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월의 풀밭/유종인
풀들이 더 이상 자라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초록은 이제부터 나머지가 된다는 생각이다
나머지들,
나무는 단풍과 열매에 대해서
나는 나의 고답과 불경기와 연애에 대해서
나머지공부를 한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시드는 것과 사라지는 것,
그런 변심과 변색 밑에
늦가을 초조히 땅속에 흰 수염을 쓸어내리는 나무뿌리들,
孔子가 나의 뿌리인가 하느님은 나의 연적인가
老子는 뜬구름이고 孟子는 모든 어머니를 키우는가
아니 구겨지는 이 지폐 속의 인물은 내 경제의 조상인가
그러나 풀밭은 아직도 초록을 다 쫓지는 않아서
나는 번민을 비켜가듯 풀들을 피해 걷는다
이것이 조바심인가 윤리인가 이타적인 자기애인가
그러니 우리는 없는 가운데 무언가를 밟고 돌아온다
돈은 못 밟고 교회 전단지와 모텔 후문의 왕벚나무 그림자와
소액대출 일수명함을 밟고 돌아와 잠자다 홀로 깬다
새벽에 문득 눈 뜨고, 한낮의 풀밭을 떠올린다
생생한 풀을 피해 가다 밟은 쇠한 풀들이
새벽공기에 서서히 허리 펴는 소리를 마저 듣는다
구들더께처럼 누운 잠이
지구를 등짝으로 밟고 누운 무수한 밤을 떠올린다
계간 『詩로 여는 세상』 2012년 봄호 발표
유종인 시인
1968년 인천에서 출생. 시립인천전문대학 문헌정보학과 졸업. 1996년 《문예중앙》에 시 〈화문석〉 외 9편이 당선되어 등단. 2002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시조 부문과 200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 부문에 당선. 시집으로 『아껴 먹는 슬픔』과 『교우록』 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