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여행5 - 웨슈공원을 보고는 광주역에서 계림 가는 기차표를 분실하다!
광저우(광주) 시내의 루롱스(육용사) 절을 보고는 흐름한 골목길을 걸어서 큰 도로
로 나와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아 길 건너편 손문 기념관 으로 향하는 데....
큰 도로가 자동차 전용도로인양 길을 건너갈 수가 없어 그냥 멀리서 사진만 찍는다.
그러고는 반대편으로 길을 잡아 웨슈(월수) 공원 으로 향하는 데....
연방 행인에게 “웨슈 꽁위엔 짜이날 (나비엔)?”을 외친다. 여기 고가도로며 육교
에는 꽃이 무성한데 자세히보니 꽃화분 수천여개를 촘촘히 메달아 놓았네!!!
웨슈 공원 越秀公园 ( 越秀公園 월수공원) 은 93헥타르의 엄청난 부지에 웨슈산과
연못과 아열대식물의 숲으로 조성되어 있다.
또 경내에 광주박물관, 우양석상과 중산기념비 및 미술관이 들어서 있으며 바깥에는
중산 기념당과 진해루 및 서한 남월왕묘 도 있다.
공원입구 언덕길을 올라가서는 물으니 바로 왼쪽 언덕에 그 유명한 우양 센팅
( 우양석상 ) 이 자리하고 있다!
이 우양센팅 五羊石像 은 참으로 특이하게 생겼는 데!!! 다섯 신선 이 벼이삭을 문
다섯 마리 양 을 거느리고 이곳 광주에서 농사를 퍼뜨렸다나....
그런데 선배님은 아무리 쳐다 보아도.... 양이 아니라 염소 처럼 생겼다고 고개를
갸우뚱 하신다.
이어 연못등 공원을 둘러보고는 밖으로 나와서는 그리 멀지 않으니 걸어서 행인
에게 물어가며 걸어서.......
서한 남월왕묘 박물관 西汉南越王博物馆 (시한난웨왕보우관) 을 찾아 간다.
월수공원 안에 있는 서한시대 남월왕릉에서 발굴된 유물을 전시하기 위해 1,983년
에 세웠다는 데.....
건물은 온통 붉은색 벽돌과 돌로 지은 탓에 장중한 맛을 느끼게 하는데, 청동기와
옥기 및 인장같은 유물외에 남월 2대 왕 조매 趙眛 의 미이라가 특이한 느낌을 준다.
西漢 南越王(서한, 前漢 남월왕) 은 기원전 200년경에 중국의 광동과 광서 지역에
있던 왕국인 데, 당시 고조선 처럼 한무제의 침략 을 받은후 한나라 영토가 되었다.
유방이 초나라 항우를 물리치고 한나라를 세웠으니 오늘날 漢人, 漢子, 漢文 등
중국의 정체성이 형성되는 데.....
한고조 는 중국을 통일한 여세를 몰아 40만 대군으로 북쪽 흉노를 쳤으나... 오히려
백등산에서 포위되어 선우의 부인에게 뇌물을 주고 풀려난후....
해마다 여자와 금, 은과 비단을 조공으로 흉노 에게 바치는등 수모를 당했다.
7대왕 한무제 武帝 는 BC 129년부터 북으로 흉노를 쳐서 멸하고 선우의 부하 혼야왕
과 휴도왕의 항복을 받는데 그 왕자에게 김씨성 을 하사하니 투후 金日磾(김일제)이다.
훗날 그 후손이 왕망의 이종사촌으로 신(新) 나라가 망하고 후한(동한) 성립기에
바다 건너 동쪽으로 도망치니 신라왕 경주 김씨 시조 김알지라고 한다.
이 무렵 서쪽으로 서역을 개척하고 남쪽으로 남월 南越(난웨) 을 치는 데, 원래 소주
에 오나라, 항주에 월나라가 있었으니 월남은 그 월나라의 남쪽나라를 일컫는 말이다!
복건성의 민월과 동월을 친후 BC 111년 이곳 광동성 광주의 남월 을 정복하고는 9군
을 설치했으며 BC 108년에는 동으로 고조선 을 정복하고 한4군을 설치했던 것이다!
한나라의 제후국이나 광주에서는 오래토록 “한(漢, 汉)”이 아닌“월(粤)”이라는
글자가 이어져 오고 있는데, 越(월) 와 粤(월) 는 발음도 동일하고 같은 의미이다.
광동어를 粤语 (월어) 라 하고, 광동요리를 粤菜 (월채) 라고 하며, 광동성의 자동차
번호판도 粤(월) 이니 “월(粤)” 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 월나라의 남쪽(하노이) 이 "월남" 이니.... 바로 오늘날의 베트남 이다!
남월왕의 무덤에서는 옥기와 토기, 청동기등 1000여점의 부장품이 출토돼 중국 고고
학계에 큰 충격을 주었는데, 가장 유명한 것은 사루옥의라고 하는 옥으로 만든 옷이다.
1191개의 옥 조각을 실크로 연결했는데 광둥의 독자적인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증거
라고 할 수 있으며 문왕의 인장과 술잔, 옥으로 만든 화려한 문양의 베개 등이 나왔다.
주실에는 왕이, 전실에는 군사 2명이 동이실은 4명의 부인이 누워 있었고, 서이실은
요리사, 약사 등이 누워 있는등 순장 풍습이 있었으며 후실에는 다양한 보물들이 있다.
무덤을 나오면서 생각하니 또 이곳 광주 는 아편전쟁후에 태평천국 을 세운 홍수전
의 고향 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그 유적이 어디 있는지는 모르겠네?
그러고는 선배님 부부등 우리일행 4명은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 민박집으로 돌아와서
는 베낭을 메고 다시 택시를 타고 광주역에 내린다.
( 우린 민박집에 열흘전에 돈을 송금했기로 중국인 처녀애가 표를 닷새전에 구입했는
데, 루안워 침대표에 370 위안 정도 주었다! )
우리는 광주역 에 도착하자마자 그만 놀라서 주저앉을뻔 하였으니.... 그 넓은 광장
에 수만명의 인파 가 몰려 웅성거리는 데, 한발짝 앞으로 나가기가 어렵다.
아직 춘지에 (春節, 춘제, 춘절, 설날) 가 18일이나 남았는 데... 짐보따리를 몇
개씩 이고지고 기를쓰고 앞으로 나아가려는 사람들...
그보다 훨씬 많은 거대한 인파가 광장 곳곳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모습이라니!!!!
( 표를 파는 날짜의 정해진 시간까지 며칠이고 기다리는 것이네! )
*** 위 2장의 광주역 사진은 춘제때가 아닌 평상시 모습입니다 ***
도대체 어디가 표를 사는 줄 (隹口票厅) 이고 어디가 기차를 타는 (候车厅) 줄이람?
중국에서는 기차표를 사는 건물과 기차를 타는 대기실 건물이 별도로 되어 있으니.....
반대쪽으로 힘겹게 움직이다가 보니 긴 줄이 몇 개 보이기에 우선 뒤에 붙고 본다.
이윽고 저 앞쪽 건물 전면에 후차청(候车厅) 글자를 확인하고는....
1차로 표검사 (중국에서는 기차표가 있어야 대기실 건물에 입장할수 있다) 를 한다.
그리고도 한참을 더 힘겹게 전진하여 건물앞에서 2차 표검사를하고 안으로 들어서니
바로 수화물 X레이 검색대 가 나타나는데 배낭을 넣어야한다.
역무원이 허리에 찬 전대 가방까지 풀어 넣어라 고함치는데, 이 때 뒤쪽에 섰던 사람
들이 앞으로 거세게 밀어 붙이면서 자기 짐들을 앞 사람 머리위로 던져 먼저 넣으니...
자칫 잘못하면 여기서 엎어져서 뒷사람에 깔릴 판이다. 기차표를 모두들 가지고
있는 데 왜 결사적으로 이러는 걸까?
혹시 좌석이 없어 입석표를 가졌다고 해도, 그건 대기실에서 기차에 탈 때 먼저
뛰어야 할 일이지 여기서부터 이런 난리를 피울 필요는 없는 일인데?
간신히 몸의 균형을 잡아 배낭을 찾아서는 전광판의 표시 ( 계림 가는 기차는 종점이
유주 인 K36차 열차인데 제2 대기실이다) 를 보고는 힘겹게 우리 대기실을 찾아간다.
그런데 뒤돌아보니 선배님 부부가 따라 오지를 않네!!!! 이런? 불길한 생각이 머리
를 스친다. 여기 복잡하기 그지없는 곳에서 사람을 잃어버렸으니....
울마눌에게 짐을 맡기면서 꼼짝말고 여기 있으라 이르고는 되짚어 나가니, 사모님
이 넋을 잃고 서 계시고 선배님은 낙담한 표정이다!
사모님이 손에 쥔 기차표를 분실 했다는 것이다!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비는데.....
수화물 X레이 검사대 를 통과하면서 등에멘 배낭을 벗으랴.....
허리에 찬 전대를 풀랴, 뒤에서 는 거세게 밀어 이기에 넘어지지 않으려고 허둥대다
가 손에 쥔 기차표를 흘린 것인데 대기실에 이르러 그 사실을 안 것이다!
*** 이건 다른데서 가져온 사진인데 당시는 이 사진보다 훨씬 복잡했습니다 ***
셋이서 검사대로 되돌아 가서는 아무리 찾아보아도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다. 역무원
에게 사정을 애기하니 같이 찾는데도 보이지를 않고....
그래서 임시 기차표나 입석권, 혹은 입장권이라도 구해보려고 역무원에게 메달리니
경찰 도 출동 하고.....
마침내 경찰이 입장하는 문을 걸어 잠그고는 정밀 수색 을 하는데도 기차표는 오리
무중 나올 줄을 모른다.
밖에서는 그 바쁜 와중에 영문도 모른채 줄이 지체되기에... 오래 끌면 저 사람들
중에서 시간지체로 기차를 못 타는 피해자 가 나올수도 있어 그만 포기하고 돌아선다.
선배님은 표를 다시 구하거나 민박집에 연락해보자고 하시는 데,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우선 표를 다시 사자면 이 후차청 건물을 나가서.....
어디가 입구인지도 모를(!) 매표청 판매소 줄을 찾아야 하는데 이 엄청난 인파속
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오직 한가지 방법만이 있을 뿐이니..... 대기실 문을 통과 하여 선로 로 나가 기차
까지 가는 것이다!
가장 곤란한 것은 어떻게 대기실 문 ( 기차표 3차 검사로 표를 확인하고는 가위로
펀칭 한다 ) 을 어떻게 무사히 통과 하느냐 하는 것인데....
이 혼란한 틈을 최대한 이용하는 것이니.... 내가 표 3장을 한손에 모아 쥐고는
마치 4장인 것 처럼 흔들면서 앞사람을 거세게 밀치며 역무원을 뚫고 나가면.....
3사람은 간격을 주지말고 무조건 뒤를 받쳐서 들고 뛰어야 하는 것이다. 독한 마음
을 먹고 대기실 문에 이르니 승객이 단 한명도 없네!!!!
시간이 다되어 탈 사람은 모두 개찰이 끝나버린 것이다! 눈을 모아 앞을 보니 역무원
이 마침 출입문을 닫는 중이다!
“잠깐!” 응겁결에 한국말로 소리 지르며 앞을 향해 달린다. 역무원이 흠칫 놀라는
사이에 우리 4명은 화살처럼 일직선으로 문을 빠져나가서는 플랫폼의 기차앞에 이른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보니 여차장이 객차 문앞에 서서는 일일이 표를 검사하는 것이
아닌가? 순간의 망설임? 그러나 여기서는 얼렁뚱땅으로는 안되고....
이실직고 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린 외국인 인데, 기차표를 분실한 과정을 설명
하고는 9호 객차 20번(상단) 침대 가 우리 것이라고 사정을 해본다.
여차장이 그럼 표도 없이 여기까지 어떻게 들어 왔니? 하며 황당한 표정 을 짓는다!
난처해 하며 망설이더니 기차 출발시간이 되었기로 우선 타고 보잔다!
그럼 그렇지 여기서 쫒아보낼수는 없을테지? 그리고 370위안이면 중국물가로는 30
여 만원이 넘는 거액이니 부수입에 욕심 이 난걸까?
루안워 软卧 는 1실에 상단과 하단으로 4명이 타는 침대기차이다, 기차표를 가져
가고는 번호표 를 주는데 도착 2~30분 전에 돌려주니 내릴 역을 지나칠 걱정은 없다.
기차는 출발하고 한 자리는 아무 말이 없네? 설마 공짜로 봐줄리는 없겠고 다른
사람이 도중 역에서 타지 않는 것을 확인한 후에 내릴역 즈음해서....
가까운 역의 입석표를 발급해 주고는 대부분인 차액 을 취하려는 걸까? 이윽고 기차
의 총책임자인 듯한 남자 차장이 오더니 기차표를 끊으란다.
그러면서 휴대용 발매기 로 전산 처리되는 정식 기차표 를 새로 발급해주네! 부끄러운
생각이 든다. 그럼 얘들이 부수입을 생각하고 우릴 태운 것이 아니라.....
사정이 딱해보여 도와주었단 말인가? 중국인은 대개 부패했을 거라는 선입견 이 무느
지는 순간이다! 이제는 계림까지 한숨 잠을 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