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서점에 가면 많은 고대사 관련 서적들을 볼 수 있다. 그 중 상당수가 역
사전공자들의 것이 아닌 소위 '재야사학자'라고 분류되는 이들의 것인데, 그
중에서도 유난히 눈길을 끄는 주장이 하나 있다. 바로 고구려, 백제, 신라는 물론 고려와 조선 전기까지 우리 민족의 주무대는 중국 대륙이었다는 정용석씨의 주장이다. 그의 주장은 내용이 지나치게 황당하여 논란의 여지마저도 없어 보이지만, 생각 밖으로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이 그의 논리에 현혹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에 정용석씨의 저서 중 "고구려, 백제, 신라는 한반도에 없었다.(동신출판사, 1997.)" 와 "중원(청노루, 1995)" 을 주 텍스트로 삼아 그의 주장이 가지고 있는 논리적 허구성을 밝혀보도록 하겠다.
정용석씨 주장의 요지를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조선 전기까지 우리 민족의 주무대는 중국대륙이었다. 그러나 청의
건국과 함께 그들과의 주도권 다툼에서 밀려나 한반도로 쫒겨났고 청
의 역사 조작에 의해서 우리 민족이 처음부터 한반도에서 살았던 것처
럼 역사왜곡이 일어났다. 그리고 일제시기에 들어와서는 일본인들에 의
해 그 음모가 더욱 심화되었다.
2. 진실을 밝힐 수 있는 자료로는 "삼국사기","삼국유사"가 있다. 이들
사서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 민족의 국가들이 한반도 내에 있
었 다는 문장을 결코 발견할 수 없다. 고로 우리 조상은 중원에 있었다.
그는 일반적인 극우 재야사학자들이 사대주의 사서라고 꺼리는 "삼국사
기"를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독특한 면을 보이고 있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고려도 중국대륙에 있었던 국가니 김부식이 사대를 하려
고 해도 할 대상이 없는 셈이다) 특히 "삼국사기"의 기후, 자연 현상에 대한 기록에 커다란 관심을 보이는데, 그의 대표적 저서인 "고구려, 백제, 신라는 한반도에 없었다."의 전체 내용 중 절반에 가까운 분량이 기후관련 기사의 분석이다. 그는 "삼국사기"에 적혀있는 메뚜기떼의 존재, 신라의 화산 폭발과 지진 기사, 신라와 백제에 따로 생긴 가뭄과 홍수, 한여름의 우박과 서리 등을 제시하며 삼국이 한반도에 있었다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모든 부분에 걸쳐 심각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
먼저 그는 삼국사기에 나오는 메뚜기떼가 중국에서만 볼 수 있는 수퍼 메뚜기라고 주장하지만 정작 삼국사기에는 그것이 수퍼 메뚜기임을 입증할 어떤 근거도 보이지 않는다. 일반적인 메뚜기 피해라면 우리나라에서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것으로 보통 '누리가 든다.'는 표현을 쓴다. 따라서 정용석씨의 지적은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있다.
그 다음은 토함산이 화산이라는 그의 논증 방식이다. "삼국사기" 에는 '화산폭발'이라는 표현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고작 '땅이 탔다(地燃).'는 말이 두 번 나올 뿐이다. 이를 가지고 다른 어떤 것도 아닌 화산폭발이라고 단정한다는 것은 엄청난 비약이다. 정용석씨 자신이 직접 제시한, 고려 때 탐라산의 화산폭발을 묘사한 문장과 비교하면 이는 더욱 확연하게 드러난다. 화산 폭발이 자주 볼 수 있는 재해도 아니고 그 파괴력이 상상을 초월한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삼국사기"에서 단지 한 줄, '땅이 탔다.'고 처리한 것을 화산 폭발로 단정한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지진 기록도 마찬가지다. 분명 "삼국사기"에는 지진 기록이 자주 나온다. 그
러나 과연 지진은 한반도에서는 있을 수 없는 현상인가. 그렇지 않다. 단지 강도가 약할 뿐이지 한반도에서도 지진은 하루에도 몇 번씩 일어난다고 한다. 더구나 정용석씨가 한반도의 국가로 인정하고 있는 조선의 기록, 즉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커다란 지진이 명백하게 기록되어 있다. 한반도에서는 절대로 지진이 일어날 수 없다는 그의 주장은 전혀 사실무근인 것이다.
발생연도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가뭄과 홍수 등의 문제제기에서는 정용석씨
의 사료이용의 미숙함이 잘 드러난다. 그는 한반도에서의 장마 전선은 동서로
늘어지므로 신라에 장마가 지면 백제도 장마가 질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런데 "삼국사기"에서는 신라에는 홍수가 났는데 똑같은 해에 백제에서는 홍수에 관한 아무런 기사도 찾을 수 없다고 지적한다. 이는 좁디 좁은 한반도에서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삼국을 중국 대륙에 비정하여 서로간의 거리가 상당한 차이를 보여야만 가능하다는 설명이다.
그의 논리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과연 한반도에선 홍수가 전지역에서 동시에 나는가 하는 문제다. 우리의 경험을 더듬어 보건대 전혀 그렇지 않
다. 전국 단위의 장마라 하더라도 경상도에 폭우가 내려 홍수가 날 때 전라도
엔 구름만 잔뜩 끼고 비 한방울 안 올 수도 있는 법이다. 심지어 한 쪽에 홍수
가 났는데 다른 한쪽은 가뭄이 드는 현상도 종종 볼 수 있다. 그 뿐이 아니다. 정용석씨가 신라와 백제의 기상현상이 같아야한다고 주장하는 배경에는 두 국가의 위도가 비슷하다는 기본 전제가 깔려있다. 그런데 삼국은 자기 나라의 기후를 기록할 때 어느 지역을 기준으로 했을까. 물론 각국의 수도였을 것이다. 누구나 알고 있다시피 5세기 중반까지 백제의 수도는 한성이었다. 신라의 수도인 한반도 남단의 경주와는 위도차가 상당히 큰 것이다. 설령 같은 위도상이었을 땐 홍수가 동시에 나야한다는 정용석씨의 주장이 모두 맞다고 치더라도, 삼국 시대의 4분의 3가량을 차지하는 약 600년 동안의 한성시대에는 정용석씨의 지적이 전혀 무의미할 뿐이다. 이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서울과 경주는 언제나 동시에 홍수가 나야한다는 사실을 입증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정용석씨는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무시했다는 점과 변화무쌍한 기후현상을 지나치게 도식적으로 적용시키려 했다는 점에서 비판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다음의 두 번째 문제는 보다 심각한 것이다.
그는 신라 측의 기록엔 가뭄이나 홍수가 났는데 똑같은 연도에 해당하는 백
제측 기록을 보면 아무런 언급이 나와있지 않으므로 이는 한반도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라 했다. 하지만 이는 "삼국사기"라는 책이 가지고 있는 한계성을 염
두에 둔다면 전혀 언급할 가치가 없는 지적이다. "삼국사기"는 고려 중기에 김
부식이 편찬한 책으로, 이때는 삼국이 망한 지 벌써 몇 백년이 지난 후다. "삼국사기"를 편찬할 당시 고구려, 백제, 신라의 기록들은 이미 적지 않은 부분 유실된 상태였다. 그런 열악한 환경에서 만든 "삼국사기"가 연대로 보면 천년 전의 것도 포함된 기상기록을 철저하게, 한 나라도, 한 해도 빠짐없이 반영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당연히 불가능하다. 이런 이유로 백제나 신라의 기상 기록이 어느 한 쪽의 분실도 없이 양 쪽 모두 온전히 남아 "삼국사기"에 나란히 수록되었으리라는 보장은 누구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용석씨는 삼국의 기록이 단 한차례의 누락이 없을 때에나 가능한 '꿈의 방법론'을 동원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그가 역사연구를 함에 있어서 가장 기초적인 단계인 사료분석을 전혀 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정용석씨의 서술에서 놀라는 것은 위에서 살펴본 사료 해석의 자의성
과 미숙함 뿐만이 아니라, 그가 자신의 주장과 배치되는 모든 사료를 조작으로
몰아붙인다는 점과, 스스로도 혼란스러워 할만큼 모순으로 가득한, 일관성이
없는 서술을 한다는 점이다.
그는 한반도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유물이 한 점도 남아있지 않다고 단언
하며 우리가 국보, 보물로 지정한 갖가지 유물들은 우리 민족과는 전혀 상관없
는 변방 어느 민족들이 남긴 것들이거나 일제시기에 일본인들이 만들어놓은
가짜들이라고 한다. 그의 논리에 의하면 고구려, 백제, 신라가 존재했던 곳은
대륙이기 때문에 광개토왕릉비나 진흥왕순수비 등도 모두 조작된 것일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의 '조작론'은 특히 무령왕릉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절정을 이
룬다. 무령왕릉은 백제 중흥기를 이룬 무령왕의 능이며 발굴 과정에서 발견된
왕명과 연대가 적혀있는 지석의 존재로 "삼국사기"의 신빙성을 입증하는 존재
로 유명하다. 때문에 무령왕릉의 발굴은 해방이후 최대의 발굴이었다고 평가
받기도 한다. 그런데 그의 주장대로라면 대륙에 있어야할 무녕왕릉이 한반도
에서 발견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거대한 음모이론을 전개한다.
다소 장황한 감이 있지만 그의 글을 발췌, 인용해 보겠다.
(열도인들이)...무령왕릉이라는 것을 조성할 계획을 세워 비밀리에 진행하였
을 것이 틀림없다...벽돌을 구워 무덤 내부의 벽을 만들 때 불교와 도교사상의
혼합국가였다고 생각하여 벽돌에 연꽃무늬도 넣고...글씨는 서예가에게 부탁
하여 육조풍 해서체로 써달라고 부탁...이렇게 만들어놓고 세월의 흐름에 따라 고색의 농도가 무르익으면 공주의 백제땅 어디에서 왕릉이 발견되었다고 발표
하려고 했으나 2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열도인들은 본국으로 돌아간다...열도
의 어용사학계는 남한의 식민 사학계에 다음과 같이 귀띰해 주었을 것이다.
'공주 어디에 가면 백제의 왕릉 같은 것이 있을 것이다...' ...남한의 체제사학
계는 이것저것 살필 겨를도 없이 허겁지겁 공주로 달려 갔을 것이 뻔하다...말
하자면 공주의 백제 무녕왕릉이라는 것은 열도의 어용사학자와 극우제국주의
자들, 반도의 친일분자들이 만들고, 남한의 기득권 식민사학자들과 권력자들,
그리고 그곳에 붙어 기생하는 줏대없는 기회주의사학자들이 확인 도장을 찍어
준 합작품인 것이다...안타까운 것은 무령왕은 어느 곳에 장사를 지냈다는 문
헌기록이 없기 때문에 현재 대륙의 백제땅에서도 찾아내기가 힘들다.
"중원" 161~166.p
아무런 근거도 제시하지 않는 악의적인 추측과 그림을 그리듯이 자세하게 서
술된 왕릉 조작 과정은 그의 정상적인 사고능력을 의심케 한다. 그는 삼국시대 당시의 지석으로는 유일한 존재인 무령왕릉의 지석 양식이 중국과 후대의 지
석과 비교했을 때 형식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고 너무 조잡하다는 등의 도
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를 대며 무령왕릉을 부정하다가 정작 진짜 무덤은
자신도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는 한마디로 무책임한 음모론을 끝낸다. 그의
논리대로라면 우리가 예전에 사용했던 다이얼 방식의 구식 전화기들도 버튼과 재다이얼 기능이 없는 조잡한 것에 불과하므로 조작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한마디로 정용석씨의 주장은 억지일 뿐이다.
지금까지의 검토로 보았을 때 정용석씨의 글쓰기가 논리성을 현저하게 결핍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단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분명히 자신의 손으로 가짜임을 논증했던 '광개토왕릉비'와 '진흥왕순수비'를 다른 것을 논증할 때 아무렇지도 않게 근거 자료로 이용하는 경우다. 몇 가지만 뽑아서 살펴보자.
'광개토왕비는 새로 만들어졌거나 다른 사람의 비를 변조한 것에 지나지 않
는다. 그러므로 그 자체가 전부 엉터리라고 할 수 있다.' "중원" 106.p
'...우선 국가 체계로 가장 먼저 자리잡고 활동했던 나라는 고구려이다. 광개
토대왕 비문에 기록되어 있듯이 신라와 백제는 엄연히 고구려의 속민이나 속
국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는 한반도에 없었다." 249.p
'...그러나 고구려를 대륙의 무대로 옮겨놓고 보면 고구려의 이미지는 달라
지고 활동한 무대와 함께 외교사절을 보낸 경로가 일치함을 보인다. 그것은 강
력한 국가 체제를 유지했던 고국양왕, 광개토왕, 장수왕 시절을 잘 표현하는
것이다. 장수왕이 세운 광개토왕비에 58개성을 장악하여 굉장한 강역을 토벌
했다는 의미가 맞아떨어진다.'
"고구려 백제 신라는 한반도에 없었다." 253.p
삼국은 상상을 초월할 수 없을 정도로 넓은 강역이었으니 어찌 한반도에 국
한된 내용이 한 구석에라도 있겠는가? 광개토왕 비문을 보아 알 수 있듯이 고
구려의 강역은 대단했다.
"고구려 백제 신라는 한반도에 없었다."355.p
'이것은 진흥왕의 순수비로써는 너무 형편없는 자격미달의 경우에 해당하는 것으로, 몇몇 사람들에 의해 한반도에다가 고구려, 백제, 신라를 짜집기 해놓
고 진흥왕이 순수를 했다고 하니까 '여기는 무슨 비, 저기는 어떤 비' 하는 식
으로 만들어 놓은 데 지나지 않는다.'
"중원" 94.p
'북한산비 마지막 부분에 '나는 만대에 이름이 기억되리라'라고 새겨져 있
다. 이 기록을 볼 때 진흥왕은 틀림없는 황제이고 천자이다. 진흥왕이 제후라
면 '천대','천세'라고 썼을 것이다...' "중원" 77.p
' 짐이라는 용어는 천자국의 천자, 황제국의 황제만이 쓸수가 있었다. 따라
서 진흥왕은 순수할 수 있는 자격이 있고, 패주로서 왕 중의 왕 태왕이며, 자신
을 표현할 때 짐이라고 했다고 순수비 비문에 확실하게 쓰여져 있으므로 진흥
왕은 당연히 황제다.' "중원" 84.p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는 식으로, 그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내용은 자신이 힘들여 가짜라고 증명(?)한 것조차도 가리지 않고 이
용하고 있어, 읽는 사람을 아연하게 만든다.
정용석씨의 주장이 던져주는 난점은 한국사를 중국 땅으로 옮겼을 때 중국사
는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인가 하는 점이다. 한 예로 평양성 문제가 있다. 그는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성의 다른 이름이 장안성이라는 점을 들어 고구려의 수
도 평양성을 우리가 전한의 수도로 알고 있는 장안, 즉 지금의 서안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곤란한 것은 고구려와 동시대에 존재했고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
사자인 당나라의 수도가 바로 장안이라는 점이다.정용석씨의 주장대로라면 우
습게도 당군은 수년간 자기 나라의 수도를 포위하고 공격을 한 셈이 된다. 더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만약 삼국이 중국 대륙의 다른 국가들과 얽히고 섥
혀 존재하고 있었다면 무엇을 근거로 삼국만 뚝 떼어다 독자적인 민족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며, 어째서 정용석씨가 그렇게 신빙해마지 않는 "삼국사기"에는 다른 나라와의 전쟁은 없고 같은 민족인 삼국끼리의 전쟁만 기록되어
있는가하는 점이다. 우리나라의 삼국시대는 공교롭게도 중국의 삼국시대와도
겹친다. 정용석씨 주장대로라면 어째서 "삼국사기"에는 유비, 조조, 손권과의
전쟁 기사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삼국사기"마저 역사왜곡의 희생물이
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정용석씨가 유일하게 절대적 신뢰감을 보여주는 사
서가 "삼국사기"이며, 그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해주는 모든 근거를 "삼국사
기"에서 찾고 있기 때문이다.
정용석씨의 말대로라면 중국의 "삼국지연의"는 당연히 "육국지연의"가 되어
야하며, 현존하고 있는 모든 사서들은 거짓이 되고 만다. 거기에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상의 인물들도 과연 실재했는지 의심해야만 할 판이다. 이렇게 되면 역사를 연구하는 행위 자체가 불가능하다. 세상에 신빙할만한 사료라고는 단 하나도 남지 않기 때문이다. 오로지 정용석씨가 가르쳐주는 내용 - 그나마 그것도 아무런 근거자료가 없으므로, 이 세상에 오직 그만이 가지고 있는 '진실의 눈'을 통한 가르침 - 이 역사를 연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가 입을 다물기라도 하면 우리는 역사의 진실을 밝힐 수 있는 방법을 영영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정용석씨의 역사 연구는 이미 '믿음'만으로 정진하는 종교의 경지에까지 이르렀다고 할 수 있겠다.
역사 연구에 있어서 가설은 얼마든지 파격적일 수 있다. 하지만 연구의 과정
에서 그 가설과 배치되는 자료가 계속 나온다면 잘못된 가설은 폐기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존재하는 가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용석씨에게는 자신이 세운 최초의 가설이 곧 영원불변의 진리이다. 오히려 자신의 가설에 배치되는 결정적이고 확실한 자료들에 대해서 '조작설'을 적용시키며 자신을 제외하고는 이 세상 사람들 전부가 틀렸다는 식의 독선적인 서술을 하고 있다. 이는 학문의 본정신을 이탈하는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지적할 것은 정용석씨의 그릇된 역사관이다. 그는 걱정스러울만
치 왜곡되고 극우에 치우친 역사관을 가졌는데 그것은 다음의 인용문들에서
알 수 있을 것이다.
반만년 역사를 자랑하는 배달민족의 후예라고 귀가 따가울 정도로 들어온
지가 하루 이틀이 아닌데 그들의(중국) 웅장한 문화유적에 비해 우리는 너무
초라하다 못해 어깨가 자꾸 움츠려짐을 감추지 못할 정도로 왜소한 유적을 평
소에 대하면서 일말의 의심을 나도 모르게 갖게 된다.
"고구려, 백제, 신라는 한반도에 없었다." 354.p
우리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쓴 김부식과 일연의 후손이라고 본다면, 또
그렇게 공부하고 있다면 우리는 언젠가 중국대륙이 다시 분열을 할 때 우리 선
조들이 살던 그 산하로 돌아가야 한다.
"고구려, 백제, 신라는 한반도에 없었다," 355. p
비록 현실은 여기 있지만 와신상담 그날을 위해서 열심히 수학하고 연구하
여 그 옛날 삼국의 영광을 기필코 재현하여야 할 것이다. 특히 고구려 시대의
전성기 강역을 다시 찾아야 한다.
"고구려, 백제, 신라는 한반도에 없었다." 356.p
그에게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문화유산들이 왜소하고 초라하게만 보이는 모
양이다. 어떻게 형성된 컴플렉스인지는 모르겠지만 거대하고 화려한 중국의
문화유적 정도는 되어야 자랑스러운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많
은 유물 유적이 발굴되는 경주에 가도 자기에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되뇌일 뿐이다. 실제로 그는 자신이 역사 연구를 시작하게 된 동기가 진시황릉에서 발굴된 화려한 유물들을 보고 기존에 배우던 우리 역사에 회의감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책에서 고백하고 있다.
가장 심각한 것은 그가 기회가 되면 중국 대륙을 되찾자고 당당하게 이야기
하고 있다는 점이다. 중국 대륙이 본래 우리 것이었다는 그의 주장은 워낙에
터무니 없는 주장이기도 하지만 설령 그의 주장이 모두 맞다고 치더라도 지금
에 와서 연고권을 주장한다는 것은 지극히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다. 그런 논리
가 가능하다면 이 세상은 과거의 영토권을 주장하는 이들로 인해 전쟁이 끝이
없을 것이다. 넓은 영토에 대한 어처구니 없는 욕심과 위대한 조상을 들먹이는 그의 논리는 2차 세계대전 당시의 히틀러의 그것과 일맥상통한다. 심지어 그는 일본 극우 세력의 역사 왜곡에 대해서 '그들 나름대로의 민족주의'라며, 그들을 욕할 것이 아니라 우리도 그들처럼 자국의 역사를 찬란하게 서술해야한다는 요지의 발언까지 서슴치 않고 하고 있다. 이처럼 정용석씨는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도저히 용납하기 힘든 극우적 역사관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상으로 정용석씨의 '삼국의 한반도 부재설'의 문제점을 간략하게나마 살펴
보았다. 비록 책 내용의 극히 일부만을 다루었지만 이것만으로도 정용석씨 주
장의 논리적 '수준'과 극우적 성격을 충분히 밝혀냈으리라 생각한다. 이와 같이 비상식적인 주장이 나왔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지만 그의 주장이 일각이나마 대중들의 호응을 얻었다는 것은 참으로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이는 우리 사회의 역사인식 능력이 얼마나 황폐해졌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을 듯 싶다. '민족'이라는 이름이 신성시되고 민족을 돋보이게 하는 것이라면 어떠한 역사서술이라도 대접받는 사회 분위기가 형성된다면 진정한 역사학은 존립의 이유를 잃게 될 것이다.
첫댓글 펀글이라고 하셨다면 누가 어디에서 쓴 글인지도 밝혀주셨으면 합니다.
아니 그럼 우리나라는 조선전기까지 무인도였다는 말인가???? 어불성설이여 ㅡㅡ^ 그 수많은 유적유물을 어떻게 진짜처럼 만들만들어여 제작기간도 쾌 걸릴텐데
출처라... 퍼온데에서도 출처를 알수 없었습니다;;
이야... 대단하군요. 삼국재중국설 논박하는 것중에서 제일 간단 시원하게 된 것 같습니다. 전반적으로 내용에 동감케 되는군요.
저희 집에도 이 책이 있는데... 한번 생각해봐야겠군요....
하지만 중국에 있다는 태조왕건묘와 박헉거세묘 같은 것은 어떻게 된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