어머니에게 전화를 하려고 밖엘 나간다.. 부자연스럽군요. 물론 불가능한 행동은 아닐 수 있겠죠. 인간의 행위는 꼭 정합론에 부합해야 하는 무엇이 아닐 수 있으니 말이죠. 좋습니다. 여기까지 둘의 모든 행동이 다 우연이라고 합시다. 그렇다면 그 육십 대 남자의 정체는 뭐죠? 그는 왜 대구에서, 참 중요한 사실을 탈락 시켰군요. 그 육십 대 남자가 민희와 경찰을 따돌리고 그 야밤에 향한 곳이 대구라더군요. 당시 경찰 역시 난감했겠죠. 신고한 남자와 당사자인 여자가 도망치듯 현장을 빠져 나갔으니 말입니다. 아차싶은 경찰이 남자에게 전화해 물었다군요. "지금 어디로 가시는 중입니까?" "대구 집으로요.." 그 남자가 한 말이라고 합니다. 대구라.. 묘한 미증유의 지대로군요. 대구, 왜 그 시절, 이 소설의 인물들은 대구에서 왔다가 대구로 사라졌을까요. 순식간에 대구는 미스테리의 고향 쯤으로 윤색됐겠군요. 아무튼 남자는 그의 난삽한 동선 뿐 아니라 저에게 보여진 행동 역시 부자연스러웠습니다. 어쨌든 그런 어마어마한 신고를 하고 경찰까지 대동한 채 제 집 앞에 나타난 남자의 표정치곤 너무나 느긋하고, 이런 표현이 어울리는지 모르겠지만, 귀족적이기까지 한 풍모가 긍정의 안도감을 선사하더군요. 그렇습니다. 당시 그 남자의 표정이라던가 몸짓이 이러한 상황에 어울리는 그런 것이었다면 오히려 사건은 통속의 드라마로 해석되어지기 쉬웠겠죠. 하지만 아니었습니다. 그는, 맞습니다. 그는 마치 모아이 석상과 같이 고요하고 고독했습니다. 자신에게 다가선 얇디얇은 운명의 본질을 순순히 받아들여야겠다는 노회한 철학자의 표정, 그 자체였죠. 저는 순간 멀쑥한 경관 옆에 서있던 남자에게 이렇게 물었던 기억이 납니다. "누구시죠?" "님이 신경 쓸 사항이 아닌 것 같네요." 믿어지십니까, 저 우아한 표현 말입니다. 그 문장은 마치 성경 한 페이지에서 이탈한 듯 거대한 권위와 역사성을 자랑하더군요. 저와 민호는 그 문장의 절대적 에너지장에서 좀처럼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그래, 이 모든 사실은 무조건 받아들여야 하는 신탁이야. 우리는 그 현장에 서있는 네 명의 운둔자들이었고 말입니다. 드디어 웃으시는군요. 이해합니다. 웃지 않을 방법이 있겠습니까. 그 남자는 존재 가치가 없는 무뢰한 두 짐승들에게서 자신의 마틸다를 구원하려 나타난 한마리 숫양이었죠. 그렇게 마틸다와 거대한 아우라의 숫양은 인간의 치졸한 범위 내에서 이탈해 나간 것이겠네요. 여기까지가 대충 민희에게 신고를 당한 첫번째 사건의 전모입니다. 저 역시 동의합니다. 그 삼십 분 전 민희의 부자연스런 외출이 걸립니다. 그녀는 말한대로 엄마와의 통화를 위해 나간 것일까, 우리가 짐작하는 대로 이미 도착한 민호, 혹은 민호와 남자를 함께 만났던 것일까 하는 문제 말입니다. 사실 이 대목만 명확히 확인된다고 하면 문제는 쉽게 풀릴 수도 있겠죠. 어려운 부분입니다. 그렇습니다. 아직 저의 귀에는 명료하게 산란하는 목소리들의 부딪힘이 들려 옵니다. '바로 그 일이 네게 벌어진 거야. 그들의 계획이야.' 그럼에도 그 치명적인 허술함은 변하지 않네요.
자 이제 그 어처구니 없던 일이 벌어진 3년 후 거짓말처럼 솟아오른 두번째 신고에 대해 말 할 차례로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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