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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연씨가문은 막강한 귀족이었는가?
- 일부 연씨 가문의 독주를 막고자 함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것도 잘못된 견해이다. 고구려는 본래 국내성 출신과 평양성 출신의 귀족 간에 대립이 많았다. 명백히 언급하는 기록은 없으나, 고분의 형식을 통해 그 생활양식이나 성격이 다름을 알 수 있고, 금석문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추정이 가능하며, 을지문덕과 낙랑 왕씨 가문이 수나라와의 4차 전쟁 이후 자취를 감췄다는 것을 통해서도 판단할 수 있다. 오로지 연씨 가문만이 막리지를 유지하는데 이 또한 입지가 매우 좁아졌음을 알 수 있다. 먼저 연태조가 막리지였지만 동시에 고식이 막리지로서 연태조를 압도하는 권력을 가졌다. 또한 고식이 죽었다고 판단되는 시점에서는 이리거세사가 대대로를 역임했으며, 연태조가 죽은 후에는 연개소문이 다른 대신들의 동의하에 겨우 부친의 직위를 계승할 수 있었다. 따라서 연씨 가문의 입지는 당시 매우 좁은 상태였으며 연씨 가문의 권력독점으로 인해 왕과 대신들이 연개소문을 죽이려 했다는 것은 명백히 잘못된 견해인 것이다.(돌부처님 글 인용)
2. 연개소문은 단순히 권력욕 때문에 정변을 일으켰는가?
- 연개소문의 대외정책이 영류왕과는 다르고 기존의 고구려 대외정책과 같은 점으로 보아 서로간의 정치적 대립이 원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참조http://cafe.daum.net/alhc/51q2/4575) 즉 근본적인 원인은 오래전부터 지속된 신구간의 귀족갈등이며 또한 대외정책의 대립에 있었던 것이다.
연개소문이 수많은 대신들을 죽였으나 반대로 귀족들의 갈등을 봉합하는 데에 성공하기도 했다. 고식의 아들인 고량의 가문과 고현의 부친의 가문은 연개소문과는 정치적으로 대립되는 전통적인 1급 귀족이었지만, 이들은 이후에도 권력을 유지했음을 알 수 있다. 연개소문 정권에는 그동안 보이지 않던 희귀 성씨를 가진 장군들이 사령관으로 활약한다. 이것은 오히려 신분적으로 침체되어 있던 고구려가 예전처럼 능력에 따라 등용하는 사회로 돌아갔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노회한 귀족들이 모두 정치적 베테랑으로서 정치에 능했기 때문에 이들이 제거된 것이 무조건 정치적 혼란을 가중시킨다고만 생각할 순 없다. 오히려 이런 부류가 해가 되는 경우도 있으며 무엇보다 능력에 따라 등용되는 고구려사회를 정체시키는 원인이 될 수도 있다.
고구려는 신라와 달리, 또 사극에서와 달리 귀족의 스펙트럼이 매우 넓다. 1개 부에 여러 개의 가문이 존재하고 있었다. 5부의 5가문은 절대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고위관직인 욕살의 경우도 최소 10명 이상이 존재했으며 막리지의 경우도 두셋이 동시에 존재했다. 그렇다면 대로회의 구성원인 위두대형 이상의 귀족의 수는 지금까지의 상식을 초월할 만큼 많다. 더욱이 나름대로 상위관직에도 임명되는 7관등인 대형까지라면 그 수는 더욱 늘어난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정치적 공백으로 인한 혼란은 근거가 없으며 180명의 귀족이 숙청되었더라도 고구려사회의 귀족계층을 염두에 둘 때에 정치적 공백을 언급할 만큼의 수치도 아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연개소문 정권에는 다양한 계층의 인물들이 등용되어 활약했다는 점이다. (돌부처님 글 인용)
3. 연개소문은 완전한 독재 내지 폭압정책을 펼쳤는가?
- 연개소문이 독점권력기반을 목적으로 권력 강화를 위해 어떤 정치적(독재 내지 폭압) 행위를 했다는 근거는 현재 전해지는 사료만 본다면 없습니다.
180여 명에 이르는 많은 대신들을 죽이기는 하였으나, 고식의 아들인 고량 집안과 고현의 부친의 가문은 국내성에 기반을 둔 연개소문과 대립되는 전통귀족이나 연개소문의 정변 후에도 권력 유지를 하였으며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다양한 성씨를 가진 귀족들이 활약하는 기록도 있습니다.
연개소문이 독재권력을 위해서라면 숙청할 때 제일 먼저 쳐야 하는 이들은 고밀 등 1급 전통귀족들이어야 하나 그렇지 않았습니다. 연개소문의 장남 연남생이 온건적인 구귀족 국내성 세력과 어떤 식으로든지 연계되어 있다는 것은 연남생의 외가 내지 처가가 국내성 세력일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연개소문은 정변을 일으킴으로 권력이 전 보다야 강화되기는 하였지만 원활한 대당대전 수행을 위해 독재는 커녕 되려 국내성 세력은 물론 왕실과도 타협을 할 수 밖에 없던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국내성 귀족들은 자신들에게 정세(대내외적으로 반전 분위기)가 유리해지면 이전의 국책(대외강경책)을 일거에 뒤집을 정도로 강한 세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영양태왕은 수나라의 침략의도와 이를 명분 삼아 선제공격을 함으로 전쟁할 수 밖에 없는 정세를 만들어 국내성 귀족들이 전쟁에 협조하게끔 하였을 것이고 연개소문도 이와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수나라가 멸망에 직전에 이르러 고구려 정확히 말해 국내성 귀족들은 더 이상 전쟁을 할 이유가 없어지자 반전을 주장하게 되고 결국 영양태왕 말년 부터 영류태왕 집권기의 국책은 반전쪽으로 기울고 정권은 국내성 귀족들인 온건파가 득세한 것입니다.
연개소문 죽음 전후에도 2차 고당전쟁 이후 사실상 당나라와의 전쟁은 종전된 것이나 다름없으므로 국내성 귀족들이 반전을 주장함에 따라 결국 연개소문 사후 고구려는 대당온건책을 펼치게 됩니다. 영양태왕이나 연개소문은 권력이 강화되기는 하였으나 국내성 귀족들을 비롯한 온건파들이 한 독재는 할 수 없을 뿐더러 위에서 거론했듯이 그들의 협조를 이끌어내야 할 판이었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영영태왕과 연개소문은 국내성 귀족들과 타협 중 강수를 놓을 때 전쟁은 기정사실화 되었고 협조를 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하고 그에 따라 지금 당신들이 누리고 있는 부귀영화도 말짱꽝이될 것이다라는 식으로 설득 했을 것입니다. 때문에 대수당대전 때는 국내성 귀족들도 타협을 하고 이왕에 벌어진 전쟁이니 전쟁 기간 만큼은 최선을 다해 참전했으리라 여겨집니다. 결론은 연개소문은 권력 독점은 커녕 타협을 이끌어내야만하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일부에서는 연개소문이 독재 했다는 근거로 거론하는 것들 중 연씨 형제의 권력세습과 연정토를 예로 드는데, 연개소문은 연씨 형제들에게 높은 관등을 주긴 하였으나, 구체적인 관직을 봤을 때 연개소문의 대부분을 물려 받은 이는 연남생 하나로 초점이 모아질 뿐더러 연남생의 막리지직 세습은 연개소문 독재의 근거라기 보다는 명림답부나 모두루나 고자 등, 고밀 연자유 처럼 고구려의 전통 관습상 세습하는 것이 당연했을 것입니다. 일례로 연개소문이 동부대인직을 세습하려 할 때도 각 부의 대인들이 반대하였기에 직위세습이 불가능해지려 하자 대인들에게 직접 숙이면서 까지 간신히 오를 수 있었다는 것은 고구려 사회에서 특별한 문제가 없는 한 관직(내지 권력)세습은 큰 문제가 되지 않고 따라서 이를 근거로 연개소문이 독재를 했다고 하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연정토 같은 경우 중앙에 있지도 않았고 큰 공을 세울 기회가 적은 남방의 3천5백명 채 안 되는 인구가 거주하는 12성을 거느린 루초에 불과한 것으로 볼 때. 오히려 권력에서 제대로 소외 된 케이스입니다.
또 흔히들 오해하고 있는 것 중 하나가 막리지와 대막리지에 관한 것입니다.
삼국사기에서 막리지의 역할을 병부상서와 중서령을 합한 곧 국정과 병권을 맡는 직이라 하고, 혹자는 이를 두고 연개소문이 정권을 잡은 뒤에 막리지의 역할이 변했다고들 하는데 절대 아니고, 결정적으로 막리지는 최고 벼슬이 아니라 2품 직이었습니다.
고구려 당대인인 고질의 묘지명에도 조부인 고식이 2품 막리로 혼자서 국정과 병마에 관한 일을 맡았다고 하고, 고문의 조부인 고무도 비슷한 기록이 있습니다.
위의 금석문들과 삼국사기에 나온 막리지의 역할에 과장(동시대에 여러 명이 역임이 가능한데다 2품직인 막리지가 홀로 권력을 잡는 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이 있으나, 일치합니다.
연개소문에 와서 갑자기 막리지의 역할이 보다 강화된 것으로 바뀐 것이 아닙니다.대막리지의 경우도 권력이 강화되었다는 것에서 비롯된 미칭일 뿐, 막리지와 다른 실체를 가진 관직으로 볼 이유는 없고, 사서에도 막리지로 표현된 사례가 더 많으므로 연개소문을 기준으로 막리지와 대막리지를 구분짓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막리지는 단독 1인체제의 최고 벼슬도 아니었으며 동시에 여러 명의 병임이 가능한 직이었습니다.
대표적으로 고구려 당대인인 고식, 고무, 연자유 그리고 연개소문(후에 어느 시점에 대대로직을 맡는데, 그 시기는 최소한 1차 고당전쟁 이후로 추정 됨), 보장태왕의 아들 임무가 동시에 막리지를 병임하였습니다.
4. 연개소문은 처음에는 자신의 정권을 인정받으려고 영류태왕의 대외 정책을 계승하여 대당화친책을 썼으나, 당태종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정권 유지에 위협이 되자 할 수 없이 전쟁을 택한 것인가?
- 연개소문이 초기 영류왕의 대외정책을 계승하였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한 주된 근거로는 삼국사기에 연개소문이 도교를 수입하자는 기록입니다. 그러나 정작 도교를 보낸 당나라측 기록에는 624년 영류태왕이 도교를 수입하고 도사들이 왔다는 기록만이 있을 뿐 연개소문이 도교를 수입했다는 기록이 전무합니다. 삼국사기에는 643년 3월에 연개소문이 보장태왕에게 도교를 수입하자고 주청하여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643년에는 연개소문이 당나라에게 화친책을 펴서 도교를 받아들이겠다고 할 분위기가 아니었을 뿐더러 그 다음 기록에는 당태종이 연개소문을 적대시 하는 발언이 나오는데, 이는 앞, 뒤가 맞지 않아 모순되는 점이 있습니다. 연개소문이 도교를 수입하는 과정은 삼국유사 보덕이암조에 그 원문이 자세히 실려 있으나,이것은 불교적 색채가 강하게 입혀져 있어 어떤 스님이 이것을 남긴 것으로 추정됩니다. 연개소문이 정치적 목적으로 불교를 탄압하며 도교를 장려한 것은 사실이므로 이에 불만을 품은 불교세력이 된 남긴 왜곡한 글일 뿐, 삼국사기의 착오가 분명합니다.
참고로 연개소문이 장려한 도교는 당나라에서 수입한 도교가 아니라 고구려 고분벽화에 나오는 고유의 신앙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644년에 고구려와 당나라의 관계를 좀 더 살펴보면 644년 정월에 신라 문제로 당나라의 상리현장과 외교적 마찰이 있었으며 당나라의 사신 장엄을 토굴에 가두기도 하고 또 한 명의 사신인 이의침을 보장태왕에게 엎드린 채로 기어가게 한 후 절하게 할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이미 7월 전 부터에 고구려와 당나라는 요서에서 국지전에 돌입하였습니다. 당나라의 장검과 이도종이 지형탐색을 위해 요하주변으로 출병했다가 고구려군을 만나 고전하기도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특히 이도종은 644년 11월~12월 요하 주변으로 정탐나갔다가 고구려군에게 만리장성까지 추격당하여 목숨을 잃을 뻔 하였고(책부원귀) 2월에는 연개소문이 직접 영주로 출병할 계획까지 있었으나 첩자가 잡혀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습니다. 연개소문이 이미 본격적인 전쟁에 앞서 치열한 국지전에 돌입되었는데도 644년 9월에 연개소문이 당태종에게 백금과 숙위 50명을 보냈는데, 당태종이 사로잡았다는 기록은 비판적으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숙위 50명은 기록 그대로 숙위가 아니라 첩자이고, 백금은 당나라 관리들에게 줄 뇌물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5. 연개소문의 외교정책은 형편없는가?
- 연개소문은 당나라와 대전을 치르기에 앞서 주변의 열국들 그리고 부족들과의 외교를 성공적으로 수행합니다. 설연타(철륵)와 동맹을 맺어 1차 고당전쟁시 설연타는 당나라의 후방을 교란하여 당나라의 전선을 확대시킴에 따라 고구려에 도움을 주었습니다.
또 거란을 관리하여 당나라의 보급로를 불안하게끔 하고 말갈족들 중 최북단에 위치하고 다소 이질적이었던 흑수말갈까지 고구려 중앙군에까지 편입시켜 대당대전의 최전선에서 전투를 치를 정도였습니다.
연개소문의 외교활동 중 가장 논란이 심한 것이 신라 김춘추의 구원요청을 거절건이므로 이에 관해 집중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고구려가 북방이나 서방과 전쟁을 벌이면 남쪽에서 백제나 신라가 고구려의 남쪽 국경을 침범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고구려가 돌궐과 전쟁할 때 백제와 신라가 한강유역을 잠식하고 고수 전쟁 때는 신라가 그 틈을 타서 고구려의 남쪽 영토 500리를 빼앗은 적이 있습니다.
이러한 선례들 때문에 고구려가 안정적인 대당대전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백제와 신라와 대치되어 있는 남방전선의 안정 또한 절대적으로 필요했습니다. 두 국가 모두와 동맹을 맺는다면 고구려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정황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백제와 신라의 대립은 관산성 대전과 대야성 전투로 인하여 나락의 끝까지 치닫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백제와 신라 두 국가 중 한 국가와 동맹을 맺어 다른 한 국가를 견제해야 하는데, 당시 신라 보다 좀 더 강한 백제를 택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었을 것입니다.
당시 백제는 무왕 때 부터 조금씩이지만, 국력이 신라에 비해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의자왕대에 이르러 그것이 절정으로 치닫습니다. 이 때문에 고수전쟁시 고구려의 영양태왕이 백제의 무왕과 밀약을 맺었던 것입니다.
백제 의자왕은 무왕 때 부터 충실히 다져온 강력해진 국력을 바탕으로 그의 신라에 대한 파상공세는 유례가 없을 정도로 강력하여 신라 지배층으로 하여금 백제에게 멸망당할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을 불러올 정도였습니다.
물론 신라의 구국의 명장인 김유신의 뛰어난 선전도 있었지만, 그의 선전은 대부분은 백제가 빼앗은 신라 영토에 대한 탈환전이었고 백제와 신라의 주전선은 신라 영토내였기에 김유신의 선전으로도 물오른 백제의 국력으로 인해 생긴 양국의 국력차를 일거에 뒤집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즉 연개소문이 신라 김춘추의 구원 요청을 거절하고 백제와 동맹을 맺은 첫번째 이유는 당시 백제가 신라 보다 더 강했기 때문입니다.
고구려가 백제와 동맹을 맺은 두번째 이유는 백제의 지리적 위치입니다. 만일 연개소문이 신라를 택하고 백제를 버렸다면 자연히 백제는 당과 동맹을 맺었을 것입니다. 백제는 서해로 당나라 수군과 연합하여 평양성에 위협을 줄 수도 있으며, 당나라가 고구려를 원정할시 충실한 보급기지가 되어줄 수도 있습니다.
당 입장에서 보면 지리적인 면은 물론 군사적인 면이며, 곡창지대며 여러 면에서 볼 때 신라 보다는 백제가 더 동맹의 대상으로 적합하지 않은가 싶습니다. 당이 고구려를 원정할시 백제는 당군의 안정적인 보급로 역할을 해줄 수도 있습니다.
때문에 이런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연개소문은 백제와 동맹을 맺은 것입니다.
그렇다고 고구려가 신라 자체의 멸망을 바란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고구려는 신라가 백제의 공세에 끈질기에 대항하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만일 백제가 신라를 멸망시켰다면(뭐... 실제로는 백제 혼자 신라를 멸망시키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만.), 신라가 백제를 병합하여 일거에 20만 대군(과장을 감한하더라도 신라가 대병을 일으킨 것임에는 틀림없습니다.)을 낼 정도로 급팽창을 했듯이 백제 또한 급팽창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고구려와의 동맹은 무의미해지며 백제는 당과 연합 내지 단독으로라도 고구려를 공격했을 가능성이 있기에 고구려로서는 백제에는 미치지 못하더라도 어느 정도 국력이 있는 신라가 백제를 견제해주길 바랐을 것입니다. 즉 고구려로서는 백제와 신라 자기들끼리 경쟁하여 자국에 피해만 가지 않으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고구려의 신라 공격은 매우 소극적으로 신라를 크게 압박하지 않았습니다. 연개소문이 백제가 멸망하기 전까지 신라를 공격한 사례는 신라의 성 2개를 함락한 것과 신라의 북계 33성 함락건으로 꼴랑 2건입니다. 전자의 경우 당시 연개소문은 정권을 잡은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지지를 얻을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의 정치적 명분 중 하나가 김춘추의 약속불이행과 죽령이북의 고토수복이었으므로 이를 직접 실행한 것입니다. 후자의 경우 기사에 따르면 백제와 고구려 , 그리고 말갈이 전투에 참전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특히 말갈과 함께 였다는 기록은 고구려가 적극 참전하지 않았음을 알려줍니다. 당시 고구려 군대의 존재는 개인적인 추측에 불과하지만 일종의 무력시위 내지 실제로는 고구려가 참전하지는 않았지만 백제가 일방적으로 홍보했을 가능성 정도로 보여 집니다. 따라서 고구려가 참전했더라도 신라 북계 33성의 전부는 아니더라도 대부분은 백제가 가져갔을 가능성도 있다고 봅니다.
일부에서는 백제가 고구려와 수, 당사이에서 양단책을 폈으므로 고구려의 백제 선택은 실패라고들 하는데, 고구려는 백제가 양단책을 써서 왕이나 태자가 당나라에 입조하건 뭘 하건 간에 자국에 직접적으로 피해만 안 보면 그 뿐입니다. 백제는 관산성 대전 대패 이후 급변하는 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이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철저히 실리위주의 외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고구려 본기에도 무왕은 수나라에게 향도가 된다고 했으나 실은 우리와 통했다는 기록이 있고 수나라도 그 점을 간파하여 백제를 간사하다고 까지 표현하였습니다. 즉 외적으로는 수나라 편이고 속으로는 고구려에게 후방을 안정시키는 도움까지 준 것이기 때문에 백제가 등거리 외교를 하는 것을 알면서도 묵인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도 무왕과 의자왕은 고구려와 동맹을 맺었을 때는 고구려가 수, 당과 대전을 치룰 때 간접적으로 도왔으면 도왔지,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피해를 준 바는 없습니다.
또 백제가 중국 세력과의 관계를 청산할 수 없는 이유 중 하나가 외교에서 큰 이익을 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당나라가 협박을 해긴 했었지만 실제로 공격할 가능성은 당시로써는 극히 낮았습니다. 백제가 수, 당에 등거리 외교를 할 수 있던 기본적인 배경은 바다라는 천연방어막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다 때문에 수양제나 당태종 조차 백제가 양단책을 쓰는 것을 알면서도 경고 수준으로만 대처했지 쳐들어오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렇다 해도 당나라의 협박은 백제와의 국교 단절 즉 무역을 일체 안 하겠다는 의미로 다소 긴장을 줄 수 있었기에 당과의 외교를 완전히 깨끗하게 단절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또한 금휴개 당군 전체에게 돌린 것이 아니라 최소 당태종에게만 최대 수뇌부에게만 돌렸을 가능성이 큽니다. 왜냐하면 애초에 금휴개는 황칠나무라는 나무에서 축출한 금빛을 첨가하여 만드는 것인데, 황칠나무는 성장조건이나 환경이 매우 까다롭기 때문에 대량 생산은 거의 불가하여 최근에는 멸종 직전에 이르렀는데, 수십 만에 이르는 당나라군 전체에 갑옷을 돌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동맹은 꼭 같은 노선을 걸어야 하거나 특정 대상국을 전제로 한 것이 아니라 양국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 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연개소문의 외교 정책에서 안타까운 것은 국제정세 운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설연타나 철륵이 과거 돌궐 만큼 강하지가 않고 내분이 심하여 당나라의 이간책에 휘말려 단명했다는 것과 백제 또한 허무하게 멸망하고 백제가 부흥전쟁을 벌일 때 왜국과 연합하여 할 수 있는 범위에서 최선을 다해 지원했음에도 백제 부흥군지배층의 내분으로 인해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연개소문도 동맹국들 지배층의 자체 내부 분열까지는 어쩔 수 없습니다. 이 또한 연개소문에게 책임을 돌리면 그건 억지 밖에 되지 않습니다.
6. 당나라는 연개소문의 정변 때문에 고구려를 침공한 것인가?
- 절대 아닙니다. 이것은 삼국사기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당태종은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키기 1년 전 즉 영류태왕이 집권하던 641년 8월에 첩자 진대덕을 파견하여 고구려의 허실을 엿보게 하고 지리를 탐색하게 하고, 돌아온 진대덕의 보고를 들은 당태종은 즉석해서 고구려를 공격할 구체적인 전략을 수립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연개소문의 정변과는 무관하게 당태종의 고구려 공격은 이미 예정되어 있던 것입니다.
당태종은 연개소문의 정변을 642년 11월 6일에 장검의 보고에 의해 전달 받습니다.
연개소문의 정변은 당태종의 말도 안 되는 전쟁 명분 중 하나가 되었을 뿐입니다.
7. 1차 고당전쟁시 요동방어망의 일부 성들이 항복 내지 함락 되는 등 초전에 고전한 것은 단순히 연개소문의 정변과 그 정권의 무능함 때문인가?
- 우선 이적이 고구려군의 허를 찔러 신성을 공격하고 그 틈에 당태종의 친정군이 쉽게 요하를 건너 정확한 날짜에 이적군과 합류하여 요동성을 협공합니다.
요동성은 12일의 치열한 공방전 끝에 당나라의 화공과 신공성무기로 인해 결국 함락되는데, 요동성이 함락되기에 앞서 내분이 발생합니다.
요동성의 가라달(관등 10위)이 부하에게 피살이 되었는데, 그 성사가 가라달의 처자를 받들고 백암성으로 도망쳤다는 것입니다. 요동성 가라달의 유가족들과 그들을 피신시킨 성사가 연개소문의 반대파로 추정되는 손대음이 성주로 있는 백암성으로 도망쳤다는 기록으로 보아 피살된 요동성의 가라달은 요동성내에서 당나라에게 항복을 주장하다가 피살된 것으로 추정되며 가라달과 같은 성향인 것으로 보이는 성사가 가라달의 유가족들을 이끌고 역시 같은 성향인 백암성으로 피신한 것으로 보입니다.
요동성에 내분이 있긴 하였으나, 겨우 관등 10위인 가라달이 피살된 것으로 요동성 함락에 직접적인 원인이 될 수 없으며 요동성 함락의 직접적 원인은 앞서 거론한 풍향을 이용한 당나라의 화공과 신공성무기 등입니다.
요동성을 함락한 후 당나라군의 다음 목표가 된 백암성은 천혜의 요새이나, 성주 손대음이 싸워보지도 않고 항복을 하는 바람에 결국 함락됩니다.
이렇게 고당전쟁 초전에는 고수 전쟁 당시에는 없던 내분과 항복이 잇달아 발생하였지만, 그렇다고 이를 두고 연개소문 정권이 무능하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우선 연개소문이 642년 말에 정변을 일으키고 644년 중순에 국지전이 일어나고 645년 초에 본격적인 전쟁이 난 것을 보면 실제 연개소문이 정권을 잡은 기간은 2년 정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전쟁 준비 보다 우선 내부봉합 부터 하는 것이 순리이고 필수이므로 내부봉함을 하는 기간을 뺀다면 1차 고당전쟁을 준비한 기간은 길어야 1년 조금 넘는 기간일 것입니다. 1차 고수 전쟁 준비 기간이 평원태왕 말년 부터 영양태왕 대 까지 15년에 이르는 것에 비한다면 매우 짧습니다. 이런 짧은 기간에 연개소문의 정변으로 인해 발생한 내부의 분열을 완전히 봉합하고 전쟁 준비를 마치는 것은 매우 쉽지 않은 일입니다.
어쨋든 대당대전이 코 앞에 닥치자 연개소문과 반대파들은 속으로는 서로를 불신하고 입증된 바 없는 젊은 연개소문의 전쟁 수행능력을 의심하고 있었을 것이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마냥 불신만 하고서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기에 형식적으로나마 대타협을 하고, 전쟁준비를 서둘렀을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연개소문은 자신의 정치적 명분 중 하나였던 반신라정책을 겉으로 드러내면서 직접 신라의 성 2개를 공격하여 함락시켜 전쟁 수행능력을 어느 정도 입증한 것으로 보이며 연개소문의 반대파들은 연개소문의 전쟁 수행능력에 대한 의심은 조금이나마 풀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연개소문의 적극적인 설연타와 백제, 왜국 그리고 거란(요서 공격), 말갈에 대한 외교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기에 연개소문에 대한 신뢰감은 전보다야 높아졌을 것입니다. 때문에 본격적인 1차 고당전쟁이 발발하기 직전까지 당에 미리 내투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본격적인 1차 고당전쟁이 발발하고 요동성- 백암성에서는 당나라의 대군을 두려워하여 내부분열이 발생합니다. 우선 그 근본적인 이유는 영류태왕에게 있습니다.
영양태왕이 수나라의 사신들을 객관에 유폐시키고 아무 것도 듣지도 보지도 못하게 한 것과 달리 영류태왕은 당나라의 사신이 마음껏 정보를 수집하는 것을 방치했습니다. 일부에서는 영류태왕이 천리장성을 쌓은 것을 근거로 팽창하는 당나라에게 위기의식을 느끼고 당나라의 침입에 대비하여 쌓았다고는 하나 이는 경관파괴건으로 더욱 커진 대당 강경파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한 '어차피 본전이니 축성해서 나쁠 것은 없지.' 라는 영류태왕의 안일한 생각에서 비롯된 형식적인 수단에 불과합니다.
영류태왕은 천리장성 축조명령 이후 당에 태자 환권까지 입조시키는데, 일부에서는 이를 태자를 통해 당의 허실을 엿보게 하려고 한 것이라고 하지만, 태자 입조시켜 첩보활동을 벌이게 될 경우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큰 패입니다. 고구려의 태자 입조는 한 나라의 군주가 입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국제적으로도 매우 큰 문제입니다. 고구려는 고국원태왕 때 어쩔 수 없이 전연에 태자 입조를 한 번 있지만, 영류태왕 때하고는 상황이 다릅니다. 태자 입조는 국내에서 당의 변화된 조공책봉책에 굴복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고구려 조정내부의 반발세력이 일어나게 되니까요. 진대덕의 경우는 고구려에 대해 고자세로서 고구려의 주요 거점지역을 탐사하고 돌아가는데 당시 대대로인 이리거세사까지 수 차례 만나는 등 어려움이 없었던 반면 고구려의 경우는 진대덕의 경우와는 다릅니다.. 따라서 태자 환권의 첩보는 실질적으로 가능한 일도 아니며 시도조차도 할 수 없다는 겁니다. 당시 당은 어떻게든 고구려에게서 꼬투리를 잡아 전쟁을 일으키려 했는데, 그런 분위기에서 당태종이나 장손무기 등은 태자 환권을 철저히 감시했을 것이 자명합니다. 그저 당과의 전쟁 억제를 위해 태자를 보낸 것에 불과합니다.
태자 입조에 대한 당태종의 답례로 직방낭중 진대덕을 보내는데, 영류태왕은 자신이 쌓으라고 지시한 천리장성을 온 천하의 지리와 각국의 원근을 재는 관직인 직방낭중 진대덕에게 그대로 노출시키고, 진대덕이 방문한 성의 관리들은 진대덕의 후한 예물들을 받고 기쁘게 골고루 인도하고 진대덕은 고구려의 허실을 엿보았으나, 영류태왕 정권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영류태왕의 정권은 당나라와 당태종에 대한 위기의식이란 도저히 찾아볼 수 없으며 국경의 기강 또한 흐트러질대로 흐트러졌습니다. 이는 기본적으로 영류태왕 정권이 국방정책에 소홀히 하였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일부에서는 당나라의 고구려에 관한 정보는 진대덕의 첩보행각 보다는 4번에 걸친 고수 전쟁에서 축적된 정보로 알았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하지만, 1차 고수전쟁시 수나라는 고구려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지 않은 채 무작정 대군을 내어 침공했다가 고구려의 본토도 밟아보지 못하고 육군은 요서에서 패하여 회군하고 수군은 임유관 앞바다에서 전멸당했습니다. 2차~4차 고수전쟁 또한 수양제는 고구려에 관한 충분한 정보를 수집하지 않은 채 고구려를 침공한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기록만으로 봤을 때 수문제와 수양제는 당태종 처럼 적극적으로 고구려의 정보를 캐내려는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았습니다.
수나라의 4번의 침공으로 인해 공성 노하우는 쌓였겠지만, 고구려에 관한 지리적 정보는 매우 단편적이고 제한적일 수 밖에 없고, 더군다나 비록 형식상이기는 하지만, 고구려는 천리장성을 장기간 축조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를 성공적으로 정벌하기 위해서는 보다 새로운 정보가 필요한 시점이었습니다.
때문에 당태종은 직방낭중 진대덕을 답사로 둔갑시켜 첩보행각을 한 것이고, 진대덕의 첩보행각은 매우 만족스러워서 진대덕의 첩보행각은 당태종 본인도 크게 기뻐하여 즉석해서 전략을 수립할 정도였습니다. 나중에는 장검과 이도종을 요하 주변까지 파견하여 요하 주변의 지리 정보를 수집하게끔 하고, 이 과정에서 이도종은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합니다. 당태종은 고구려와의 전쟁에 앞서 수문제나 수양제와 달리 정보전을 중요시 여긴 군주로 그 방면에 최선을 다하였고, 거기에 의도치 않게 결정적인 도움을 준 것이 영류태왕 정권입니다.
당태종의 뛰어난 정보전으로 인해 이후 당나라는 수나라와는 달리 초전 부터 진격로로 고구려의 허를 찌르는 예를 들어 1차 방어선 역할을 해야 할 요하가 무용지물이 되고, 현도성과 신성이 먼저 공격당하는 등 다양한 전술을 구사할 수 있었습니다.
당나라는 수성을 잘 하기로 유명한 고구려와 전쟁을 보다 수월 하게 하기 위해 이미 수나라대에 강력해진 포차 등 공성무기들을 더욱 강력하게 개량합니다.
그리고 수양제가 일일이 보고 해야 하는 비효율적인 명령체계를 만든 것에 비해 당태종의 경우 수월한 편이었고, 당나라의 병력에는 글필하력, 아사나씨들, 집실사력 등 상당수의 돌궐족들도 있었던 만큼 고수전쟁과 고당전쟁은 여러모로 비교불가입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전쟁 직전 연개소문과 그 반대파들은 형식적으로나마 극적인 대타협을 했음에도 항복과 내부분열이 일어난 배경을 시간순으로 추정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연개소문의 정변.
2) 연개소문과 반대파들이 형식적으로나마 대타협하고 전쟁준비 돌입.
*대타협했다고는 하나 정변 일으킨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므로 아직은 서로를 완전히 믿을 수가 없음. 특히 젊은 연개소문은 전쟁 수행능력과 외교능력을 입증한 바 없으므로 그 능력이 의심되는 상황.
3) 연개소문이 직접 신라 공격에 성공함으로 어느 정도 전쟁수행능력을 입증 하고, 설연타, 백제, 말갈, 왜국, 거란 등의 외교에도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둠으로 인해 반대파들에게 절대적인 신뢰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신뢰를 얻은 것으로 추정.
*1차 고당전쟁 직전 까지 내란도 없고, 미리 당에 투항하는 무리들 없었음.
4) 막상 당나라와의 전쟁이 발발하자, 반대파들은 당나라군을 두려워하여 항복을 주장하거나 투항.
* 여러 강국들을 굴복시킨 천책상장이라 불리는 당태종 이세민이 직접 친정한다는 것만으로도 위압감을 줌.
* 고구려의 전쟁 준비 기간이 지난 고수전쟁에 비해 턱없이 짧음.
* 당나라군의 예상치 못한 진격과 요동성 함락.
* 연개소문의 반대파들은 이로 인하여 연개소문의 전쟁수행능력을 다시금 의심하여 연개소문 불신, 고구려가 이대로 멸망하면 부귀영화고 뭐고 없다는 생각에 항복을 주장하거나 항복.
이러한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연개소문은 1차 고당전쟁을 승리로 이끌자, 이후 연개소문 반대파들의 연개소문에 대한 불신감은 상당 부분 해소되고 그의 전쟁 수행능력은 의심하지 않았으며, 연개소문이 죽기 전까지 당나라에 항복하거나 내부분열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가언충이 당고종에게 그간 당나라가 고구려를 이길 수 없었던 것은 고구려에 틈이 없었다고 한 말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일부는 연개소문이 1차 고당전쟁에서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며 연개소문은 1차 고당전쟁에서 공헌한 것이 없다고 하나, 연개소문은 대전략을 수립하는 수뇌부에 있었기에 꼭 야전에 직접 뛰어들 필요도 없습니다.
히딩크 감독이 경기장에서 뛰는 않는 것과 유사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모든 당나라측 기록에는 고구려의 핵심은 연개소문이며 당나라에게 거만하게 행동한 것도 연개소문이며 1차 고당전쟁 직후 당나라의 연개소문 암살계획 등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당나라에게 있어 모든 '원흉'은 연개소문이었습니다. 또한 당시 고구려정권이 연개소문을 중심으로 한 정권이었는데, 그가 전략의 중심에서 빠져있었다는 말이 되지 않습니다.
연개소문이 장기간 동안 고구려의 중심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1차 고당전쟁에서 자신의 능력을 입증하였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연개소문이 1차 고당전쟁에서 아무것도 한 것 없이 실책만 범하였다면, 장기집권은 커녕 바로 쫓겨났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1차 고당전쟁(전인지 후인지 기억이 가물 가물...;;) 때도 당나라 최고 전략가 이정이 연개소문이 병법을 잘 안다라고 한 바 있고 연개소문의 전략적 감각은 준비가 미비했고 여러 모로 불리한 조건에서 치른 1차 고당전쟁 보다는 본격적인 2차 고당전쟁 때 제대로 드러납니다.
8. 2차 고당전쟁시 요동방어망만 보강축조하고 수군을 육성하지 않아 당군에 의해 평양지역에 피해를 입은 것은 단순히 연개소문의 착오와 전략의 경직성 때문인가?
- 1차 고당전쟁 이후 당태종은 대규모 수군 육성을 하는데, 이 때문에 백성들은 불만이 커져 나름 큰 규모의 반란까지 일으키고, 이에 대한 당나라 정부가 파견한 진압군이 무려 2만 명이나 되는데, 아무리 먼 지역에서 고구려 등이 눈치 채지 못하게 수군 육성을 하더라도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반란이 일어날 정도였으면 첩보전을 즐겨 사용한 연개소문이 당나라의 수군양성 계획을 모를리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연개소문은 수군 육성을 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연개소문이 대규모 수군 양성책을 펼쳤다면 자연히 요동방어망을 지킬 육군이 줄어듭니다. 수군을 육성 하더라도 엄청난 물량공세를 자랑하는 당나라의 수군을 능가할지는 미지수입니다. 연개소문이 수군 육성에 올인하였다면 최악의 경우 2차 고당전쟁 때 요동 방어망과 압록강 방어망이 붕괴되어 3차 고당전쟁 때 처럼 평양까지 노출시켜 그대로 멸망으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더군다나 당나라는 1차 고당전쟁 후 요동의 여러 성들을 소규모 부대로 소모전을 벌입니다.
당이 소규모 부대를 요동방어망에 투입한 이유는 고구려를 지치게 하려는 것과 그곳에 고구려의 이목을 집중 시키는 눈속임 작전의 일환으로 보여집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정작 대규모로 침공해온 곳은 요동방어망이 아니라 평양쪽이었습니다.
요동방어망은 방어해야 하는 범위가 매우 넓어서 대규모의 군사들을 고루 배치해야 하는 반면 평양쪽은 방어하는 범위가 요동방어망에 비해 좁으므로 어느 정도 규모의 군사들만 있어도 기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에 최소한 시간 끌기라도 가능하나, 만일 요동방어망의 배치된 군사들의 반 정도를 차출하여 평양 해안가 쪽에 배치시키게 된다면 요동방어망은 재기능을 다하지 못할 가능성이 큽니다.
때문에 연개소문은 당나라의 의도를 알면서도 만의 하나 당군이 대규모 군사로 요동방어망을 침공할 수도 있었기에 요동방어망을 지속적으로 보강 축조할 수 밖에 없는 배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연개소문이 바보라서 수군을 육성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수군을 육성하기 위해 요동방어망이 무기력화 되도록 방치하는 무모한 짓을 연개소문은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9. 연개소문의 후계자 선택은 잘못된 것인가?
- 개인적으로는 연개소문의 후계자 선택도 당시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봅니다. 연개소문이 후계자에 관한 본인 사후 최상의 전개는 장자인 연남생에게 막리지 자리를 주고 남건, 남산이 남생을 보좌하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우선 명분상으로도 연남건 보다는 연남생이 장자이기 때문에 유리한 위치에 있고 만일 남생 보다 약간 자질이 뛰어난 것으려 여겨지는 남건을 택하였다면 필연적으로 피바람이 불었을 것입니다. 특히 연남생의 배후 세력으로 추정되는 강력한 구귀족인 국내성 세력과 싸움도 피하지는 못했을 것이고 고구려에는 극심한 내분이 일어났을 것입니다.(결과적으로 내분이 일어나긴 했습니다.)
첫댓글 오 좋은글입니다. ^^
잘봤습니다~~^^
고구려 후기의 정치세력이 국내성 출신과 평양성 출신으로 구분된다는 논리는 '임기환' 선생님의 주장 이후 주류적 논지가 되고 있긴 하지만 학자들 스스로가 인정하듯 '편의상' 구분지은 것에 불과합니다. 마치 그것이 커다란 흐름인 듯 주장할 근거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국내성 지역 벽화고분이 여전히 수준높게 조성되는 것은 맞지만, 후반기에 접어들면 평양지역 고분벽화의 영향력이 일정부분 수용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평양의 정치적 위상이 우월하다는 사실의 단서임과 동시에 양지역간 교류가 적지 않았음을 반증합니다. 섣부른 이분법적 구도의 형성은 정치사를 단조롭게 만들수 있을 것 같은데요.
저도 편의상 구분 지은 것은 알고 있습니다. 고구려 귀족들의 스펙트럼이 넓었던 만큼 당연히 국내성쪽과 평양성쪽 간에도 이해관계가 다른 계층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을지문덕'은 그 등장과 활약상, 생몰년 등 어떤 것도 밝혀진 것이 없는 인물입니다. 때문에 '김원룡' 선생님 같은 경우 이를 중국의 '위지경덕'과 같은 출신의 인물로 설정해보기도 하셨습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고구려 자체의 전승자료가 전하지 않는 까닭이지, 정치적 사건을 통한 제거 따위로 해석할 여지가 없습니다. 낙랑 계열 중국유민세력의 경우 역시 다양한 해석이 상존하고 있습니다만 대수전쟁 시대까지 이들을 '낙랑 왕씨'로 칭할 수 있을지는 불투명 합니다. 낙랑이 고구려로 흡수되고 평양이 수도가 된 이후의 상황임을 감안하면 이 가설은 지나친 감이 있습니다.
을지문덕 같은 경우는 평양 석다산 출신이라 하고, 그의 관한 민중설화들이 있는 것으로 볼 때 백성들과 비교적 가까이 있던 계층이었음을 가정할 수 있습니다. 을지문덕은 평양 출신의 신흥 무장 세력 중 하나로 온달 같이 무로써 출세한 부류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더 추론해보면 이러한 을지문덕은 전쟁 등이 있어야 공을 세워 신분상승을 꾀할 수 있기에 그의 정치적 성향은 대외강경파라 여겨집니다. 낙랑계열은 제가 잘 모르겠으니, 좀 더 공부를 해야 겠습니다.
연태조와 고식의 연대는 어느쪽이 선후시대의 인물인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대체로 동시대의 인물이 아니었던가 추정하며, 따라서 막리지 자체는 여러명의 인물이 병임할 수 있는 직책이었던 것이라 생각합니다. 고식 세력의 위세가 연씨를 능가하였다는 근거는 성급한 주장이 아닌가 합니다. 일본서기에 나타나는 '이리거세사'는 '연개소문'을 의미합니다. 이 부분은 명백한 오류인 듯... 다른 사람의 글을 소개하는 것은 물론 경우에 따라 얼마든지 이루어질 수 있는 일입니다만, 신중한 검토가 있은 이후에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본문 가운데 1번에 해당하는 부분만 살펴보았습니다. 너무 많은 오류가 보여 더이상은..
음... 연개소문은 <<일본서기>>의 '이리가수미'가 맞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이리가수미가 정변을 일으켜 이리거세사를 제거하고, 도수류금류를 대로로 세웠다는 내용 아니던가요?
연태조는 신흥 귀족출신으로 강경파로 추정되며, 이리거세사는 이리가수미(연개소문)에게 제거된 것으로 볼 때 대외온건파인 것을 알 수 있고, 전통귀족인 고식 가문이 연개소문의 정변 때 살아남고 일정 이상의 권력을 지닌 것으로 볼 때 연씨가문과 정치적 성향이 크게 다르지 않거나 혹은 중도적 위치에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를 토대로 추론을 해보면 영류태왕은 고식가문을 통해 연태조와 이리거세사를 대립을 중재하였다고 추정되며 천리장성의 정치적 성격도 중재의 한 일환으로 보이며 적어도 환권태자의 당나라 입조가 있기 전까지의 대대로는 고식으로 보이고, 환권태자의 입조는 이리거세사가 대대로직에 오른 후로 봅니다.
중재를 하려면 적어도 연씨가문이나 이리거세사 보다는 세력이 컸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고식가문이 중재 역할을 했더라도 영류태왕대의 대외정책은 대체적으로 온건적이었던고, 이리거세사가 결국 대대로직에 오르는 것으로 볼 때 온건파인 이리거세사와 고식가문의 세력 차이는 많이 차이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연씨가문이 카귀족들에게 배척을 당하고 연개소문이 직접 머리를 숙이고 정변을 일으켜야만 정권을 잡을 수 있었던 현실을 보면 연씨가문은 이리거세사와의 세력차이는 컸을 것입니다. 당시의 세력 구도는 고식가문>=이리거세사>>연씨가문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좋은 글입니다. 하지만 제 생각과 많이 다른 점도 있어서 몇 자 씁니다. 일단 1,2,3번은 저도 비슷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4번은 분명 차선책으로 전쟁을 선택한 것이 맞다고 봅니다. 일단 고구려 여건상 당의 인정이 필요했다고 전 봅니다. 영류태왕정권동안 일단 당을 형식적이나마 상국으로 인정한 것은 사실이고 내부 불안정이 상당할 정도로 이른 이상, 일단 전쟁을 피하고 싶었겠죠. 신라에 대해서도 김춘추의 거짓말에 놀아나는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속은것처럼 할 정도니까요. 그러니 분명 소수파 정권으로써 전쟁보다는 단기간이나마 당의 인정이 필요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5번은 분명 실패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일단 백제의 우위가 절정으로 이르렀다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고 전 봅니다. 신라입장에서는 방어전이고 전장도 신라영토에서 주로 벌어진 전투긴 하지만 대야성 전투를 제외하고 큰 전투는 전적비교상 거의 다 신라가 이겼습니다. 즉 백제는 소규모 국지전에서는 압도적 우위를 보였지만 신라에게 대규모 전면전투에서는 연전연패를 하다시피한 상황이었습니다. (전적 비교하면 23승 12패긴 하지만 대규모 전투에서는 2승 4패입니다.) 즉 제로섬게임수준이란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백제는 신라에 대해서 국력에서 절대우세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백제 수군이 강하다고 해도 고구려 수군에 비해 절대우세라고 할 수 없고 육상에 의한 보급로와 해상에 의한 보급로는 당시로서는 차원이 다릅니다. 또한 고구려 입장에서 신라와 접한 국경이 백제와는 거의 3배 이상 길었습니다. 백제와는 오모리산성이나 낭비성 정도에서나 접경하거나 대륙백제 일부지역이나 접하지만 신라와는 추가령 구조곡이나 임진강 백리장성 전체를 국경선으로 합니다. 단순 비교해도 투입해야 하는 병력 규모가 아무리 적게 잡아도 2배이상이 됩니다. 신라와 동맹을 한다면 백제전선을 감안해도 대당방어선에 투입할 수 있는 예비병력수가 늘어납니다.
저는 백제가 신라 보다 압도적으로 우위를 차지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데, 본문에서 표현을 잘못하였군요. 본의는 의자왕의 신라에 대한 공격은 그 어느 때 보다 매우 격렬하여 그것이 절정에 치닫았다는 것입니다. 당시 백제의 신라에 대한 우위 여부는 신라와 백제의 지배층의 인식과 신라의 외교방향, 그리고 주전장, 공격주도권 등 다양히 검토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저는 백제 수군이 고구려 수군 보다 절대우세라 한적은 없습니다. 오히려 수군은 고구려가 백제 보다 강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제 전제는 당나라 수군과의 연합입니다. 물론 평양직공은 신라가 멸망해야 가능하겠습니다만...
또한 제가 말하는 것은 백제가 '보급기지'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백제의 어느 섬에 보급기지를 만들어서 당나라군이 가져갈 수 있도록 일종의 중간지대역할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과서 지도대로라면 6세기의 고구려는 백제를 공격하려면 신라경내를 거쳐야 하거나 수로 공격밖에 없겠지만, 당시의 국경은 선이 아니라 점이기 때문에 육로 보급도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지 않아 싶습니다.(물론 이것도 신라가 멸망했을 때 원활하겠지만.) 신라를 백제가 견제해주기 때문에 고구려는 신라전선에 있던 병력을 대당전선에 투입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고백동맹의 주목적도 거기에 있습니다.
6,7,8번은 저와 의견이 같습니다. 특히 7번과 8번은 연개소문 개인 능력보다는 고구려라는 나라 자체의 경제력 쇠퇴가 결정적이었죠. 25년간 10회의 회전을 치른 마당에 고구려의 국가총동원 능력은 분명 642년경보다 떨어지게 됩니다. 잦은 대량전사자 발생과 내투는 국력자체 소모정도가 극심해졌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고 봅니다. 아무리 전략이 좋아도 국력소모가 심각해지면 결국 전쟁에서 패한다는 것은 2차세계대전 독일제국이 잘 보여줍니다.
간단히 봐도 645년경에 주필산전투와 661년 압록강 도하전 당시 전사자가 3만이 넘게 나오는데 지휘관 잘못도 있지만 결정적으로 이미 고구려군의 상태가 정상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주필산전투야 지휘관 잘못이 크지만 압록강전투는 지휘관보다 분명 고구려 국력 쇠퇴의 단적인 예라고 전 봅니다. 도하전에서 그것도 정면돌파를 시도하는 기병대를 못 막았다는 것은 이미 전투력 저하가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475년경 한강도하전에서도 백제군은 단 하루도 버티지 못하고 아차산의 고구려군이 몽촌과 풍납토성으로 도하하는 것을 막지 못했적도 있습니다. 당시 백제군도 막장까지 갔으니까요
그리고 제 생각이지만 연개소문정권은 이미 해상방위에서 수세적인 입장을 결정한 것으로 봅니다. 수나라 수군과 달리 당나라는 로테이션식으로 전투를 치렀지만 고구려군은 그런 경제적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차라리 대서양방벽과 같은 사고를 가졌던게 아닐까 생각됩니다. 상륙하면 무찌른다.(롬멜장군의 사고)식으로 해안방비체계를 했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실제로 선박소모량이 건조량을 따르지 못하는 655년 이후에는 수군활약상이 거의 나오지 못합니다.(대서양전투와 같은 상황)
저는 솔직히 말해서 고구려에 관련된 문제는 국내 역사서로써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중국 25사 전체를 까발려도 겨우 이해 될뚱 말똥 하기에 고구려사 만큼은 제 자신은 눈팅족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여기 카페의 ★明治好太王★ 님, 신농님, 미주가효님,성법맨님등, 그리고 여기 카페 김용만 주인장님, 김준수님 한단인님,비사인님등 참으로 고구려사에 대한 다양한 해석에 대해 참으로 많이 배우고 느끼고 있습니다...적어도 고구려사에 대한 보다 제대로된 역사 인식과 이해를 공유하기에는 여기 카페가 가장 합리적이며 사실적인 역사해석을 하는 카페라고 자신있게 추천하고 싶은 카페입니다.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