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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운 인간들의 공동체
- <동네 이웃과 모임으로 만나기>(이가영, 구슬꿰는실, 2020)를 읽고
마을, 유년의 기억
나는 경상남도 밀양시 초동면 검암리 883번지에서 태어났다.
농촌의 조그만 마을이다. 30여 가구가 전부이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사람들이 이 마을에 정착하기 시작했고
돈도 땅도 없는 사람들은 땅 주인에게 얼마간의 임대료를 내고 집을 짓고 살기 시작했다.
그래서 마을의 집들은 주소가 모두 같다.
마을 앞에는 개천이 있고 둑 방이 있다. 둑 방 너머에는 들판이 펼쳐져 있다.
밭에는 감자며 옥수수며 고구마나 수박 따위가 자라고 있었다.
이들은 아이들의 주요 공격 대상이 되었다. 그중 단연 으뜸은 수박이었다.
여름이면 농업용 수로를 따라 밭에 접근하여 오두막을 경계하며 수로 근처의 수박을 재빠르게 따서는 물길로 던지면
아래쪽에서 기다리던 아이들이 이를 낚아챘다.
그렇게 여름이 지나면 아이들은 까맣게 변해 있었다.
마을 뒤로는 야트막한 작은 뒷산이 있어 아이들은 온 산을 누비며 다녔다.
나무를 타고 그네를 매달고 메뚜기도 잡고 매미도 잡았다.
나뭇가지를 모아 우리만의 아지트를 만들어 전쟁놀이도 했다.
산딸기도 따먹고 칡도 캤다. 산 중턱 단감 밭에서 단감을 서리하기도 했다.
때로 솔방울이나 솔가지를 모아 집에 가져가야만 하기도 했으나 뒷산은 놀이터에 가까웠다.
따뜻한 남쪽이라 눈이 잘 내리지 않았지만 어쩌다 눈이 내리면
아이들은 잡지도 못하는 잡아본 적도 없는 토끼몰이를 하기 위해 팔을 걷고 나섰다.
마을 앞 개천에서 엄마들은 방망이로 빨래를 두드리며 정담을 나누었고, 아이들은 미역을 감았다.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마을 앞 정자에 앉아 아이들이 미역감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여름에는 둑 방에서 소를 먹이며 쇠똥구리를 잡았고 개천에서는 개구리와 물고기를 잡았다.
겨울이면 썰매를 탔다. 아빠들은 썰매를 만들어 주기도 했다. 얼음을 지치다가 발이 빠져 동상에 걸리기도 했다.
둑 방 넘어 논들 가운데로 난 길을 따라 20여분 정도를 걸어가면 국민학교(초등학교)가 있었다.
마을 아이들은 모두 이 학교에 다녔다.
학교를 오가는 길, 아이들은 온통 주위에 시선을 빼앗겼다.
네 잎 클로버를 따기도 하고 샐비어 꽃 잎의 꿀을 따먹기도 했다.
민들레 홀씨를 불어가며 학교를 오갔다. 가을이면 잠자리도 잡고 메뚜기도 잡았다.
개구리를 잡아 학교에 와서는 여자 아이들을 놀리는 일은 흔한 일이었다.
학교는 6개의 반이 있었다. 1학년 1반, 2학년 1반, 3학년 1반... 6학년 1반.
입학하여 만나게 된 반 친구들은 6년 동안 같은 반이 되어야 했기에
우리는 반 친구들의 신상에 대해 비교적 자세히 알고 있었다.
가을이 되어 들판이 온통 황금빛으로 물들기 시작하면 아비들의 발걸음은 빨라졌다.
덩달아 아이들의 발걸음도 바빠졌다. 기계가 많지 않던 이 시절에는 아이들도 가을걷이를 도와야 했다.
우리 집뿐만이 아니라 옆집 가을걷이도 해야만 했다. 논두렁에 앉아서 먹던 새참 국수는 일품이었다.
마을 입구에는 넓은 공터가 있었다. 마을에서는 ‘배꾸마당’이라 불렀다.
아마다 바깥마당을 사투리로 이렇게 불렀던 것 같다. ‘배꾸마당’은 놀이터 였다.
우리 마을에는 많아야 20명 정도의 아이들이 전부였지만 ‘배꾸마당’은 시끌시끌했다.
형들이 마당에서 놀이를 하고 있으면 우리는 마을 골목을 누비며 놀았다.
혹은 마당을 진지 삼아 온 마을 골목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놀이를 했다.
딱지 따먹기, 구슬치기, 자치기, 비석 치기, 칼싸움 놀이, 오징어 장군 따위의 놀이였다.
그 시절에는 이 마당과 골목이 가장 넓고 재미난 공간이었다.
저녁이 되면 엄마들은 아이들을 찾아 마당으로 나왔고,
가까운 집들에서는 “누구야~~ 누구야~~” 하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못내 아쉬운 듯 이별을 해야만 했다.
마을에는 돼지 잡는 날이 일 년에 두어 번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마을 우물 앞에서 남자들이 모여 돼지를 잡았다.
마을 남자들은 가마솥에 물을 끓이고 돼지고기를 가구 단위로 나누었다.
집집마다 나와 자기 몫의 돼지고기를 가져갔다.
어르신만 계시는 곳에는 남자아이들이 배달하기도 했다.
얼마 정도는 바로 고기를 삶아서 어르신들 모여계시는 정자에 가져다 드렸다.
엄마들은 상을 차렸다. 남자들은 막걸리 한 사발 들이키며 나눠먹었다.
학교를 마치고 오가는 아이들은 방앗간처럼 이곳을 드나들었다.
마을 윷놀이의 기억도 노래자랑의 기억도 있다.
그때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나와 함께 음식을 준비하고 나눠 먹었다.
당시에는 면 단위에서 마을 대항 체육대회를 인근 중학교에 모여했다.
이 체육대회의 꽃은 줄다리기와 400m 계주였는데, 엄마가 계주의 마지막 선수였다.
3등으로 달리던 옆집 아주머니의 바통을 이어받아 달리기 시작했다.
한 주자를 앞지르고 결승점 앞에서 나머지 한 주자마저 앞질러 1등을 했다.
덩달아 나의 어깨도 으쓱했던 기억이 있다.
이런 날에는 마을 회관에서 잔치가 열렸다.
마을이 항상 평화롭고 즐겁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때론 마을 주민들 간 다툼도 있었고 태풍이 와서 농작물이 못쓰게 되기도 하며
개천이 범람하여 수해를 입는 등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짜장면이나 치킨을 먹는다거나 하는 것은 꿈꾸기 힘들었다.
좋기도 하고 안 좋기도 했지만 유년 시절의 마을의 모습은 지금도 나에게 어떤 전형처럼 존재하고 있는 듯하다.
나는 옆집에 누가 살고 있는지 윗집에 쿵쾅거리는 녀석들이 어떤 녀석들인지 알고 지내길 바란다.
어른들이 아이들을 살펴주고 아이들이 어른들을 따르면 좋겠다.
내 아이의 친구가 행복한 마을이면 좋겠습니다.
아이들이 서로 친하게 지내고 즐겁게 놀 수 있는 곳과 놀꺼리가 많으면 좋겠다.
아이들이 어디에서든 신나게 친구들과 놀 수 있기를 바란다.
집에서 기른 푸성귀 옆집에 한 움큼 담아 주고 김장김치 담아 나눠 먹는 마을이길 바란다.
많이 가진 사람은 많은 대로 적게 가진 사람은 적은 데로 서로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다.
제 가진 것으로 돕고 즐거우면 좋겠다.
주는 사람 따로 있고 받는 사람 따로 있지 않고
가르치는 자가 따로 있고 배우는 자가 따로 있지 않은 동네가 되면 더 좋겠다.
그대, 지역사회를 믿는가?
나는 21년 6개월 동안 사회복지 현장에 있었다.
그 중 1년 8개월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을 모두 지역복지관에서 일했다.
오랜 시간이 흘렀다. 처음 마주한 현장은 영구임대아파트였고 지금은 시골에서 지역을 만나고 있다.
그동안 지역복지관 현장 역시 많은 변화를 겪었고 나 역시 변했다.
고백하자면,
나이 들수록 시간이 지날수록 더 모르겠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확신하기 어려워졌다.젊은 시절에는 분명했다.
확고했고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목표를 향해 달렸다. 열정적으로 매진했고 성과를 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워커 홀릭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스스로 만족했고 또 다음 목표를 향해 돌격했다.
일이 곧 일상이었고 일상이 곧 일이었다. 일상 속에서의 실천, 일상으로서의 사회사업에
스스로 많은 의미를 부여했고 동기화시켰다.
그러면서 조직과 나를 일치시키려 했던 것 같다.
나의 성과가 곧 조직의 성과이며 나의 가치가 곧 조직의 가치라 생각했던 것 같다.
관료제 조직에서 개인 가치와 조직 가치의 일치라니… 허망한 이상이었다.
그러니 한계에 마주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시간이 흐르고 연차가 쌓이며 내가 맡은 하나의 프로그램은 성과를 냈는데 지역사회는 변화했는가?
조금이라도 약자가 살기 좋은 지역사회로 나아가는가? 에 대한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프로그램이 끝나면 밀려오는 약간의 허무함을 느껴야만 했으며
진정 내가 원한 성과가 무엇인지 확인이 필요한 시간이 점점 많아졌다.
다음 해 같은 프로그램을 위해 지역사회로 나아가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순간을 만나기도 했다.
분명 사회복지사들은 열심히 지역을 다니는데 지역사회는
상호 부조하며 약자를 돌보는 지역사회로 변화하지 않는 것 같았다.
우리 실천이 공허한 메이라 같았다. 느리게 변화해서 우리가 인식하지 못했을지 모르지만, 그때는 그랬다.
나는 지역의 어떤 변화를 바라고 지역사회를 다녔을까?
그 지역사회에 대한 변화의 상이 있었을까?
전통적 공동체는 깨어진 지 이미 오래인데 아직 그것을 붙잡은 것일까?
산업화 개발 시대의 도시 빈민 지역의 공동체의 모습을 상정한 것일까?
아니면 그도 저도 아니고 전문가 흉내 내며 그냥 시키는 데로 계획한 데로 움직였던 것일까?
새로운 지역은 공동체는 어떠해야 하는가?
나는 고민했다.
또한 소위 프로그램의 한계를 절감했다.
그 자체로 지역사회를 만나고 주민들과의 호흡이 필요하다 생각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회의 복지 욕구는 점점 커졌고 사회복지 현장 특히 지역복지 현장은 아주 빠르게 변했다.
제도의 변화를 현장이 따라가지 못했다.
그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소위 ‘마을 지향 복지사업’, ‘마을만들기 사업’이라는 이름으로
지역복지 사업의 중요성이 재인식되고 외부로부터 지역 조직화라는 이름으로 대체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역복지 조직들의 지역사회에 대한 민감성은 더 둔화 되었던 것 같다.
주민들의 욕구와 지역사회의 변화에 맞춰 빠르고 적절하게 대응하는 형태가 아니라
관리와 감독, 행정과 서류, 의무와 틀을 채우며 지역의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현실은 나에게 많은 시간을 필요하게 만들었고 나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나의 실천을 하고 싶었고 나의 방법론을 찾고 싶었다.
내가 하고 싶은 실천이 어떤 것인지 내가 지향하는 방법론은 어떠해야 하는지 정의해야 했다.
그래야 한 발 나아갈 수 있으니 말이다. 그 정의는 근본에서 시작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내게 물었다.
‘너는 주민의 변화를 믿느냐?’ ‘너에게 그들은 어떤 의미인가?’
‘너는 지역사회를 신뢰하느냐?’ ‘그래서 너는 지역사회가 어떠하길 바라느냐?’ ‘그래서 너는 무엇을 할 것인가?’
무엇 하나 쉽게 대답할 수 없는 질문들의 연속이었다.
당위가 아닌 솔직함이 필요한 질문들, 아직 진행형인 이 질문들을 이 글을 쓰면서도 마주한다.
어쩌면 이 <복사꽃>의 글쓰기 작업은 이 물음에 대한 스스로 답을 찾는 과정일 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지금은 멈칫멈칫 한다. 확신하기 어렵고 이것이 옳은 것인지 저런 방법이 맞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후배들에게 ‘이것이다’라고 답하기 어려운 것들이 많아진다.
그래서 더 자주 묻는다. 멈추어 생각할 때가 많아진다.
자유로운 인간들의 공동체
사람은 누구나가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아가고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아간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그것이 사람다운 삶이라 생각하고 있다.
내 삶을 선택하고 책임지는 일이 인간의 삶이며 보통의 삶이다.
내가 돕는 사람들도 그러하고 나와 내 아이도 그런 삶을 살아갈 것이다.
모두 저마다의 목적과 이유로 살아왔고 또 살아간다.
특별히 잘났거나 못났거나, 좋거나 나쁜 것이 아니라 그 삶은 그 자체로 목적이고 이유라 생각한다.
누구나 때로 상황에 짓눌려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모르기도 하고,
너무 두려운 나머지 현실에서 도망치기도 하고, 외로움에 몸서리치며 자기를 보호하려 하기도 한다.
그런 모든 순간조차 삶이라 생각한다.
사람을 돕는 일은 이런 삶의 어떤 순간 어떤 어려움을 돕는 것이다.
그의 모든 삶을 책임지는 일이 아니며 이는 오히려 그의 삶을 망치는 일이다.
더군다나 함부로 그의 삶을 평가하고 아래로 보며, 이건 맞고 저건 틀렸다 해서는 안 된다.
칼 자스트로는 의사나 변호사와 다른 전문직으로 사회복지 전문직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사회복지사는 문제가 있는 사람이 클라이언트이고,
따라서 그 문제를 해결할 책임도 클라이언트에게 있다는 것을 잘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이런 것이 바로 사회복지사가 다른 전문직과 구별되는 지점이다.
의사, 변호사와 같은 전문직들은 클라이언트가 해야만 하는 일을 충고하는데,
이 상황에서 클라이언트는 전문직의 충고에 제약을 받으며 의사결정을 내린다.
아주 대조적으로 사회복지사는 클라언트와의 관계에서 전문가와 추종자의 관계가 아니라 동등한 관계를 만들고자 한다.
사회복지사의 전문성은 클라이언트에게 좋은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권유하는 것이 아니라,
클라언트를 도와서 문제를 규정하게 하고 문제를 해결하는데 필요한 대안을 조사하여 확인하게 하며,
의사결정을 내릴 기회와 역량을 중진시키는데 있는 것이다.
많은 학생들은 사회사업에 처음 입문 했을 때 그들의 역할을 ‘구세주’ 혹은 ‘구출자’로 인식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 칼 자스트로, 일반주의 사회사업실천,
우리에게 「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으로 잘 알려진 사울 알린스키는
조직가로서 주민을 바라보는 태도에 대해 아래와 같이 이야기한다.
“조직적 캠페인이 실패하는 주요 이유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진정한 존경의 결여에 있다.
일부 조직가는 내심 지역사회 주민들보다 자신이 우월하다고 느낄지도 모르겠다.
… 주민들이 늘 속을 수는 없는 법이다. … 주민들 정말 좋아하는 조직가는 그들을 본능적으로 존경한다.
그래서 성인을 어린애처럼 대하지 않는다.”
- 사울 알린스키. 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
실천가로서 나는 그들이 말한 것을 잘 실천하고 있다고 쉬이 답하기 어렵지만,
적어도 클라이언트나 주민을 가르쳐야 할 대상으로 여기지는 않는다.
누구나 자유의지가 있고 삶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것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이뤄갈 힘이 있다고 생각한다.
비록 도움이 필요할 때가 있고 도움받기도 하지만 자기 삶의 전문가는 우리가 아니라 그들 스스로라고 생각한다.
마을은 원래 시끄러운 곳이다.
좋은 일 나쁜 일, 기쁜 일 슬픈 일, 서로 다른 이해관계로 항상 소란스럽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고요하기만 한 마을은 어딘가 수상하다. 아이들이 없는 마을, 정적만 감도는 마을을 상상해보라. 마을답지 않다.
사람 소리 들리고 아이들 웃음소리 들리고 때로 시시껄렁한 일로 서로 다투기도 해야 마을답게 느껴진다. 나는 그렇다.
다양성은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기본 토대가 아니던가!
마을 역시 다양성을 인정해야 한다. 이런 사람 저런 사람, 이런 생각 저런 생각, 이런 방식 저런 방식이
무한히 교차하고 부딪치고 시시때때로 변화하는 곳이 마을이고 지역사회라고 나는 믿는다.
한가지 생각과 방식만이 관철되고 어느 한쪽에 의해 다른 여러 쪽이 통제되는 마을은 수상하다.
아니 위험하다. 이런 마을은 사람 살기 좋은 곳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자유로운 인간들의 공동체,
자유의지를 가지고 스스로 삶을 선택하고 책임지며,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동체가 지역사회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런 공동체는 사회복지의 도구가 아니라 목적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런 공동체에서는 약자가 더 살기 좋을 것이므로, 서로 인격을 존중하고 더 안전할 것이므로,
나아가 일상 속에서 도움을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할 가능성이 높을 것이므로 …
지역사회는 우리 실천의 객체가 아니라 주체라는 것이다.
자원을 징발하는 공간이 아니라 자유 인간들이 만나고 연결되는 공간이다.
하는 일을 통해 교류하고 하고 싶은 일로 만나고, 만나는 과정에서 새로운 관계가 생기고
그 관계 속에서 주거니 받거니 하며 일상이 만들어지는 공간의 토양이 바로 지역사회라 생각한다.
그러니 지역사회는 얼마나 역동적인가! 이를 좀 더 확장해서 해석하면
지역사회는 우리 이상과 일상이 만나는 극적 공간이 된다.
이런 역동적인 공간을 우리는 너무 단선적으로 판단하고 규정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반성하게 된다.
‘너의 사회복지 이상은 무엇이냐?’ ‘너의 가치 지향은 어디로 향하고 어떻게 존재하고 있느냐?’
이런 물음에서 복지관 사회사업가는 지역사회를 떼어 놓을 수 없다.
자유의지를 가지고 자기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동체 말이다.
이상은 저기 멀리 떠 있는 구름이 아니라 이 일상에 근거해야 한다.
혁명의 완성이 일상이듯 이상의 완성 역시 일상에서 이루어진다.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작고 사소한, 힘들기도 하고 권태롭기도 한, 때로 막막하게 느껴지는,
어떤 일을 용기 내 함께 이뤄가는 일상 말이다. 이런 일상의 작은 것 하나하나를 이상에 가까이 가게 돕는 일이 우리 실천이 아닐까.
이런 우리 실천이 수렴되는 곳 또한 지역사회다.
지역사회는 실천의 터전이자 실천 결과가 되는 곳이다.
지역사회에는 사람들이 서로 어울려 살고 있고 우리는 그 사람을 만난다.
사람들은 지역사회와 주고받으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생명을 품고 살아 숨 쉬는 지역사회, 그러니 지역복지관 사회사업가인 나는 지역사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농부가 땅을 포기하는 법이 없듯 복지관 사회사업가는 지역사회를 포기할 수 없다.
나의 작은 방법론에 대하여
2018년 OECD에서 조사한 Better Life Index 지표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도움이 필요할 때 지역사회 주민들에게 의지할 수 있다고 믿는가?” 라는 Community 질문에
78%가 그렇다고 응답했고 이는 OECD 40개국 중 40위에 기록되었다.
우리나라의 관계적 빈곤이 불러오는 불평등과 고립과 소외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우리 사회 누군가는 혹은 어떤 단위에서는 여기에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우리 하는 일, 특히 지역복지는 이 현상과 관련이 있다.
절대적 빈곤을 현장 실천 단위에서 해결하기는 어려우나 관계적 빈곤의 문제는 이웃과 인정으로 실천 해 볼 만한 일이다.
대규모 봉사단의 조직과 실행이라는 방식이 아닌 지역사회 내에서 지역사회 주민들과 함께 좋은 이웃의 연결로 할 만하다.
유년 시절 시골 마을, 가난했지만 그래도 좋았던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누가 나서서 가난을 해결해 주지 않았지만, 그 가난으로 살아갈 동기를 얻기도 했고, 가난했지만 좋은 친구들과 즐겁게 놀았다.
어머니 병간호를 위해 내 아이를 안심하고 맡길 좋은 이웃이 있다면 삶의 질은 분명 높아질 것이다.
나는 슬픔의 길을 따라가기보다 슬픔을 잉태하는 사람을 따라가고 싶다.
슬픔을 따라가다 보면 분노를 만나게 된다.
그러나 슬픔을 잉태하고서도 슬픔에 맞서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을 따라가면 존재의 힘을 만나게 된다.
나아가 타인의 슬픔을 환대로 어깨에 올리는 사람을 만나면 희망을 만나게 된다.
나는 그 슬픔을 이겨내는 연결과 환대와 응원과 관계의 힘을 살리고 싶다.
슬픔과 분노와 희망과 감동. 이 모두가 공존하는 곳이 바로 일상이고 지역사회다.
슬픔의 길 위 놓여 있는 이들을 위로하는 일, 희망의 길 찾기를 응원하는 일이든 그것이 특별한 나눔이기보다
그냥 일상으로 평범한 사람살이가 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연결한다.
취향공동체 속에서 서로 알고 지내기를 바란다. 인사하고 지내다가 언니가 되고 도움이 필요할 때 그 사람이 생각나기를 바란다.
이렇게 주민들이 서로 만나 관계를 맺고 공간을 만들고,
그 공간이 제3의 공간이 되어 위로하고 즐거워하고 내 가진 것으로 나눈다면 삶은 풍성해질 것이다.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이유와 재미를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한 사람 두 사람, 한 모임 두 모임 지역에서 자리 잡고 생동하기를 바란다.
그것을 연결하고 생동케 하는 일에 나의 가슴과 발과 품이 쓰이면 좋겠다.
그리하여 누구나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아가고 그 삶에서 작은 행복을 이루어가면 좋겠다.
장애가 있어도 하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 찾아 나설 수 있는 용기를 주는 마을이면 좋겠다.
혼자서 섬으로 남는 사람이 없는 지역사회가 되면 좋겠다.
‘사람들의 사이를 사이좋게 하는, 이웃 관계를 주선하는 일이 바로 사회사업가인 나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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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김영습 선생님께서 경남지역 사회사업가 글쓰기 모임 <복사꽃>에서 쓴 글을
허락을 얻고 소개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