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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게시글
백제 토론방 10대 숭신~14대 중애 기년 조정후 재위기간
knjpark 추천 0 조회 91 26.02.15 18:11 댓글 9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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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26.02.15 19:02

    첫댓글 요약
    고사기 ​숭신 몰 (318년) 기록을 근거로 재위를 설정하면 4세기 초반 야마토 정권의 기틀이 잡힌 시기(301년~371년)와 일치합니다.

    신공기(320년~389년)~응신기(390년~408년)에 집중된 이주갑(120년) 수정을 통해 백제 및 고구려와의 외교 기록 (광개토대왕비 등)과 연대를 맞출 수 있습니다.

    20대 안강부터(454년~)는 일본서기의 기록 연대와 실제 역사적 사실이 거의 일치하기 시작하므로 추가적인 조정 없이 해석이 가능합니다.

  • 26.02.15 21:36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제 증명하셔야지요. 몇 개만 예를 들면;
    301, | 즉위 전 | 1월 | 숭진천황 즉위
    => 이 해에 숭신천황이 즉위했음을 한중사료를 가지고 증명하면 됩니다. 문헌사료가 없으면 연도를 특정할 수 있는 고고학사료라도 좋습니다.
    317, | 재위 65년 | 7월 | 임나(가야)에서 사신이 내항함
    => 이 해에 임나가야 사신이 왔음을 한중사료로 증명하면 됩니다.
    응신 7년: 가을 9월 (395) "고구려인, 백제인, 임나인, 신라인이 같이 내조하였다."
    => 이 대규모 망명사건이 395년 가을 9월인 것을 증명하면 됩니다. 만일 '임나인'을 '가야인'으로 고치면 어떤 문제가 발생합니까?
    응신 8년: 봄 3월 (396) "백제인이 내조하였다."
    => 백제인 내조의 연도와 달이 396년 봄 3월이라는 것을 증명하면 됩니다.
    ...
    이런 방식으로 일본서기 대부분의 주요 기록에 대하여 기록의 연도가 정확함을 증명하면 됩니다.
    그런데 응신 25년은 연도를 안 쓰고 "(25년): (연도 기록)" 이라 했는데 연도가 몇 년입니까?

  • 작성자 26.02.15 21:40

    반갑습니다. 과거와 이래님
    현재까지의 학술적 성과로는 일본서기에 기록된 4세기 이전의 세부 연월일을 한중 사료를 통해 일대일로 증명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이는 일본서기의 편찬자들이 초기 천황가의 역사를 장식하기 위해 재위 연수를 늘리거나 중국의 간지 기년법에 맞춰 소급 적용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통설입니다.
    ​따라서 숭신 1년(301년) 등의 기록은 당대 실시간 기록이라기보다 후대에 재구성된 체계로 이해하는 것이 학계의 보편적인 견해입니다.
    다만 응신 25년 기록에 따르면 백제의 전지왕이 죽고 그의 아들 구이신이 왕위에 올랐다는 내용으르 보아 서기 420년 기록을 응신 25 년조에 삽입한 것으로 보입니다.

  • 26.02.15 23:02

    일본서기 연도 쓰는 것은 누구나 합니다. 증명하지 못하면 전혀 의미가 없습니다. 4세기 전기고분시대와 5세기 후기(또는 중기)고분시대를 연결시켜놓으셨는데 두 고분시대가 어떻게 다른지 나중에 정리해드리겠습니다.

  • 작성자 26.02.15 23:12

    @과거와 미래 반갑습니다. 과거와 미래님
    숭신 천황의 즉위(301년)와 소나갈지기의 도래(317년)를 기점으로 설정하면, 일본서기에 기록된 소나갈지기의 귀국 방해 사건은 4세기 초 한반도 남부의 세력 판도와 매우 정교하게 맞물립니다.
    ​소나갈지기가 가져온 붉은 비단과 신라의 탈취
    ​기록에 따르면 소나갈지기는 수인 천황으로부터 붉은 비단을 선물 받아 임나로 돌아가려 했습니다. 그러나 신라인들이 길을 막고 이를 빼앗았으며, 이 사건이 임나와 신라 사이의 원한의 시작이 되었다고 전합니다.
    이는 임나와 신라의 ​4세기 초 정세 연결 (317년~320년경)이 자연스럽게 연결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시기는 신라가 주변 소국들을 병합하며 세력을 키우던 때이니까요.

  • 26.02.15 23:25

    @knjpark
    기년에 신무천황조가 없는데 1세이므로 매우 주요합니다. 신무천황조도 실제 연도와 달을 적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작성자 26.02.15 21:48

    응신 7년(395년) 대규모 도래 사건의 증명
    ​응신 7년 고구려, 백제, 임나, 신라 4국인이 함께 왔다는 기록은 당시 한반도의 격변기와 일치합니다.
    ​광개토대왕비 기록과 대조해 보면 영락 5년(395년) 비문에는 고구려가 비려(거란의 일종)를 정벌하고 돌아오는 길에 백제 전선을 압박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394년부터 395년 사이에는 고구려와 백제 사이의 치열한 교전(수곡성 전투 등)이 있었습니다.
    ​이 시기 한반도 중부와 남부의 전란으로 인해 발생한 유민들이 집단적으로 이동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특히 396년은 고구려가 백제 아신왕을 굴복시키고 58성을 취한 해이므로, 그 직전 해인 395년의 긴박한 정세는 기록의 신빙성을 뒷받침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 작성자 26.02.15 21:55

    응신 8년(396년) 백제인 내조의 증명
    ​응신 8년 기록은 백제 아신왕 시대의 상황과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아신왕 5년(396년)조를 보면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공격으로 백제가 대패하고 왕제와 대신들이 인질로 잡혀가는 등 국가적 위기를 겪습니다.
    ​일본서기의 이주 기록이 396년 봄인 것은, 전년도(395년) 말부터 시작된 고구려의 대대적인 남진 정책으로 인해 백제의 지배층이나 기술자 집단이 급박하게 이동했음을 시사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 26.02.15 23:06

    가장 쉬운 것 2개를 물어보았는데 연도가 1년씩 틀렸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달이라도 증명해야 하는데 달을 증명하시지 못하네요. 두 기록은 연도와 달이 모두 정확한데 그것을 어떻게 증명하는지를 다음에 보여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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