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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마고의 노래 원문보기 글쓴이: 사람이 하늘이다
제14장. 신시神市의 모임
그리하여 황궁씨 후예¹ 6만이 이주하여 지키고 나무를 베어 8만개의 뗏목을 만들어 신부信符²를 새긴 후 천지天池³의 물에 흘려보내 사해의 모든 족속들을 초청하였다.
모든 족속들이 신부信符가 새겨진 뗏목을 보고 차례로 모여 들어 박달나무숲에서 신시神市⁴를 크게 열었다.
목욕재계하고 마음을 깨끗이 하여 하늘의 상을 살피고 마고의 계보를 연구하여 그 족속을 밝히며 천부의 음音에 준하여 그 말과 글을 정리하였다.
또 북극성과 칠요七耀의 위치를 정하고 희생물을 구워 반석위에 놓고 제사를 지내며 천웅의 음악을 연주하며 모여서 노래를 불렀다.
모든 족속들이 방장산 방곤方壼의 굴에서 칠색보옥을 캐서 천부를 새겨 방장해인方丈海印⁵이라 이르고 칠난七難⁶을 다스려 없애고 돌아갔다.
이로부터 10년마다 반드시 신시를 여니 말과 글이 같아지고 천하의 법도가 하나 되고 인간세상이 크게 평화로웠다.
이에 따라 바닷가에 성을 쌓고 천부를 받들어 모시며 머무르는 모든 족속들을 묵거나 살도록 하였다. 이로부터 천년사이에 성황城隍⁷이 전역으로 퍼졌다.
[원문]
於是 移黃穹氏之裔六萬 守之 乃割木作桴八萬 刻信符 流放於天池之水 招四海 어시 이황궁씨지예육만 수지 내할목작부팔만 각신부 유방어천지지수 초사해
諸族 諸族 得見信桴 次第來集 大開神市於朴達之林 修禊淨心 察于天象 修麻 제족 제족 득견신부 차제래집 대개신시어박달지림 수계정심 찰우천상 수마
姑之譜 明其族屬 準天符之音 整其語文 又奠 定北辰七耀之位 燔贖於盤石之上 고지보 명기족속 준천부지음 정기어문 우전 정북진칠요지위 번속어반석지상
會歌而奏天雄之樂 諸族 採七寶之玉於 方丈方壼之堀 刻天符而 謂之方丈海印 회가이주천웅지악 제족 채칠보지옥어 방장방곤지굴 각천부이 위지방장해인
辟除七難而歸 自此 每十歲必開神市 於是 語文同軌 一準天下 人世太和 仍而 벽제칠난이귀 자차 매십세필개신시 어시 어문동궤 일준천하 인세태화 잉이
築城於海隅 奉尊天符 使駐留諸族 館而居之 爾來千年之間 城隍 遍滿於全域 축성어해우 봉존천부 사주류제족 관이거지 이래천년지간 성황 편만어전역 |
[해설]
1. 황궁씨 후예
『부도지』에서 전하는 황궁씨의 후예인 한민족의 계보는 마고ㆍ궁희ㆍ황궁씨ㆍ유인씨ㆍ환인씨ㆍ환웅씨ㆍ임검씨로 이어졌으며, ‘오미五味의 책임을 속죄하는 것과 대성大城의 일을 회복하는 일(『부도지』 제20장)’을 주관해왔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일과 세상 사람들이 진리를 깨닫고 인간 본성을 회복하여 잃어버린 마고성의 낙원을 되찾는 성스러운 일들을 황궁씨의 후예들이 주관하였다.
부도(아사달)를 완성하고 나서 황궁씨의 후예로 하여금 지키도록 하였다. 부도를 지키는 인원수가 6만 명으로 당시의 상황에 비추어 상당히 많은 숫자이다. 황궁씨 후예들의 본류가 이동한 경로는 파미르 고원 - 신강성 천산 - 청해성 기련산(일명 천산) - 섬서성 태백산 - 산동성 태산 - 하북성 태백산 - 한반도로 추정된다.
2. 신부信符
천부天符의 다른 이름이다. 인류가 ‘오미五味의 화禍’로 인하여 마고성의 낙원을 떠나서 동서남북으로 이별할 때, 황궁씨가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며 천부天符를 신표로 나누어주었다.(『부도지』제8장)
3. 천지天池
중국 산서성의 상건하 상류에 있었다. 일반적으로 천지라고 하면 백두산 천지를 생각 할 수 있다. 그러나 제13장에서 보았듯이 부도의 위치는 한반도의 백두산이 될 수 없으므로 천지는 부도(아사달) 내에서 찾아야 한다. 부도의 제일 바깥쪽을 흐르는 강물이 호타하와 상건하인데 호타하의 상류에 호지滹池가 있고 상건하 상류에 신지神池가 있다. 이 신지神池가 천지天池였다.
신지는 부도의 서쪽 보단이 있는 산서성 영무寧武지역에 관잠산(管涔山 2,530M), 운중산(云中山 2,654M), 노아산(芦芽山 2,744M) 등의 태산준령이 감싸고 있는 지역에 있다. 「대청광여도」(1)(다음카페 향고도/중국고지도)에는 이곳이 천지天池로 표기되어 있다. 특히 천지가 발원하는 노아산은 신기하게도 해발 2,744M로 백두산과 높이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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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조선의 중심인 신시, 조시, 해시의 위치 |
4. 신시神市
단군조선의 수도 아사달(부도)에서 10년마다 사해의 모든 족속들이 모여 천부의 진리를 익히며, 천문관측, 족보정리, 말과 글의 정리, 역曆의 정리, 하늘에 제사 등을 행하는 인류대화합의 축제였다. 신시는 오늘날의 유엔 및 교황청의 기능을 합한 것과 같은 정치ㆍ종교의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신시의 모임을 통하여 사해의 모든 족속들의 말과 글이 같아지고 천하의 법도가 하나 되게 함으로써 홍익인간ㆍ이화세계의 대이상을 추구하였다.
『부도지』에 의하면 환웅씨 시대 이전까지 인류는 주로 산악지역과 섬서성 태백산 등 대륙의 중앙에 세상의 중심인 부도(신시, 아사달)를 세웠다. 그러나 환웅씨 이후 임검씨 시대에 이르면서 배를 이용한 교통이 원활해지자 세상의 중심인 부도가 발해만 쪽으로 이동하였다. 그리하여 단군임검이 부도를 북경 서남쪽의 태백산 부근으로 정한 이래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세상의 중심은 태백산 부근의 왕검성에서 북경을 잇는 지역으로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다.
우리는 흔히 역사를 공부하면서 대륙의 중심을 장안이나 낙양으로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소설 삼국지의 영향이 크다고 본다. 소설 삼국지는 50년여 년의 짧은 세월 동안 지나인들이 장안과 낙양을 중심으로 자기들끼리 골육상쟁을 벌인 역사를 미화한 것에 불과하다. 지난 수천년 동안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장안이나 낙양에 도읍을 정한 왕조는 대략 그 세력범위가 섬서성과 하남성을 넘지 못하였다. 지금의 하북성 북경 등 단군조선의 부도(신시, 아사달) 부근에 수도를 정한 왕조만이 대륙전체를 호령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대륙의 역사를 올바로 이해하려면 부도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 본문의 내용에 따라 신시에서 행한 일들을 살펴보자.
1) 수계정심修禊淨心 찰우천상察于天象
수계정심은 목욕재계하고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이다. 찰우천상은 하늘의 상을 살피는 것이다. 신시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천문을 관측하고 역曆을 제정하는 일이었다.
2) 수마고지보修麻姑之譜 명기족속明其族屬
마고의 계보를 연구하여 그 족속을 밝히는 것은 족속간 유대를 강화하는 지름길이다. 모든 인류는 마고의 자손들이다. 마고의 계보를 연구하여 각 족속들이 서로 한 핏줄임을 확인하는 것이 인류 평화의 첫걸음이었다.
3) 준천부지음準天符之音 정기어문整其語文
천부의 음에 준하여 그 말과 글을 정리하였다. 천부의 음은 한글말이다. 파미르고원의 마고성으로부터 사방으로 흩어진 각 족속들은 수천 년의 세월이 흐름에 따라 천부의 음을 잃어버리고 각각 처한 생활환경에 따라 언어와 문자가 모두 달라졌다. 언어와 문자가 달라지므로 서로 소통하지 못하고 끊임없는 다툼이 되풀이 되었다. 그런 와중에서도 황궁씨ㆍ유인씨ㆍ환인씨ㆍ환웅씨ㆍ임검씨로 이어지는 한민족은 끊임없이 천부의 음을 계승해왔다. 그리고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꾸준히 사해의 모든 족속들을 방문하여 천부의 음을 전하고 말과 글을 통일하려고 애썼다. 단군임검 시대에 이르러 부도를 건설하고 신시를 통해 각 족속들의 지도자들이 함께 모여서 천부의 음을 익히고 각 족속들에게 전함으로써 말과 글이 같아지게 된 것이다. 단군임검 시대에는 한글말이 세계공용어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4) 전奠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북극성과 칠요(七耀, 북두칠성 또는 일월화수목금토)의 위치를 정하고, 희생물을 구워 반석위에 놓고 제사를 지내며, 천웅의 음악을 연주하며 모여서 노래를 부르는 의식을 거행하였다. ‘북극성과 칠요의 위치를 정했다.’는 것은 희생물을 올리는 반석에 북극성과 북두칠성 등의 별자리를 새긴 것으로 보인다. 북극성과 북두칠성은 방위와 시간 및 계절을 알려주는 아주 중요한 별이다. 북두칠성은 북극성을 중심으로 시계 반대방향으로 1시간에 15도씩 돌아가며, 계절마다 북두칠성의 위치가 달라지므로 철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한민족은 북두칠성이 인간의 길흉화복과 생사를 주관하는 별로 인식하고 신앙하였다.
최근 한반도에서 별자리 그림을 그린 것으로 볼 수 있는 고인돌이 여럿 발굴되고 있어서 부도지의 증언을 뒷받침하고 있다. 북한 학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함경남도 용석리 고인돌에 기원전 2300년경의 별자리가 새겨져 있다고 한다. 또 기원전 1500년경의 함남 함주군 지석리 고인돌의 구멍 및 기원전 500년경의 충북 청원군 아득이 고인돌의 돌판에 난 구멍들이 북극성과 북두칠성 등의 별자리를 나타내는 것으로 밝혀졌다. 아울러 조선 초기에 제작ㆍ보급된 전천천문도全天天文圖인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 국보228호)’가 중앙부는 조선 초기의 별자리를 나타내고 주변부는 고구려 초기의 별자리를 나타내는 것임이 과학적으로 증명되어, 한민족의 정밀한 천문관측이 삼국시대 초기로 거슬러 올라감을 밝혔다.(박창범 저『하늘에 새긴 우리역사』)
5. 방장해인方丈海印
칠색보옥에 천부를 새긴 것이다. 옥은 예로부터 무병장수와 행운을 가져다주는 신석神石 또는 영석靈石으로 여겨 왕권과 왕가를 상징했다. 옥을 왕만이 지닐 수 있는 품격 높고 귀한 보석이라고 본 까닭이다. 그래서 임금과 관계된 낱말에 옥玉자를 썼다. 왕이 앉는 자리를 옥좌, 왕의 손을 옥수, 도장을 옥새, 걸음걸이를 옥보라고 부른 것이 좋은 예이다. 또한 도교 등에서 최고신을 옥황상제라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옥이 이런 상징을 가지게 된 것은 부도의 신시에서 칠색보옥에 천부를 새겨서 각 족속의 지도자들이 나누어 가진데서 비롯되었다.
6. 칠난七難
칠난은 칠정七政이 어지러워지는 것이다. 칠정은 해와 달과 다섯 개의 별(水火木金土)의 운행을 의미한다.(우서 제2편 순전 5장|작성자 법고창신)
불교의 인왕반야경에는 해와 달의 운행이 도를 잃고 빛을 잃는 일월 실도난, 금성과 혜성이 변하는 성수 실도난, 큰 불이 이는 재화난, 홍수가 지는 우수 변이난, 태풍이 부는 악풍난, 가뭄이 드는 항양난, 사방으로부터 적병과 도적이 일어나는 악적난을 칠난이라 한다.(『다음 백과사전』)
7. 성황城隍
성황은 바닷가에 성을 쌓고 천부를 받들어 모시며, 여러 족속들이 어울려 살아가는 곳으로 부도로부터 유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성황문화에 대한 소중한 증언이다.
(3) 『부도지』제15장 해설
제15장. 조시朝市와 해시海市의 모임
또 예澧와 양陽이 교차하는 중심지에 조시朝市¹를 열고 팔택八澤²에서 해시海市³를 열었다.
매년 10월에 조제朝祭⁴를 지내니 사해의 모든 족속들이 지방 토산물을 가져와 바쳤다.
산악족들은 사슴과 양을 바치고 해양족들은 생선과 조개를 바치며 빌었다.
“조제에 나아가 생선과 양을 희생으로 바치오니 오미의 피를 맑게 하여 창생의 허물을 그치게 하소서!”
이것이 바로 조선제朝鮮祭였다.
이때 산악과 해양의 족속들이 생선과 고기를 많이 먹으므로 교역하는 물품들이 거의 포와 조개류와 가죽류였다.
그리하여 희생제를 지냄으로서 사람들로 하여금 반성하고 공에 보답토록 하기 위함이었다.
손가락을 피에 꽂아 생명을 되돌아보고 땅에 피를 부어 기른 공에 보답하였다.
이는 희생물로 오미의 잘못을 갚고 허물 그치기를 바람이니 바로 육신을 지닌 괴로운 심경을 고백하는 것이었다.
매년 제를 지낼 때 물화가 폭주하므로 나루와 포구에서 해시海市를 크게 열었다.
부정을 없애고 몸을 깨끗이 하여 지리를 살피며 교역의 법을 시행하여 그 가치와 양을 정하고 물건의 성질을 따져서 그 쓰임새를 밝혔다.
또 부도 팔택八澤의 모양으로 못을 파고 굽이쳐 흐르는 물 사이에서 굿하고 점을 치며 물질의 풍요를 바라는 의식을 행하면서 모여 잔치를 열었다.
모든 족속들이 봉래산 원교봉圓嶠峰에서 오엽서실인 잣을 얻어 봉래해송蓬萊海松이라 이르고 오행五幸을 은혜롭게 얻어서 돌아갔다. 이로부터 사해에 산업이 일어나 교역이 왕성해지므로 천하가 넉넉하였다.
[원문]
又設朝市於 澧陽交地之腹 設海市於八澤 每歲十月 行朝祭 四海諸族 皆以方物供進 山岳 우설조시어 예양교지지복 설해시어팔택 매세십월 행조제 사해제족 개이방물공진 산악
諸族 供之以鹿羊 海洋諸族 供之以魚蚧 乃頌曰 朝祭供進 魚羊犧牲 五味血鮮 休咎蒼生 제족 공지이녹양 해양제족 공지이어합 내송왈 조제공진 어양희생 오미혈선 휴구창생
此謂之朝鮮祭 是時 山海諸族 多食魚肉 交易之物 擧皆包貝皮革之類故 乃行犧牲之祭 使 차위지조선제 시시 산악제족 다식어육 교역지물 거개포패피혁지류고 내행희생지제 사
人反省報功也 揷指于血 省察生命 注血于地 環報育功 此代物而 償五味之過 願其休咎 卽 인반성보공야 삽지우혈 성찰생명 주혈우지 환보육공 차대물이 상오미지과 원기휴구 즉
肉身苦衷之告白也 每歲祭時 物貨輻湊 廣開海市於津浦 除祓潔身 鑑于地理 行交易之法 육신고충지고백야 매세제시 물화폭주 광개해시어진포 제불결신 감우지리 행교역지법
定其値量 辨物性之本 明其利用 又象 鑿符都八澤之形 報賽於曲水之間 會燕而行濟物之儀 정기치량 변물성지본 명기이용 우상 착부도팔택지형 보새어곡수지간 회연이행제물지의
諸族 取五瑞之實於 蓬萊圓嶠之峰 卽栢子也 謂之蓬萊海松 惠得五幸而歸 自此四海興産 제족 취오서지실어 봉래원교지봉 즉백자야 위지봉래해송 혜득오행이귀 자차사해흥산
交易殷盛 天下裕足 교역은성 천하유족 |
[해설]
1. 조시朝市
매년 10월에 사해의 모든 족속들의 조제朝祭를 지내기 위한 모임이었다. 조시가 열린 곳은 예와 양이 교차하는 중심지로 중국 섬서성 장안부근이다.
예澧는 물 이름이다.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지도중의 하나로 꼽히는 「우공소재수산준천지도」(禹貢所載隨山浚川之圖 1209년작, 다음카페 향고도/중국고지도)에는 예수澧水가 두 곳에 있다. 하나는 중국 섬서성의 태백산 쪽에서 발원하여 장안을 감싸고돌아 황하로 흘러들어간다. 다른 하나는 호남성에 있는 숭산을 끼고 돌아 양자강가의 동정호로 흘러가는 물이다. 양陽은 한수漢水의 북쪽을 가리킨다. 한수는 섬서성 태백산 쪽에서 발원하여 호북성을 관통하여 흐르는 양자강의 지류다. 그러므로 한수의 북쪽을 흐르는 예수는 장안을 감싸고돌아 황하로 흘러가는 물이다.
조시가 열린 섬서성 장안은 중국대륙의 중심이며 육상교통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또한 환웅천왕이 3,000명의 무리를 이끌고 내려와서 신시를 열었던 섬서성 태백산과도 가까운 위치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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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공소재수산준천지도禹貢所載隨山浚川之圖 |
2. 팔택八澤
단군임검이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할 홍익인간ㆍ이화세계의 터전으로 삼은 발해만과 황해 일대의 수상교통 요지에 만든 8개의 못이다. 본문의 “팔택에서 해시를 열었다.”는 구절과 “매년 제를 지낼 때 물화가 폭주하므로 나루와 포구에서 해시를 크게 열었다.”는 구절을 통하여 팔택에 사진사포를 설치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 제13장에서 “네 나루와 네 포구는 천리간격으로 잇달아 동과 서로 빙 둘러 늘어섰다.”고 하였다. 위의 「우공소재수산준천지도」에서 중국 동해안에 대륙택大陸澤, 뇌택雷澤, 대야택大野澤, 진택震澤 등 4개의 못이 있다. 이들 4개의 못은 황하 등의 물길이 자주 바뀌면서 위치도 시대별로 많은 변동을 보이는데, 천진에서 양자강까지 대략 천리 간격으로 배치하면 발해만 서쪽 4개의 못은 위의 지도「단군조선의 중심인 신시, 조시, 해시의 위치」에 표시한 해시의 위치와 같다. 발해만의 동쪽인 한반도에는 고대지도가 없어서 고증하지는 못했지만, 난하 하류 및 만주벌판과 통하는 요하 하류, 압록강과 한강 하류 등이 수상교통의 요지로 단군임검이 사진사포와 8택을 만든 목적과 부합된다.
또 위의 「우공소재수산준천지도」에서 도이島夷, 래이萊夷, 우이隅夷, 회이淮夷 등 우리겨레인 구이九夷가 천진에서부터 양자강 아래지역까지 중국 동해안에 광범위하게 살았음이 표시되어 있다. 제13장에서 “나루와 포구 사이에는 6부六部를 설치하여 모든 족속들이 거처하며 살게 하였다.”는 증언과 일치한다. 이는 발해만과 황해 일대가 단군임검의 터전이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3. 해시海市
팔택에서 열렸던 시장이다. 해시에서는 교역의 법을 정하여 시행하고, 굿하고 점을 치며, 물질의 풍요를 기원하는 의식을 행하면서 잔치를 열고 모든 족속들이 함께 어우러져 마시며 즐겼다. 매년 10월에 조제를 지낼 때 물화가 폭주하므로, 발해만과 황해 주변의 네 나루와 네 포구에 해시를 크게 열어 사해제족들이 서로 특산물을 교환하였다.
4. 조제朝祭
인류가 낙원인 마고성을 상실하게 된 ‘오미의 화’를 반성하고 마고성을 회복하기 위하여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간절한 의식이었다. 매년 10월 중국 섬서성 장안 부근에서 조시를 열고 조제를 지냈는데, 사해의 모든 족속들이 지방토산물을 가져와 바쳤다. 이것이 후일 조공朝貢으로 변한 듯하다.
1) 매세십월每歲十月 행조제行朝祭
매년 10월에 조제를 지냈다. 예로부터 우리민족은 10월을 상달이라고 부르며 1년 농사를 마감하고 수확한 곡식으로 감사하는 제천의식을 거행해왔다. 이는 고구려의 동맹, 부여의 영고, 예맥의 무천 등으로 이어졌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예濊를 보면 “항상 시월에 절기행사로 하늘에 제사를 드리고 밤낮으로 음주가무를 즐기는데, 이를 무천舞天이라 한다.” 고 하였다. 10월에 거행하는 제천행사가 아주 성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은 10월 3일을 개천절로 기념하고 있다. 개천절은 ‘하늘이 열린 일’을 기념하는 날이다. 개천이란 환웅이 처음으로 하늘을 열고 태백산 신단수 아래로 내려와 홍익인간ㆍ이화세계의 뜻을 펼치기 시작한 사건을 가리킨다. 조제를 환웅천왕의 도읍지인 섬서성 장안부근에서 연 것도 환웅천왕의 개천과 관련이 있다. 『부도지』로부터 10월에 성대한 제천의식을 거행하는 풍속의 기원이 단군조선의 조제로 거슬러 올라감을 알 수 있다.
2005년 6월, 기원 직후 부족국가 시대 동예東濊의 제천풍속으로 알던 무천舞天 행사가 이보다 앞서 고조선에서 열렸다는 고문서 기록이 발견되어 『부도지』의 기록을 뒷받침하였다. 인천시립박물관 윤용구 박사는 “1907년 영국의 A. 스타인이 중국 감숙성 돈황현에서 반출해 간 돈황문서의 토원책부兎園策府에 지금은 전하지 않는 사서인 『위략』을 인용해 고조선에서 10월에 무천이 열렸고, 출정에 앞서 소를 잡아 그 발굽 형상으로 길흉을 점치던 우제점牛蹄占 기록이 있다.”고 말했다.(2005/06/10일자 한국일보)
2) 조제공진朝祭供進 어양희생魚羊犧牲
조제에 나아가 생선과 양을 희생물로 바쳤다. 산악족들은 사슴과 양을 바치고, 해양족들은 생선과 조개를 바쳤다. 조선의 ‘선鮮’자의 의미를 짐작할 수 있다. 조제에 올리는 대표적인 희생물이 생선(魚)과 양(羊)이었으며 동시에 조선이 산악족과 해양족을 아우르는 거대한 나라였음을 나타내고 있다. 오늘날 한자에서 제후들이 천자에게 공물을 바치던 것을 조공朝貢, 제후가 천자를 알현하는 것을 조빙朝聘, 조선의 들을 나타내는 조야朝野가 천하를 의미하는 것 등을 보더라도 단군임검 당시에 조선이 대륙전체를 아우르는 천자국이었음을 알 수 있다.
3) 오미혈선五味血鮮 휴구창생休咎蒼生
조제에 나아가 생선과 양을 희생물로 바치오니 “오미의 피를 맑게 하여 창생의 허물을 그치게 하소서!” 하는 간절한 기도다. 처음에 인류는 지상낙원인 마고성에 살면서 품성이 순정하여 능히 조화를 알며, 지유를 마시므로 혈기가 맑고 밝았으며 그 수명이 한량이 없었다. 그러나 포도를 맛보고 강제로 다른 생명을 먹는 습관을 가짐으로서 사람들의 혈육이 거르지 않은 술처럼 탁해지고, 심기가 혹독하게 변하여 하늘 성품을 잃어버렸다. 그리하여 수명은 짧아지고 죽을 때 천화遷化하지 못하여 썩게 되었다. 이것이 ‘오미의 화’다.
오미를 먹음으로 인하여 거르지 않은 술처럼 탁해진 ‘오미의 피’를 생선과 양 등의 희생물로 대속함으로써 다시 지상낙원인 마고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간절한 기도가 조제였다.
(다음 호 계속)
첫댓글 부도지가 사료 위작 여부 통과부터 먼저 하서야 할 것 같네요. 부도지를 박재상이 썼다고 하지만 솔직히 그럴 가능성은 제로에 수렴하죠. 그렇다면 위서이고 위서일 경우 언제 쓰여졌는지 부터 논해야 할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구한말을 넘기 힘들고 그렇다면 사료로서의 가치는 없죠. 단, 사학사적 가치는 있죠.
부도지를 신라시대 충신 박제상이 썼을 가능성이 제로에 수렴한다. 또는 구한말을 넘기 힘들다는 근거가 무엇인가요? 부도지를 읽으면 읽을수록 진서임을 스스로 알게 될 것입니다.
제가 썼듯이... 신라의 한문 수준이 저 정도의 문장을 쓸 정도로 유려하지는 못했죠. 그리고 원본도 필사본도 있는 것이 아니라 암송에 의해 전래되었다는 믿기 어려운 주장만 있습니다. 그리고 삼국사기 신라 왕계보가 부도지에 그대로 나오고 밑에 올린대로 성경 패러디 등 도저히 박재상이 쓰기에는 힏든 것만 수두룩하죠. 오히려 1900년 이후 구약성경 번역까지 완료되고 난 후 그것들을 보고 창조했다는 것이 진실에 가까울 것입니다.
부도지는 박제상 선생께옵서 쓰신것이 아니고 김은수 선생께서 쓰신 근대의 사서죠.
무엇을 근거로 쓰신지는 알 수 없으나 조선왕조실록, 고려사, 제왕운기등등과 비추어 볼 때 사료적 가치가 현저하게 떨어지는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인정하셔야 합니다.)
정사를 외면한채 근대의 사서를 통해서 왜곡된 제하의 글을 보면 안타깝다는 생각이 많이 드는데 사람..님의 글도 마찬가지네요.
더구나 포도를먹고 고기를 먹고 인간 수명이 탁해졌다는 근래 개신교 일파의 해석을 차용한 것입니다. 실제 일부 개신교에서는 인간은 노아의 홍수 이후 고기를 먹었고, 인간의 수명이 급격히 감소했다고 하지요. 노아가 술에 취해 민폐를 끼친 행동도 하고요. 이런 것도 부도지가 박재상의 서적이 아닌 위서임을 말해주는 주요한 증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