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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게 아니고 주필산 전투에서 고구려 군 소수설들을 살펴보면서 느낀건데 다들 고연수는 관등 5위 위두대형 이대부, 고혜진은 관등 7위 대형인 점과 이후 고당전쟁의 전개에서 욕살이 있을 걸로 보이는 요동성의 포로들, 박작성 구원전에 동원된 군사들 등을 많이 고려하시더라고요.
근데 저는 책부원귀를 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라구요.관등이 2단계나 차이나는 위두대형과 대형 조합에다 고연수는 대부까지 달고 있는데
왜 대모달-말객같은 상하관계가 아니라,
뭐하러 한 군에 대등한 군주가 두명인거지?
명령은 누가 내리라고? 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들이 대등한 군주를 달고 있는 게 이들과 병렬로 대등한 다른 군주들의 존재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바로 고구려 특유의 5부에 동서남북내 외에 상하전후중도 있지 않습니까?
지방을 5부로 수도도 5부로 나뉘는 등 5부로 나누길 좋아하는 전통이 있는 고구려에서 굳이 군대 명칭을 5부로 나눌 때 쓰는 후부군주와 전부군주를 적용해 썼다면
나머지 3방위의 상부군주, 하부군주, 중부군주도 있기에 이를 구별하기 위해 고연수, 고혜진의 군단명을 이렇게 나눈 게 아닐까 싶더라구요.
그래서 관등이 2단계나 차이나고(그 차이로 고연수는 대로회의에 대로로 참석할 수 있고, 고혜진은 참석 못 함.) 대부 작위 유무까지 차이가 나는 고연수와 고혜진이 같은 군단에 같은 직급으로 있는 건 이들이 명령을 주고 받는 사이가 아니라 5개로 조직된 군단을 나눠 5군의 일군씩 지휘하는 군단장들이어서 가능한거고, 그 위에 따로 사령부가 있기에 이런 구성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주필산 전투에서 군주 2명이 5~6만명을 동원했으니, 6만명으로 보면 5부군 체제에서 군주 1명당 3만명씩 지휘했다면 기록대로 15만명이 되는 거고, 5만명이면 한명 당 25000명을 동원한거니 12만 5천명이 되는거지만,
후대의 일이지만 똑같이 5군체제인 고려의 별무반에서도 5군 외에 대원수 윤관 직속 병력이 따로 있음을 고려하면 이들을 지휘했을 거로 추정되는 (겨우 1군을 이끄는 고연수가 5위 위두대형으로 대로회의의 가장 말석이기에 대로회의의 의장으로서 대대로인 백전노장이란 서술과 연개소문이 옹립한 첫 대신인 고정의가 총사령관이 맞다고 봅니다.) 고정의 밑에도 따로 직속군이 있다고 생각하면 이 또한 15만에 근접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다른 분들께서 이런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거라 봅니다."고연수, 고혜진은 각각 북부욕살, 남부욕살로 고구려 남북을 총괄하는 입장이니 북부와 남부의 군세를 동원한 총사령관 아닌가?"라고요.
저는 여기에 대해 고구려 멸망 후 기록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주지하다시피 당나라는 고구려 정복 후 행정체계를 당나라 식으로 이름만 바꿔 계속 유지합니다. 욕살이 있던 것으로 보이는 대성들을 도독부로 바꾼 게 대표적이죠.
이런 맥락에서 이적이 당고종에 올린 표문에서 서부에만 도독부가 5개인 점과 북부에도 부여성 외에 이다조 묘지명을 통해 고구려가 건재하던 시기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 증조부 시기에 여기서 실위를 관장하던 황두도독, 오몽주도독을 역임했던 걸 확인할 수 있습니다.
즉, 고구려 지방 5부에는 분산된 대성마다 욕살들이 병립한 거라 봅니다.개인적으로 저는 연개소문의 동부대인 경우처럼 중앙의 5부대인들이 고려에서 지방의 병마사들을 통합 관리하던 도병마사 같은 기관에서 지방 5부의 일을 통합관리했다고 생각합니다.
안 그러면 중앙에 서부, 동부대인 같은 게 있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얘들이 지방에서 통치하면 고구려판 주목이 등장하는 거니깐요)
그럼 고연수, 고혜진의 북부욕살, 남부욕살은 뭐냐?
≪수서≫고려전에는 내평과 외평의 5부에 욕살을 두었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이게 인구가 밀집된 평양 및 국내성, 한성 등지에도 5부가 있었다는 걸로 해석했습니다.
그럼 수도도 5부로 나뉘었으니 행정 및 중앙군도 5부로 분산 및 귀속된다고 보는 게 자연스럽다 생각하고, 그럼 고연수와 고혜진이 낮은 관등에도 북부와 남부욕살이라는 거창한 이름이 왜 달렸는지, 그리고 기록에 따라 왜 북부욕살과 남부욕살에서 후부군주와 전부군주로 나뉘는지 알 것 같더라고요.
평시 행정직과 전시 행영에서의 군직이 구별된 거라 봅니다.
사실 이건 특별한 게 아닌 게 나중에 고려에서도 전시 5군 편제를 잘만 썼습니다.그럼 대충 이런 그림이 나옵니다.
1위 대대로 겸 삼군대장군(=삼군대모달?)=고정의.
삼군말객=불명(위두대형 이상~태대형 추정)
ㄴ전부군주(고혜진-7위 대형)
ㄴ후부군주(고연수-5위 위두대형 이대부)
ㄴ중부군주
ㄴ상부군주
ㄴ하부군주
이게 제가 생각한 주필산 전투 고구려 야전군 진영입니다.
제가 이렇게 두서없는 글을 남긴 이유는 좀 뇌절이 많이 담겨있긴한데……
1.주필산 전투에서 당군이 붙잡고 놓아준 고구려군 숫자가 오락가락하는데다 심지어 15만 6천 800명을 전부 놓아줬다는 식의 기사에 의구심을 가지게 되었고,
2.결정적으로 고구려군에서 전부군주와 후부군주만 붙잡히고 방위명 부로 군을 나눈 것을 통해 나머지 3부군주들이 있었다고 추론할 수 있는데 이들을 어떻게 했는지 기록이 없다는 점을 통해 최소 9에서 10만 고구려군이 건재했다고 상정했습니다.
3.그래서 이 본대가 주필산에 당군의 시선이 쏠림 틈을 이용해 출동해서 당군을 역으로 공격해 갇혀있던 3만 6천 800명을 구출해 다시 15만에 가까운 위세로 돌아갔기에 15만명 전체를 풀어준 거라는 기록도 있다고 봤습니다.
4.이를 통해 당태종과 고구려 대대로 고정의는 각각 주필산 전투 전 자신들의 지휘관 회의에서 지금 고구려군의 상책으로 안시성과 연계해 보루를 높게 쌓아 병사들을 쉬게하고 적들은 공격을 어렵게 해 전면전을 회피하고 안시성의 보급로를 통해 군량을 먹으며 기병을 풀어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장기전으로 끌고가면 적은 지치고 굶주려 싸울려고 해도 싸울 수 없고 도망치려고 해도 도망칠 수 없으니 이 때가 힘껏 싸우면 이길 수 있을 때라고 말했더군요. 주필산 전투에서 어느정도 손실은 있었지만 그 마저도 당나라 기록대로라면 대부분 돌아왔고 상황도 고정의의 전략대로 50일이나 주필산 일대에서 꼼짝 못하고 수당가화의 기록에선 이때 황제의 6군이 고구려군에게 제압되고, 이적의 흑기가 포위되었다는 소식에 이세민이 두려워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50일 동안 고정의가 13만 6800명 가지고 지연전과 회전의 반복하며 길게 잘 싸운 것 같습니다.
그래서 포위를 풀기 위해 양홍례와 유홍기의 대군이 투입될 정도로요
나중에 따로 김부식이 "스스로 포위를 풀고 나왔지만 저리 위험했의니 이는 부끄러워서 숨긴게 아닌가!"평할 정도로 말입니다.
고연수와 고혜진과의 싸움은 백번양보해도 당군이 고구려군을 유인-포위 공격한 거니, 양홍례와 유홍기가 24군이라는 대군을 이끌고 당태종을 도울 필요가 없으니 저는 김부식의 평가대로 이후 당태종군이 역 포위당하는 다른 싸움이 있었고, 저는 이게 고정의가 남은 3부군주와 구출한 군대로 싸웠다고 생각합니다.
5.결국 지친 당군은 작은 안시성에 집중하지 못하고 이전 요동성과 백암성처럼 당태종이 직접 공성전에 집중하거나 전력을 내지 못하고 중요한 토성을 일개 과의에게 지키게 했다가 책임전가를 하고 토성작전이 실패했다고 전처럼 다른 성을 옮겨 공격하는 게 아니라 전군이 철군하는 모습을 통해 보일정도 힘이 빠진 게 보이니, 저는 이런 점에서 늦게나마 고정의의 전략이 통했다고 보고 글을 써봤습니다.
두서없이 추측과 뇌절 가득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첫댓글 음...의문이 하나 있습니다. 고연수, 고혜진의 군대가 포위되기 전까진 이적의 군대를 몰아붙이고 그랬을 수도 있고, 고정의는 그냥 적당히 관망만 하다가 다른 전선으로 향했을 수도, 후방부대로서 기능했을 가능성도 있을 거 같은데, 왜 굳이 고정의의 부대가 당군과 충돌이 있었을 걸로 가정하셨느냐?라는 의문점이 하나 드네요..흠..